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선 시라(Syrah), 호주를 비롯한 신세계에선 보통 쉬라즈(Shiraz)라고 부르는 이 포도의 특성은 ‘강렬한 향신료 향과 탄닌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라/쉬라즈로 만든 와인은 감칠맛이 뛰어나고 달콤한 과일 향을 풍기며 때로는 매콤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맛을 한꺼번에 담아내기도 하죠. 가장 강렬한 맛을 풍기는 시라/쉬라즈 와인은 색이 짙고 탄닌이 많으며 여러 가지 향을 풍깁니다. 숙성을 거치면서 달콤한 블랙커런트와 라즈베리 향이 발달하고 벨벳처럼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까지 갖추게 됩니다.
1. 시라/쉬라즈의 특성
진보랏빛 색채의 포도알은 껍질이 까베르네 소비뇽만큼 두껍지 않지만, 풀 바디 와인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탄닌이 들어있습니다. 산미가 풍부하고 당분이 많아 알코올 도수도 높게 나오죠. 그래서 시라 와인은 5~10년 정도면 충분히 숙성되지만, 그 이상 오랫동안 보관하면서 숙성될 수 있습니다. 와인 색은 초기엔 자주색이고 숙성되면서 점차 루비와 석류석 색으로 변합니다.
시라는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랍니다. 토양이 비옥하면 수확량이 많아져서 포도 품질이 떨어지게 되지만, 화산 지형의 침식토 같은 척박한 토양에서 자란 포도는 품질이 굉장히 좋아져서 보르도 그랑 크뤼 못지않은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되죠. 고품질의 시라로 만든 와인은 깊은 암적색에 진보랏빛 톤이 감도는 아름다운 색이 나오고, 매콤한 후추와 상큼한 블랙베리 향이 어우러지는 아로마를 풍기며, 점차 삼나무 향이 감돌면서 송로버섯 향으로 발전하는 부케(bouquet, 2차 향)가 발달합니다. 빼어난 산도와 탄닌이 만날 때 이루어지는 풍족한 맛은 최적의 토양과 기후에서 자란 시라가 뿜어내는 저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춥고 습한 기후를 만나면 시라의 품질은 떨어집니다. 그래서 론 밸리 북쪽이나 스위스, 뉴질랜드 등지에선 시라가 잘 자라기 어렵죠. 시라로 유명한 북부 론에서조차 기후가 나쁜 해에는 풋내 나는 빈약한 바디와 지나치게 강한 향신료 풍미 때문에 불균형한 맛이 나는 형편없는 와인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2. 시라/쉬라즈의 역사
예전에는 중동을 시라의 원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부터 재배된 포도로 옛 페르시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 시라즈(Chiraz), 또는 쉬라즈(Shiraz) 라는 도시가 있었고, 이 명칭이 호주에서 부르는 쉬라즈와 이름과 일치한다는 겁니다.
쉬라즈는 페르시아 문화의 심장이며 문학의 도시로 이슬람의 출현 이전부터 존재해 온 유서 깊은 곳입니다. 아케메네스조 시대(BC 6세기)와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3세기)에 지역의 중심이었고, 아랍인의 정복 후엔 이슬람 중세 시대와 몽고, 티무르 제국의 지배 시절에도 번영을 누렸던 도시이죠. 13~14세기에는 이슬람 문학을 대표하는 두 명의 위대한 시인인 사디와 하페즈를 배출했으며 덕분에 예술의 향기가 짙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호주에선 자기들이 부르는 "쉬라즈"라는 이름이 프랑스의 "시라"보다 더 정확한 원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DNA 조사 결과 시라의 원산지는 프랑스 론 밸리(Rhone Valley)로 밝혀졌습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재배해 온 포도로 프랑스 아르데슈(Ardeche)의 토착 포도인 두레자(Dureza)와 사브와(Savoy)의 토착 포도인 몽두즈 블랑슈(Mondeuse blanche)의 교배종이란 것이 밝혀졌죠. 두 지역 모두 론 밸리와 가깝습니다.
3. 시라/쉬라즈의 재배지
1) 프랑스
론 밸리는 명실공히 시라 재배에 최적인 떼루아(Terroir)를 갖췄습니다. 북부 론에서 공식적으로 재배할 수 있는 유일한 흑포도로 이곳의 시라 와인은 매우 강건해서 50년 이상 숙성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남부 론에선 주역을 그르나슈(Grenache)에 넘겨주지만, 블렌딩에 거의 빠짐없이 들어갑니다. 남부 프랑스에서도 시라는 점점 능력을 인정받아 재배지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남부 프랑스에서 와인 품질을 높이려 할 때 어김없이 원병으로 등장하는 것이 시라입니다.
2) 호주
론 밸리와 함께 시라의 양대 재배지로 1832년에 처음 호주에서 재배된 이래로 호주를 대표하는 품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와인 스타일은 프랑스와 사뭇 다릅니다. 프랑스의 시라 와인보다 탄닌이 더 풍부하고 부드러우며, 매콤한 느낌보다 유칼립투스의 달고 시원한 풍미가 더 강하죠. 뛰어난 쉬라즈 와인 생산지로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와 헌터 밸리(Hunter Valley)가 있습니다.
3) 칠레
칠레에서도 고품질의 시라 와인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와인으로는 몬테스 폴리(Montes Folly)가 있죠. 중저가 와인 중에선 몬테스 알파 시라를 통해 칠레 시라 와인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4) 미국외 기타 국가
캘리포니아에서도 시라만 사용한 우수한 와인을 생산하지만, 아직까진 다른 품종을 혼합한 시라 와인이 주로 나옵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인기 높은 쁘띠 시라(Petit Syrah)는 시라와 관련 없는 품종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시라 와인은 저가 와인 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이렇다 할 와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말벡 와인이 주류여서 당분간 뛰어난 아르헨티나산 시라 와인은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시라를 재배하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스위스에서도 적은 양이지만 시라를 재배합니다. 품질은 아직 평범한 편입니다.
4. 시라/쉬라즈 와인의 향
시라 와인을 대표하는 향은 검은 후추 향입니다. 오뚜기 후추에서 나오는 향이 아니라 통후추를 갈았을 때 맡을 수 있는 풋풋하고 매운 향이죠. 또 하나의 특징적인 향은 호주 쉬라즈 와인에서 맡을 수 있는 유칼립투스 향입니다. 달고 시원한 향으로 바닐라와 박하를 섞은 듯한 느낌이죠. 그 밖에 블랙베리와 산딸기 같은 과일, 제비꽃, 연기, 토스트, 숯, 가죽, 타르, 고기 등이 시라 와인의 대표적인 향입니다.
프랑스의 시라 와인에선 후추와 블랙베리, 연기, 타르, 가죽, 제비꽃, 허브 향 등이 주로 나오고, 호주산 쉬라즈 와인은 재배지가 광범위하다 보니 지역마다 향이 조금씩 다릅니다. 빅토리아 지역의 와인은 향신료 향이 강하고, 바로사 밸리의 와인은 가죽 냄새와 초콜릿 향이 특징입니다. 그 밖에 블랙베리와 유칼립투스, 연기, 타임(thyme) 등의 향을 주로 풍깁니다.
5. 시라/쉬라즈와 어울리는 음식
까베르네 소비뇽처럼 모든 종류의 붉은 육류 요리와 잘 맞지만, 향이 강하거나 매콤한 요리에 잘 맞습니다. 후추가 들어간 스테이크와 소시지, 오리와 거위처럼 향이 강한 가금류, 바비큐와 곱창처럼 풍미가 강한 요리와 잘 어울리죠. 훈제 오리처럼 향이 강한 음식과 함께 마시면 아주 좋습니다.
인도와 멕시칸 요리같이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도 잘 맞습니다. 또한 한식의 경우 불닭처럼 아주 매운 음식을 제외한 대부분의 요리와 잘 맞죠. 호주산 쉬라즈 와인은 좀 더 부드럽고 자극이 덜한 요리와 먹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