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포도 품종

[프랑스] 소비뇽 블랑 - 청초하고 싱그러운 아가씨 (재업)

까브드맹 2023. 11. 28. 22:02

소비뇽 블랑 포도

햇살이 제법 따갑게 내리쬐는 초여름이면 생각나는 와인을 만들며, 풀꽃처럼 청초한 느낌을 주는 싱그러운 소녀같이 매력적이고 톡 쏘는 맛과 향이 담긴 포도. 그것이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입니다.

1. 소비뇽 블랑의 특성

1) 신선하고 상쾌한 와인

소비뇽 블랑 와인에 대해 말하길 "현대적인 와인"이라고 합니다. 또는 "유행, 모드를 아는 와인" 이라고도 하죠. 아마 현대적인 양조 기술과 잘 맞고, 한편으로 현대인의 입맛에 어필하는 향과 맛을 가졌기 때문일 겁니다. 쎄미용(Sémillon)과 샤르도네(Chardonnay) 같은 포도가 전통 양조법과 오크통 숙성을 통해 묵직한 느낌의 와인으로 만들어지는 데 비해 소비뇽 블랑은 청량하고 경쾌한 맛이 나는 가벼운 와인으로 많이 생산됩니다.

소비뇽 블랑은 포도를 따는 시기부터 다릅니다. 신선하고 상쾌한 맛을 위해 다른 품종보다 일찍 수확하고, 신선도와 향기를 보존하려고 오크통보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 넣어 저온 발효해서 만들죠. 보르도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소비뇽 블랑 와인은 오크통에서 숙성하지 않습니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저온 발효로 생산된 소비뇽 블랑 와인은 현대인의 취향에 딱 맞는 스타일이 됩니다. 상큼하고 심플한 맛이 나는 드라이 화이트 와인으로 한 번 마셔보면 많은 사람이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와인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복잡하지 않고 편하다는 얘기죠.

소비뇽 블랑 와인의 풋풋하고 톡 쏘는 풀 냄새와 시트러스 풍미가 특징입니다. 달지 않고 크리스피(Crispy)라고 표현되는 상쾌한 맛을 느낄 수 있죠. 향도 강해서 많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야외에서 소풍을 즐기며 마실 때도 적격입니다. 소비뇽 블랑 와인의 신선하고 청량한 맛은 알코올 느낌을 가려주기에 미국에선 다이어트용 와인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확실히 퓌메 블랑(Fumé Blanc)을 제외한 미국산 소비뇽 블랑 와인은 다른 지역의 와인과 비교해 보면 좀 더 가벼워서 마치 물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선한 해물이나 닭고기 샐러드와 함께 마시면 갑자기 입에서 자신의 향과 맛을 뿜어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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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짧은 숙성 기간

소비뇽 블랑 와인의 단점이자 장점이라면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마실 수 있지만 오래 숙성할 수도 없습니다. 소비뇽 블랑 와인은 대개 빈티지로부터 3~4년째부터 와인의 힘과 풍미가 약해집니다. 속된 말로 '맛이 가는' 거죠. 물론 프랑스 루아르 밸리의 일부 와인처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이런 와인들은 대개 가격이 비쌉니다. 장기 숙성 능력이 고급 와인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본다면, 이 점에서 소비뇽 블랑은 일종의 핸디캡을 안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비뇽 블랑 와인을 두고 "클래식 품종이 아니다.", "품격 있는 품종이 아니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와인의 품격이란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고유의 맛과 향이 있냐 없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2. 소비뇽 블랑의 역사

소비뇽 블랑의 원산지는 루아르 밸리(Loire Valley, Val de Loire)와 보르도(Bordeaux)를 포함한 프랑스 서부 일대로 추정되지만 명확하진 않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바냉(Savagnin) 포도의 후손이 아닌가 하며, 카르미네르(Carménère) 포도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8세기의 어느 때에 소비뇽 블랑은 보르도에서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과 결합하여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탄생시켰습니다. 19세기의 보르도 포도밭에선 소비뇽 블랑과 소비뇽 베르(Sauvignon vert), 소비뇽 블랑의 돌연변이 품종인 소비뇽 그리(Sauvignon gris)가 함께 자랐습니다. 뿌리에서 번식하는 병충해인 필록세라(phylloxera)가 보르도 포도밭을 덮치기 전에 세 포도는 칠레로 수출되었고, 지금도 칠레에선 세 품종을 함께 재배합니다. 때로는 소비뇽 베르를 소비뇽 블랑으로 착각하면서 말이죠.

루아르 밸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비뇽 로제(Sauvignon rose)는 이름이 비슷하긴 해도 소비뇽 블랑과 관련 없는 품종입니다.

미국에선 크레스타 비앙카 와이너리(Cresta Blanca Winery)의 설립자인 찰스 웻모어(Charles Wetmore)가 처음 소비뇽 블랑을 재배했습니다. 그는 1880년대에 소테른의 샤토 디캠(Château d'Yquem) 포도원의 소비뇽 블랑 삽목을 얻어서 캘리포니아로 가져갔죠. 그가 가져간 소비뇽 블랑은 리버모어 밸리(Livermore Valley)에서 번성했고, 미국산 소비뇽 블랑 와인은 마침내 1968년에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의 판촉 활동을 통해 "퓌메 블랑"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3. 소비뇽 블랑 재배지

최근 판매량의 증가하면서 소비뇽 블랑의 재배지는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비뇽 블랑 재배지는 프랑스 남쪽의 보르도와 북서쪽의 루아르 밸리, 뉴질랜드를 들 수 있습니다.

1) 프랑스

지난 수 세기 동안 소비뇽 블랑을 재배해 온 역사가 말해주듯 다양한 지역에서 재배합니다. 그래도 소비뇽 블랑을 100% 사용하는 곳은 루아르 지역의 상세르(Sancerre)와 뿌이 퓌메(Pouilly-Fume) AOC입니다. 두 마을은 루아르(Loire)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죠. 흔히 블랙커런트의 새순 향을 소비뇽 블랑의 전형적인 품종 향 중 하나라고 하는데, 석회질의 최고급 떼루아에서 생산된 상세르와 뿌이 퓌메 와인은 여기에 은근한 부싯돌(Silex) 향이 추가됩니다. 거의 복합미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죠.

부싯돌

100% 소비뇽 블랑 포도를 사용해서 오늘날의 상세르와 뿌이 퓌메 와인이 가진 명성을 쌓아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선구자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샤토 드 노제(Chateau de Nozet)에서 뿌이 퓌메 와인인 <바롱 드 엘(Baron de L)>을 만드는 파트릭 드 라두세트(Patrick de Ladoucette)입니다. 바롱 드 엘은 가장 전통 있는 최고급 소비뇽 블랑 와인이죠.

또 한 명의 선구자는 시대의 풍운아이며 반항아인 디디에 다그노(Didier Dagueneau) 입니다. 그가 만든 <뿌이 퓌메>, <실렉스(Silex)>, <뿌흐-상(Pur-Sang)> 등은 미슐랭 쓰리 스타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를 바꿔놓을 정도로 뛰어난 와인입니다. 이 예술가는 자연의 힘을 이용한 유기농법과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고집하는 집념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200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지만, 그의 와인은 지금도 계속 생산되고 있습니다.

디디에 다그노의 생전 모습

보르도에선 100% 소비뇽 블랑 와인보다 쎄미용과 적절하게 혼합해서 두 품종의 단점을 서로 보완한 드라이 화이트 와인과 스위트 화이트 와인을 생산합니다. 소비뇽 블랑의 부족한 장기 숙성 능력을 쎄미용(Sémillon)으로 보완하는 것이죠.

2) 뉴질랜드

프랑스 외의 생산국 중에선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말보로(Marlborough)의 소비뇽 블랑 와인이 유명합니다. 태평양 남단의 뉴질랜드는 선선한 기후를 좋아하는 소비뇽 블랑을 재배하기 좋은 날씨와 토양을 갖췄죠. 말보로에서 만드는 여러 소비뇽 블랑 와인은 아마 신세계 소비뇽 블랑 와인 중에서 향과 개성이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 와인은 식물성 향이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적당한 바디에 상큼한 맛이 나고 감귤류 등의 과일과 풀 향이 섞인 뉴질랜드산 소비뇽 블랑은 그냥 마셔도 좋고 생선회와 해산물 샐러드, 닭고기 샐러드 등과 마시면 아주 좋습니다.

 

 

3) 미국

캘리포니아에선 또 다른 스타일의 소비뇽 블랑 와인을 생산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자라는 소비뇽 블랑은 보다 복잡한 풍미와 점성이 특징입니다. 이런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70년대 초의 미국산 소비뇽 블랑 와인은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죠. 그래서 미국에선 프랑스 루아르의 뿌이 퓌메 와인을 상당량 수입해서 마셨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로버트 몬다비는 미국인의 입맛을 분석해서 적당하게 오크통 숙성한 소비뇽 블랑 와인은 <퓌메 블랑>이라는 브랜드로 판매해서 대단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미국에선 소비뇽 블랑을 퓌메 블랑이라고 불렀죠. 최근엔 미국에서도 산도 높고 신선하며 오크통에서 숙성하지 않는 가볍고 신선한 소비뇽 블랑 와인이 나옵니다.

4) 기타 지역

칠레의 카사블랑카 밸리에서 생산하는 소비뇽 블랑 와인은 과일 향이 부족하지만, 산도가 높고 향도 좋은 편입니다. 스페인의 루에다(Rueda) DO에서는 향이 진한 소비뇽 블랑 와인을 생산하고, 이탈리아에선 물처럼 가벼운 소비뇽 블랑 와인을, 오스트리아에서도 라이트 바디의 소비뇽 블랑 와인을 생산합니다.

4. 소비뇽 블랑 와인의 향

구스베리 열매의 모습

소비뇽 블랑 와인은 보통 라이트나 미디엄 바디에 산도는 중간 이상이며, 알코올 도수는 12.5~14%로 적당합니다. 대표적인 향은 구스베리(Gooseberry)와 그레이프프루트(Grapefruit, 자몽), 레몬, 라임, 사과, 멜론 같은 과일 향입니다. 여기에 잔디와 피망, 아스파라거스, 나무 새순, 쐐기풀, 허브, 올리브 같은 식물성 향도 많이 나오죠. 또한 미네랄(Mineral) 같은 광물성 향도 풍깁니다. 루아르 밸리의 소비뇽 블랑 와인은 부싯돌(Flint Rock) 향이 특징입니다.

5. 소비뇽 블랑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함께 먹기 좋은 음식은 해산물과 샐러드, 채소 요리입니다. 고추와 마늘, 향신료를 써서 매콤하고 진한 음식과 레몬과 토마토 등을 넣어서 신맛이 많은 음식도 잘 맞죠. 날거나 볶거나 데쳐서 조리한 요리라면 대부분 어울립니다. 그래서 피자나 인도 요리, 상큼한 샐러드, 생선회, 동남아시아와 멕시코 요리에 먹으면 아주 좋죠. 특히 루아르 밸리산 소비뇽 블랑 와인은 염소젖 치즈와 맛있는 마리아쥬를 이룹니다. 생선전과 해물찌개, 나물 같은 한식에도 잘 맞는 편입니다.

닭고기와 찬 돼지고기는 어울리지만, 쇠고기와 양고기 같은 붉은 육류는 맞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