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포도 품종

[스페인] 그르나슈/가르나차 - 재능은 뛰어나지만 혼자선 힘들어요. (재업)

까브드맹 2023. 12. 7. 21:58

그르나슈 포도의 근접 촬영 사진

프랑스에선 그르나슈(Grenache), 스페인에선 가르나차(Garnacha)라고 부르는 포도로 프랑스의 남부 론(Southern Rhone)과 남부 프랑스(Sud de France), 스페인의 아라곤(Aragon)과 리오하(Rioja)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널리 재배합니다. 호주와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신세계 와인 생산국에서도 많이 재배하죠.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나 메를로(Merlot), 시라/쉬라즈(Syrah/Shiraz), 피노 누아(Pinot Noir) 같이 단일 품종 와인으로 만드는 일이 거의 없고, 주로 다른 포도와 섞어서 블렌딩 와인으로 만들다 보니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다른 국제 품종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포도입니다.

1. 그르나슈/가르나차의 특성

그르나슈/가르나차는 포도 껍질 색에 따라 누아(Noir=Black)와 그리(Gris=Gray), 블랑(Blanc=White)으로 나뉘며, 레드, 로제, 화이트 와인 양조에 모두 사용됩니다. 잎에 털이 많아서 "털이 많은"이란 뜻을 가진 헤어리 그르나슈/가르나차(Hair Grenache, Garnacha Peluda)라는 품종도 있죠.

선천적으로 떼루아를 즉각 반영하는 그르나슈/가르나차는 아주 다양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품종입니다. 그러나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을 제대로 만들려면 큰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죠. 와인 스타일은 아주 가벼운 것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진하고 깊은 것까지 다양하며, 모든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으로 우수한 균형성과 풍부한 표현력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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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나슈/가르나차는 당분이 많아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풀 바디 와인을 만들기 좋지만, 껍질이 얇아서 탄닌과 색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르나슈/가르나차를 주로 사용한 와인은 색이 진하지 못하고 산미와 탄닌도 부족해서 오래 보관하기 어렵죠.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무르베드르(Mourvèdre)와 시라, 까리냥(Carignan), 쌩쏘(Cinsault) 같은 포도를 혼합해서 부족한 탄닌과 색소를 보태줍니다. 무르베드르는 그르나슈/가르나차로 만든 와인의 구조와 우아한 느낌을 살려주고, 시라는 색과 향신료 등의 풍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하죠.

그러나 올드 바인 그르나슈/가르나차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오래된 포도나무일수록 열리는 포도송이 숫자는 줄어들지만, 오랜 세월 땅속 깊숙이 뻗어 내린 뿌리가 흡수하는 각종 양분이 얼마 안 되는 포도송이로 몰려서 아주 농축된 맛과 향을 가진 포도가 열리죠. 이런 포도로 만든 와인 역시 응축된 맛과 풍부한 향, 부드럽고 진한 탄닌, 강건한 구조를 갖게 되어 다른 포도를 섞을 필요가 없습니다.

2. 그르나슈/가르나차의 역사

아라곤 왕국의 위치

분류학적 증거로 볼 때 그르나슈/가르나차의 원산지는 스페인 북부의 까탈루냐(Cataluña)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은 그르나슈/가르나차가 자라기 좋은 곳이었고, 이곳에서 발굴된 그르나슈/가르나차의 씨와 잎 화석을 탄소 측정 연대로 계산한 결과 기원전 153년부터 서식해 온 것이 밝혀졌죠. 그르나슈/가르나차의 역사적인 첫 기록은 1513년이지만,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이 기록에 남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뛰어난 품질의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은 그 자체로 길고 긴 유럽 역사에 대한 최고의 증거입니다.

14, 15세기에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아라곤(Aragon) 왕국이 팽창하면서 그르나슈/가르나차는 이베리아반도 북부와 사르데냐 섬, 프랑스 남부의 루씨용(Roussillon), 그리스의 일부 지방에 전파된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프랑스가 루씨용을 점령하면서 그르나슈/가르나차는 랑그독과 남부 론까지 퍼져나갔죠. 그르나슈/가르나차의 또 다른 이름인 틴토 아라고네스(Tinto Aragones (Red of Aragon))를 보면 그르나슈/가르나차가 어디에서 전래한 것인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르나슈/가르나차는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 너머로 진출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호주까지 전파되었죠. 호주에선 쉬라즈 포도가 시장을 장악하기 전까진 그르나슈/가르나차 포도가 와인 산업의 중심이었습니다. 1990년대까지 그르나슈 누아/네그로 가르나차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재배하는 레드 와인용 포도였습니다.

와인 생산자와 애호가들이 와인의 소중한 뿌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그르나슈/가르나차 품종은 재발견되었습니다. 고향인 스페인의 다양한 원산지 보호 시스템(Protected Designations of Origins, PDO)에 칼라타유드(Calatayud), 캄포 데 보르하(Campo de Borja), 카리녜나(Cariñena), 소몬타노(Somontano), 테라 알타(Terra Alta)의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들이 등록되었고, 프랑스 루시용 지방의 와인은 지리적 표시 보호(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s, PGI) 시스템에 등록되었죠.

 

 

3. 그르나슈/가르나차 포도 재배지

그르나슈/가르나차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이 재배하며, 흑포도로는 다섯 번째입니다. 유럽에선 세 번째로 많이 재배하는 고급 와인용 포도죠. 감미로운 향이 나며 굉장히 다채로운 특성을 가진 그르나슈/가르나차는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와 환경이 자라기에 가장 좋습니다. 이곳에서 자란 포도가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인 맛을 느낄 수 있죠.

전 세계의 그르나슈 재배지 지도

1) 프랑스

남부 론에서 그르나슈/가르나차를 아주 많이 재배합니다. 그르나슈/가르나차를 뺀 레드 와인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죠. 남부 론 최고의 와인 생산지인 샤토네프 뒤 빠프(Châteauneuf du Pape) AOC에선 그르나슈/가르나차의 재배 면적이 전체 포도밭의 72%를 차지하며, 레드 와인은 그르나슈/가르나차를 주로 사용해서 만듭니다. 따벨(Tavel)과 리락(Lirac)에선 그르나슈/가르나차로 프랑스 최고의 로제 와인을 생산하죠.

랑그독 루씨용의 바뉼(Banyuls)과 모리(Maury) 지역에서 생산하는 천연 감미 와인인 뱅 두 나뛰렐(Vins Doux Naturels)은 그르나슈/가르나차가 주요 품종입니다.

2) 스페인

일부 고급 와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대중적인 와인 생산에 사용됩니다. 리오하에선 뗌프라니요나 다른 포도와 혼합할 때 사용하죠. 그르나슈/가르나차는 껍질이 얇고 색소가 적어서 로제 와인 양조에 많이 사용하는데, 스페인에서 그르나슈/가르나차 로제 와인의 대표적인 생산지는 나바라(Navarra)입니다.

 

 

3) 호주

호주에서도 그르나슈/가르나차를 많이 재배합니다. 그르나슈/가르나차와 쉬라즈를 혼합해서 과일 향이 풍부하고 탄닌이 부드러운 풀 바디 레드 와인을 생산하죠. 호주에선 그르나슈/가르나차에 쉬라즈와 마타로(Mataro)라고 부르는 무르베드르를 섞은 이른바 GSMs 와인을 많이 만듭니다.

4.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의 향

그르나슈 와인의 대표 향 중 하나인 산딸기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에선 딸기와 산딸기 같은 붉은 과일과 흰 후추, 감초, 정향 같은 향신료, 허브 향 등을 풍깁니다. 고급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과 올드 바인으로 만든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에선 블랙커런트와 블랙 체리, 서양 자두, 블랙 올리브, 커피, 진저브레드, 꿀, 가죽, 검은 후추, 타르, 견과류 등의 강렬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느낄 수 있죠.

5. 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그르나슈/가르나차와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굽거나 찌고 끓인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소고기와 양고기스튜, 헝가리의 굴라시(goulash) 같은 요리가 여기에 해당하죠. 쇠고기와 양고기 외에 프라이드치킨 같은 닭튀김 요리, 그릴에 구운 칠면조, 달콤한 과일소스를 얹은 오리 같은 가금류 요리가 잘 어울리고 향신료를 뿌린 피자와 바비큐도 좋습니다. 렌즈콩이나 다른 콩으로 만든 서양식 콩 요리와 먹어도 좋고 파프리카 같은 채소도 좋습니다. 생선요리 중에선 그릴에 구운 연어가 맞죠. 다만 샐러드나 날생선 요리에는 맞지 않습니다.그르나슈/가르나차 와인의 스타일과 생산지에 따라 어울리는 음식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스파클링 와인

그르나슈/가르나차 스파클링 와인은 신선하고 발랄하며 과실 향과 꽃 향이 풍부합니다. 카리녜나, 까바, 캄포 데 보르하에서 생산하며 신선한 과일과 어패류, 해산물, 구운 오리, 구운 닭, 튀김과 춘권 등과 어울립니다.

 

 

2) 라이트 바디 화이트 와인

향이 조화로우며 풍만하고 감칠맛이 납니다. 감귤류 과일과 꿀, 꽃과 멜론 향을 주로 풍기죠. 칼라타유드와 캄포 데 보르하, 카리녜나, 소몬타노, 테라 알타, 루시용에서 많이 나옵니다. 돼지고기 바비큐와 팟타이, 두부, 새우, 삶거나 구운 닭, 전복, 구운 연어, 오징어, 버섯, 냉면 등과 맞습니다.

3) 풀 바디 화이트 와인

가볍고 상쾌하며 미네랄 풍미가 가득합니다. 사과와 복숭아, 레몬, 모과 향이 나오고 소금 같은 짭짤한 맛도 있습니다. 칼라타유드와 캄포 데 보르하, 카리녜나, 소몬타노, 테라 알타, 루시용에서 많이 생산합니다. 초밥과 생선회, 김밥, 어묵, 튀김, 춘권, 가리비, 광둥식 밥과 어울리며 망고, 리치, 수박, 드래곤 푸르트 등 다양한 과일과 함께 마셔도 좋습니다.

4) 로제 와인

딸기와 수박 같은 과일 향을 풍기며 신선합니다. 대황(大黃, 루바브)과 장미 향도 나옵니다. 칼라타유드와 캄포 데 보르하, 카리녜나, 소몬타노, 테라 알타, 루시용 등지에서 생산합니다. 닭고기와 두부, 비빔밥, 튀김, 볶은 채소, 참치와 연어 같은 생선구이, 오징어, 만두 등과 잘 어울립니다.

 

 

5) 라이트 바디 레드 와인

싱싱하고 밝은 느낌이며 딸기, 라즈베리, 체리 같은 붉은 과일과 후추 같은 향신료 향을 풍깁니다. 칼라타유드와 캄포 데 보르하, 카리녜나, 소몬타노, 테라 알타, 루시용에서 많이 생산하고, 구운 북경 오리와 모둠 고기 구이, 닭튀김, 소고기 데리야키, 락사 향 누들 수프, 고기와 채소 카레, 불고기, 김치전, 닭고기꼬치 등과 맞습니다.

6) 풀 바디 레드 와인

무겁고 진하며, 강하고 집중적입니다. 블랙베리와 블랙커런트 같은 과일 향과 올스파이스, 아니스, 담배 향 등이 나옵니다. 칼라타유드와 캄포 데 보르하, 카리녜나, 소몬타노, 테라 알타, 루시용 등지에서 생산합니다. 고베 비프와 한국 불고기, 달콤새큼한 돼지 튀김, 매운 사천식 고기 요리, 로스트비프 등과 잘 어울립니다.

7) 감미로운 스위트 와인

말린 과일 향이 나오며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과일잼과 가죽, 커피와 코코아 향도 풍깁니다. 루시용의 모리, 리브 잘트, 바뉼 마을에서 생산하며 간장에 절인 닭고기와 돼지고기, 해파리 요리, 매운 동양 음식, 생강 소스가 들어간 음식과 어울립니다. 파인애플과 망고, 복숭아, 수박, 드래곤 푸르트 같은 각종 과일, 떡 종류와 망고 푸딩에도 잘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