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포도 품종

[프랑스] 메를로 - 과일 향 넘치는 화려한 조연에서 주연으로 (재업)

까브드맹 2023. 11. 22. 20:35

메를로 포도와 잎의 모습

멀롯, 또는 멜로라고도 발음하는 메를로(Merlot)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함께 보르도 블렌딩 레드 와인의 중심이 되는 품종입니다. 까베르네 소비뇽이 카리스마 있는 레드 와인의 황제 품종이라면, 메를로는 와인으로 만들면 부드럽고 온화하여 마시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품종이라고 할 수 있죠.

1. 메를로의 특성

원래 보르도에서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의 보조 역할을 하는 품종이었습니다.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에 섞어서 지나치게 강한 까베르네 소비뇽의 성질을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했죠. 그러나 지금은 메를로만 사용한 와인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보다 포도알이 통통하고 물기가 많으며 좀 더 동그랗습니다. 껍질이 얇고 당분은 다른 품종보다 많은 편이죠. 탄닌이 주로 씨앗과 껍질에 분포하기에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보다 탄닌 함유량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메를로 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과 비교해서 맛이 더 풍성하고 부드러우며 질감도 포도 과즙에 더 가까운 느낌입니다.

풍부한 과일 향과 섬세하고 부드러운 탄닌을 가진 메를로 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보다 절정기에 훨씬 일찍 도달합니다. 그래서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처럼 10년 이상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4~5년 후면 충분히 절정의 맛을 느끼며 마실 수 있죠. 다만, 포도알에 당분이 많아서 알코올 도수가 다른 와인보다 보통 1~2% 정도 많은 편입니다. 메를로 와인의 숙성과 보관 기간은 보통 5~10년 정도지만, 고급 와인은 그 이상 오래 숙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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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 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숙성 속도를 빠르게 하고 거친 맛을 부드럽게 만들 때도 쓰입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AOC 등급 와인은 풍부한 향과 탄탄한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까베르네 소비뇽을 넣고, 바로 마실 수 있는 유연성을 주려고 메를로를 사용하죠.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의 단단하지만 약간 마른 골격에 '풍부한' 살집을 붙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처럼 오크통 숙성도 잘 받습니다. 이런 특성 덕분에 까베르네 소비뇽과 혼합하기에 알맞은 특성을 갖춘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의 완벽한 파트너로서 보르도 레드 와인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메를로는 만생종인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먼저 싹이 트고 개화하는 조생종 품종이라 이른 봄에 서리 피해를 더 많이 입을 수 있습니다. 또한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 보다 모든 면에서 덜 농축되고 덜 집약되어서 성공적인 와인을 만들려면 포도가 아주 잘 익어서 당분과 산미, 기타 여러 성분이 충분히 농축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수분이 많고 풋익어서 가볍고 묽은 와인이 되는 일이 많습니다. 저가 메를로 와인은 메를로 본연의 맛을 충분히 살려주지 못하는 것이 많아서 메를로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만들어 내기도 하죠.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주인공이 외치는 'Fu**ing Merlot'라는 대사는 메를로 와인에 대한 편견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기후가 더운 곳에선 포도에 산(사과산)이 부족해지기 쉽습니다.

모양이 비슷한 포도로 카르미네르(Carménère)가 있습니다. 칠레에선 한때 카르미네르를 메를로로 알고 재배한 적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2. 메를로의 역사

메를로의 원산지는 프랑스 보르도입니다. 역사에 등장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죠. 메를로에 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보르도 지역 관료의 노트에 담겨 있으며, 보르도 우안의 리부른(Libournais) 지역에서 메를로로 만든 1784 빈티지 와인을 지역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꼽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1824년에는 메를로라는 단어가 메독 와인에 대한 법률 조항에 나타납니다.

티티새의 일종인 메를르(Merle)

페띠 라피트(Petie-Laffite)는 1868년에 저술한 <라 빈느 엉 보들레(La Vigne en Bordelais)> 라는 저서에서 메를로라는 이름은 흑청색의 작은 티티새인 메를르(Merle)의 보르도 사투리인 메를로(Merlau)에서 유래했다고 적었습니다. 메를로가 가장 빨리 익는 포도 중 하나고 다른 포도들이 아직 익지 않았을 때 티티새가 잘 여문 메를로를 마음껏 먹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겠죠. 티티새의 깃털색이 메를로 포도와 영락없이 똑같은 것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 줬을 겁니다.

3. 메를로 재배지

1) 프랑스

프랑스 보르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포도가 메를로입니다. 보르도 메독 지역의 동쪽, 그러니까 보르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대서양으로 흐르는 지롱드(Gironde)강 우안에 아주 유명한 와인 생산지인 쌩-테밀리옹(St-Emilion)과 뽀므롤(Pomerol)이 있습니다.

이 두 곳은 메독보다 상대적으로 면적이 작지만, 메독과 함께 세계 최고의 와인을 생산한다고 평가받는 곳이죠. 이곳의 와인은 주로 메를로로 만들어서 맛이 아주 부드러우며 화사한 꽃과 과일 향을 풍깁니다. 특히 뽀므롤에서는 메를로 품종을 90% 이상 사용해서 와인을 만들며, 메를로는 이 지역의 떼루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와인을 최상의 숙성 상태에 도달하게 합니다. 뽀므롤 와인은 짙은 색상과 높은 알코올 도수, 풍부한 향, 산뜻한 맛, 입안 가득 비단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남깁니다. 이 지역 최고의 와인이며 보르도 최고의 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샤토 페트루스(Château Petrus)도 메를로 품종을 95~100%가량 사용해서 만듭니다. 쌩-테밀리옹에선 메를로를 모던 스타일로 양조한 가라쥬 와인(Garage Wine)이 인기를 끌고 있죠.

샤토 페트루스(Ch&acirc;teau Petrus)

2)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토(Veneto) 주에선 메를로로 가볍고 마시기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프리울리(Friuli)와 알토 아디제(Alto Adige), 토스카나(Toscana)에선 풍미가 진한 와인을 생산합니다. 토스카나에선 메를로로 만든 마세토(Masseto) 같은 뛰어난 슈퍼 투스칸 와인도 나오죠. 그 밖에 메를로로 만드는 최고급 와인으로 메소리오(Messorio)와 레디가피(Redigaffi) 등이 있습니다.

3) 칠레

신세계에서는 칠레의 메를로 와인이 유명합니다. 맛이 한창일 땐 대단히 상큼하고 과일 향이 진해서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진홍빛 레드 와인을 생산합니다.

4) 미국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에선 많은 와이너리가 높은 관심 속에 메를로를 재배합니다. 탄닌과 산도가 적어서 부드럽고 과일 향이 풍부한 맛을 가진 메를로 와인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5) 기타 국가

호주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메를로의 진가를 깨닫고 다양한 와인이 나오기 시작했고, 뉴질랜드에선 이미 메를로 와인이 최고의 레드 와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국내에 들어온 뉴질랜드 와인 중에선 이렇다 할 만한 메를로 와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뉴질랜드 와인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을 비롯한 화이트 와인과 피노 누아 와인이 주로 들어오고 있죠.

스페인과 포르투갈, 동유럽, 아르헨티나 등지에서도 메를로를 많이 재배하며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합니다.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도 메를로가 빠르게 퍼지고 있죠. 이제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뒷받침해 주는 조역에서 와인의 주연급 품종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4. 메를로의 향

메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과 향이 비슷하지만 블랙 커런트 향이 덜하고, 향의 다양성도 떨어지는 편입니다. 메를로 와인에서 많이 풍기는 향은 서양 자두(Plum)와 블랙베리(Blackberry), 블랙 체리(Black Cherry) 같은 검은 과일 향입니다. 고급 와인이거나 더운 지역의 와인이면 블랙커런트(Blackcurrant)와 건자두(Prune) 향이 나오고, 서늘한 곳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면 딸기와 레드 체리, 허브 같은 식물성 향이 강해집니다.

오크통에서 숙성하면 향신료와 커피, 다크 초콜릿(Dark Chocolate) 같은 향도 생깁니다. 숙성이 진행되면 맛과 향이 보다 부드러워지고, 종종 과일 풍미가 약해지면서 허브(Herb) 풍미가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5. 메를로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메를로 와인은 맵게 조리하지 않은 다양한 음식과 맞습니다. 닭고기와 칠면조 같은 가금류, 돼지고기, 소고기, 경성 치즈 등등 여러 종류의 음식과 함께 먹을 수 있죠. 특히 벌꿀 햄구이처럼 단맛이 살짝 나는 향긋한 음식은 메를로 와인의 부드러운 과일 향과 잘 어울리죠. 우리나라 불고기와 양념 갈비처럼 달게 양념한 요리에도 잘 맞습니다. 버터나 크림소스를 얹은 요리와 먹어도 좋습니다.

메를로 와인은 가격과 양조 방식에 따라 스타일이 다양하며, 스타일 별로 어울리는 음식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탄닌이 강한 메를로 와인

그릴에 구운 고기 요리

2) 부드럽고 신선하며 산도가 높은 메를로 와인

피노 누아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이 비슷하며 연어와 버섯 요리도 잘 맞습니다.

3) 라이트 바디의 메를로 와인

새우와 조개 같은 해산물 요리, 베이컨, 프로슈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