와인/와인 일반

[기초] 와인을 디캔팅하는 이유, 디캔팅이 필요한 와인과 그렇지 않은 와인에 대하여

까브드맹 2011. 11. 10. 06:00

다양한 디캔터

1. 디캔팅(Decanting)

디캔팅은 "디캔터(decanter)"라고 부르는 용기에 병에 든 와인을 따라서 옮겨서 행위입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캉타쥬(décantage)"라고 하죠. 와인을 마실 때 디캔팅이라는 번거로운 작업을 하는 것은 옛날에는 와인을 정제하고 여과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와인에 찌꺼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와인의 여러 성분이 결합해서 생긴 찌꺼기를 와인을 마실 때 제거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죠. 그래서 디캔팅과 디캔터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와인 뿐만 아니라 다른 음료를 마실 때도 흔히 하는 일이었습니다.

카라프 용기

(이란에서 11세기에 사용했던 카라프 용기입니다. 카라프는 와인과 다른 음료를 마실 때 사용하는 손잡이 없는 유리 용기를 말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9/Carafe_Iran.JPG) 

그래서 디캔터가 없을 때 단순히 찌꺼기를 배제하려는 것이라면 구태여 디캔터를 쓸 필요 없이 마시기 며칠 전에 와인을 세워두기만 해도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디캔팅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생깁니다. 새로운 이유가 생긴 배경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있었죠. 18세기 초에 유럽에서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가 보급되면서 와인 산업에 일대 혁명이 일어납니다. 와인을 유리병에 담아 코르크로 밀봉하자 공기가 거의 차단되어서 보관 기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된 거죠. 

와인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되면서 장기간 숙성을 거친 다음 와인의 맛과 향이 완성되는 “뱅 드 가르드(Vin de Garde)”라는 새로운 형태의 와인이 탄생했습니다. 이런 장기숙성 와인은 그전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죠. 더우기 보르도 지역에서 새로 탄생한 까베르네 소비뇽 포도는 탄닌이 풍부해서 장기숙성에 탁월했기에 뱅 드 가르드를 만들기에 적합했습니다. 이후 보르도를 비롯하여 각지의 최고급 와인들이 장기 숙성을 거치면서 맛과 향이 완성되는 형태로 만들어졌고, 오늘날에도 고급 와인은 최고의 맛과 향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숙성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절정에 오르는 고급 와인을 이른 시기에 마시려면 공기와 접촉해서 와인의 맛과 향을 빨리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공기와 접촉시키는 것을 브리딩(breathing)이라 하며 이를 위해 디캔터를 사용하는 것이죠. 

와인을 시음할 때 와인잔을 원을 그리면서 돌려서 와인과 공기의 접촉을 촉진하는 행위를 스월링(Swirling)이라 합니다. 이것도 와인의 향을 강하게 하고 맛을 부드럽게 하려는 행동으로 디캔팅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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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디캔팅 해야 하는 와인들

아무 와인이나 디캔팅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와인은 필터로 걸러내는 것이 많아서 찌꺼기가 거의 없고 장기숙성용 와인도 아니라서 디캔팅 할 필요가 없죠. 오히려 디캔팅 하면 와인의 맛과 향이 일찌감치 날아가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디캔팅 해야 하는 와인은 주로 아래와 같은 것들입니다.

1) 병에 앙금이 생길 수 있거나 디캔팅 하면 풍미가 좋아질 수 있는 레드 와인

① 5년 이상 된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쎄(Grand Cru Classe)와 크뤼 부르주아(Crus Bourgeois) 레드 와인들.

② 10년 이상 된 부르고뉴 그랑 크뤼와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 레드 와인들

③ 5년 이상 된 샤토네프 뒤 빠프(Chateauneuf du Pape)와 에르미따지(Hermitage), 기타 북부 론 지역 레드 와인들

④ 5년 이상 된 이탈리아의 바롤로(Barolo)와 수퍼 투스칸(Super Tuscan) 와인들

⑤ 7년 이상 된 스페인 페네데스(Penedes) 와인과 보데가 베가 시실리아(Bodega Vega Sicilia) 와인들

⑥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 중 빈티지 포트(Vintage Port)와 전통적인 레이트 바틀드 빈티지 포트(Traditional LBV Port), 크러스티드 포트(Crusted Port)는 찌꺼기가 있으므로 반드시 디캔팅 해야 합니다.

⑦ 신세계의 최고급 와인 중에서 까베르네 소비뇽과 시라로 만든 5년 이상 된 와인

※ 20년 이상 된 보르도와 부르고뉴 그랑 크뤼 와인은 앙금이 너무 많을 수 있으므로 시음 24~48시간 전에 세워두어서 앙금이 완전히 병 바닥에 가라앉은 다음에 디캔팅 해야 합니다.

2) 찌꺼기는 없지만, 시음 직전에 디캔팅 하면 풍미가 좋아질 수 있는 화이트 와인

① 독일의 라인(Rhein)과 모젤(Mosel) 지역의 10년 이상 된 최고급 화이트 와인.

② 스페인 리오하(Rioja) 지역에서 오크 숙성한 최상급 화이트 와인.

③ 프랑스 알자스(Alsace)에서 늦게 수확한 포도로 만드는 디저트 와인인 방당쥬 따르디브(Vendange Tardive)과 루아르 지방의 10년 이상 된 고급 화이트 와인, 오랫동안 잘 숙성한 프랑스 그라브(Grave) 지역 화이트 와인

3) 디캔팅 하면 안 되는 와인들

①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끼안티(Chianti) 와인은 대부분 앙금이 생기지 않고, 개봉 후 얼마 지나지 않아도 충분히 맛과 향이 좋아지므로 구태여 디캔팅 하지 않아도 됩니다.

② 샴페인을 비롯한 스파클링 와인은 디캔팅 하는 순간 탄산가스가 빠르게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거품의 느낌보다 화려한 향을 맡기 위해 디캔팅 하기도 합니다)

③ 숙성을 오래 하지 않는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은 앙금이 생기지 않고 신선하게 마시는 것이라서 구태여 디캔팅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차갑게 마시기 위한 칠링(chilling)이 필요하죠.

④ 값싼 레드 와인은 대개 마시기 좋은 상태로 병에 담아 판매하고 힘이 약해서 디캔팅 하면 빠르게 산화하면서 향과 맛이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면 민숭민숭한 와인을 마시게 될 수도 있죠.

3. 디캔팅에 얽힌 에피소드

와인을 주제로 한 만화책인 "신의 물방울"이 처음 나왔을 때 첫 장에 주인공이 디캔팅으로 샤토 무똥 로칠드 2000의 향과 맛을 끌어내는 장면을 보고 수많은 사람이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을 디캔팅 해달라고 했답니다. 그것 때문에 소믈리에들이 상당히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더군요. 

사실 레스토랑에서 주로 판매하는 5~7만 원 이하의 와인 중에서 디캔팅이 필요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5만 원 이하의 와인을 주문하면서 디캔팅을 요청하고 심지어 스파클링 와인을 주문하면서 디캔팅 해달라는 분도 계셨다네요. 고객이 왕인지라 요청에 따라 저가 와인을 디캔팅 해주기도 했겠지만, 사실 그 고객은 맛과 향이 달아나고 힘이 빠진 와인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드셨을 것 같습니다. 

신의 물방울 1권의 디캔팅 장면

(많은 사람을 혹하게 만들었던 문제의 장면. 신의 물방울 1권에 나옵니다. 이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그리고 위의 장면을 보고 따라 해보려고 연습하다가 옷을 버린 분도 많다더군요. 위와 같은 장면을 연출하려면 액체의 점도가 상당히 진해야 합니다. 물이나 차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기름 정도는 돼야 가능할 것 같은데 일반적인 와인 중에는 그런 것이 매우 드뭅니다. 디저트로 마시는 스위트 와인 정도 되어야 점도가 진해서 가능할 겁니다.

<참고 자료>

1. 영문 위키피디아 디캔터 항목

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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