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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뱅 드 가르드(Vin de Garde)

까브드맹 2019. 1. 29. 08:00

정기 숙성 중인 와인들
(이미지 출처 :   https://levinpourtous.com/wp-content/uploads/2015/11/vin-de-garde.jpg)

1. 와인은 오래 보관할수록 맛이 좋아진다?

"와인은 오래 보관할수록 맛이 좋아진다."라고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이 말은 일부 와인에만 해당하죠. 병에 담은 지 2~3년 안에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 오래 보관할수록 맛있어지는 와인보다 훨씬 많습니다. 오래 숙성할수록 맛이 좋아지는 와인은 전체 와인 중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이런 와인을 "뱅 드 가르드"라고 하죠. 뱅 드 가르드는 숙성과 함께 품질이 좋아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와인을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길고 긴 와인 역사에서 뱅 드 가르드가 나타난 것은 별로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 발효주인 와인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미생물과 열에 무척 약합니다. 그래서 별도의 처리를 안 하면 더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상하거나 식초로 변할 수 있죠. 보관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와인은 대부분 여름이 깊어가기 전에 마셔야 하는 술이었습니다. 지하 깊숙이 와인 저장고가 있는 귀족들은 땅속의 서늘한 온도 덕분에 와인을 조금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겠지만, 기껏해야 1~2년 정도였죠.

맛이 변하기 시작한 와인은 물에 타서 음료수처럼 마시기도 했습니다. 베네치아의 조선소에선 와인을 탄 물을 일꾼들의 음료수로 제공했는데, 물에 탄 와인의 양이 너무 적어지자 일꾼들이 파업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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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학의 발달과 와인 보관법의 변화

과학이 발달하면서 18세기경 와인 보관법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먼저 양조 기술에 바뀌었습니다. 탄닌이 와인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확실히 알게 되면서, 발효 중인 와인에 포도 껍질과 씨를 더 오랫동안 담가뒀습니다. 이로 인해 와인의 탄닌 함량이 전보다 늘어났고, 와인 보관 기간도 더 길어졌죠. 또한, 오크통 속에서 오래 숙성해서 오크의 탄닌도 와인에 많이 스며들도록 했습니다. 이런 방법은 와인이 예전만큼 쉽게 변하지 않도록 해줬죠. 

와인을 보관하는 용기와 마개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와인을 오크통에 담은 다음 기름을 적신 천을 두른 나무 조각으로 입구를 막아서 보관했습니다. 이러면 오크의 미세한 구멍으로 공기가 스며들어서 와인을 오래 보관하기 어려웠죠. 하지만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면서 와인을 밀폐된 용기 안에서 공기와 거의 접촉하지 않는 상태로 보관할 수 있게 되었죠.

또한, 세균과 음식물의 변질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밝혀졌고, 황을 태울 때 나오는 이산화황으로 세균 번식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와인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와인 구조는 더욱 탄탄해졌고, 이산화황으로 미생물을 살균하고 번식을 막아 와인이 변하는 것을 늦출 수 있었으며,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로 외부와 차단한 체 보관할 수 있게 되었죠. 이런 과정에서 와인 생산자들은 어떤 와인은 오래 보관할수록 맛과 향이 좋아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와인 생산자들은 곧 장기 숙성을 거쳐서 맛과 향이 완성되는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뱅 드 가르드의 탄생이죠.

 

 

3. 뱅 드 가르드의 고장, 보르도

이렇게 탄생한 뱅 드 가르드 와인이 가장 발달한 지역 중 하나가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입니다. 보르도 와인 생산자들은 예로부터 와인 양조 기술이 뛰어났고, 탄닌이 풍부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란 포도를 재배했으므로 다른 어떤 곳보다 뱅 드 가르드를 만들기에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보르도의 뱅 드 가르드 와인은 프랑스의 다른 지역 와인보다 장기숙성에 뛰어나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완성되는 맛과 향도 훌륭합니다. 

보르도 레드 와인은 시장에 나왔을 때 사서 바로 마셔도 좋지만, 진정한 맛과 향을 즐기려면 상당한 기간 병에서 숙성되길 기다려야 합니다. 와인 품질과 가격, 보관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5년 정도 지난 후에 마시는 게 좋고, 보통 10년 정도 지난 다음 마시면 아주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죠. 특히 그랑 크뤼 와인은 최소 10년, 보통 20년 정도 병에서 숙성하면 아주 매력적인 향과 맛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주택에는 와인을 보관하기 좋은 장소가 없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병에서 숙성하기 어려운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와인 샵에서 오래된 빈티지 와인을 구매하기에는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보관 상태도 확실치 않은 어려움이 있죠. 그래서 국내에선 보르도 와인의 참맛을 느끼기엔 여러모로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집에 와인 셀러가 있으면 괜찮은 보르도 와인을 사서 잘 보관했다가 10년 정도 지난 후에 마셔보기 바랍니다. 그동안 영(young)한 빈티지의 보르도 와인만 마셔봤다면, 보르도 와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게 될 겁니다.

프랑스에서 뱅 드 가르드 와인을 만드는 곳은 여러 군데입니다. 보르도뿐만 아니라 남부의 론 밸리(Rhone Valley)와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도 뱅 드 가르드를 많이 만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