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포도 품종

[프랑스] 카르미네르 - 진한 선홍색으로 신대륙에서 부활한 품종 (재업)

까브드맹 2023. 12. 1. 20:58

카르미네르 포도와 단풍에 물든 포도잎

오늘날 칠레를 대표하는 품종이 된 카르미네르(Carmenère)의 어원은 진홍색(Crimson)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카민(Carmin)입니다. 가을에 단풍으로 붉게 물드는 포도 잎사귀뿐만 아니라 카르미네르 와인의 빛이 진하고 선명한 진홍색을 띠기 때문에 카민이 어원이 된 것이죠.

1. 카르미네르의 특성

와인 생산국의 대표적인 양조용 포도로 아르헨티나에 말벡이 있다면 칠레에는 카르미네르가 있습니다. 국내에선 카르미네르란 품종명이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나 메를로(Merlot)보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인지도가 낮은 이유 중 하나는 이 포도가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재발견된 지 25년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카르미네르는 까베르네 소비뇽보다 탄닌이 부드럽고 산미가 적습니다. 부드럽다 못해 기름처럼 미끈거리는 점성이 느껴지는 카르미네르 와인도 있죠. 이런 특성 때문에 탄닌이 날카롭고 강한 와인에 질렸다면 카르미네르 와인은 편안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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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르미네르의 역사

1) 필록세라의 대재앙 전의 카르미네르

카르미네르는 칠레의 고유 품종이 아닙니다. 원래는 프랑스 보르도의 메독(Médoc) 지방을 대표하는 포도 중 하나로 18세기 초 메독에서 최상의 특성과 품질로 명성을 얻으며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과 함께 널리 재배되었죠. 보르도에선 이 포도로 색이 짙은 레드 와인을 만들었고, 때때로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포도처럼 최고급 와인에 이국적인 향신료 향과 색상, 탄닌을 보태려고 사용하곤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고급 품종으로 대우받으며 북으로 메독부터 남으로 그라브(Graves)까지 재배되던 카르미네르가 대서양을 건너가 안데스 지역에서 120년 만에 재발견되고, 마침내 칠레의 대표 품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미국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포도 해충인 필록세라(Phylloxera vastatrix) 때문입니다.

포도 해충인 필록세라의 모습

19세기 중반 미국에 심은 유럽종 포도나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들어 죽어버리자, 학자들은 원인을 밝히려고 프랑스로 상태가 안 좋은 포도나무를 보냈습니다. 이 포도나무에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가 숨어 있었고, 이 해충이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의 포도밭으로 퍼지면서 프랑스의 카르미네르는 사실상 멸종하고 말았죠.

훗날 필록세라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었지만, 이번에는 카르미네르의 까다로운 재배 조건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카르미네르는 제대로 익으려면 온화하고 건조한 날씨와 긴 성장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라는 동안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수분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며, 포도송이에 덮개를 씌우고 관리해야 포도가 잘 익죠.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카르미네르는 필록세라로 큰 피해를 본 포도밭을 복구할 때 농부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의 포도밭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죠.

 

 

2) 칠레에서 부활한 카르미네르

프랑스에선 완전히 사라져 버린 카르미네르였지만, 다행히 필록세라가 유럽에 건너가기 직전이었던 1850년대에 프랑스를 여행했던 칠레 부자들이 보르도풍의 와이너리를 만들려고 포도 대목(臺木)을 수입하면서 다른 품종과 함께 칠레로 이식(移植)되었습니다. 그 후 카르미네르는 1994년까지 칠레에서 메를로로 잘못 알려진 채 길러져 왔습니다. 하지만 메를로 와인이 인기를 끌던 1990년대에 칠레의 와인 생산자들은 칠레산 메를로 와인에 독특한 특성이 있는 걸 느꼈고, 뭔가 다른 품종이 메를로와 함께 수확되어 와인을 만들 때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994년 몽펠리에 대학 와인학과의 쟝-미셸 부르시코(Jean-Michel Boursiquot) 교수는 칠레의 비냐 까르멘(Viña Carmen) 포도원에서 메를로로 알려졌지만 더 빨리 열매를 맺는 포도가 사실은 보르도에서 사라진 전설의 포도 카르미네르라는 걸 밝혀냈습니다.

멸종된 줄 알았던 포도가 칠레에서 아직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칠레 와인 생산자들은 흥분했습니다. 4년 후인 1998년에 칠레 농무부는 장-미셸 부르시코 교수가 찾아낸 포도가 카르미네르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카르미네르 와인을 칠레의 특산 와인으로 육성하기 시작했죠.

건조한 날씨와 포도의 완숙에 필요한 풍부한 일조량을 갖춘 칠레에서 카르메네르는 번성할 수 있었고, 오랜 시간 후에 가려졌던 모습이 드러나면서 이제는 칠레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이 되었습니다.

 

 

3. 카르미네르 재배지

1) 프랑스

프랑스에서 이 포도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몇몇 와이너리에선 카르미네르를 와인 양조에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르고 슈페리에 와인인 샤토 르꾸뉴(Chêteau Recougne)이죠. 보르도에는 공식적으로 1백 헥타르가 넘는 카르미네르 포도밭이 있고, 보르도의 포도 재배자 사이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2) 칠레

세계에서 카르미네르를 가장 많이 재배하는 나라입니다. 2009년 기준으로 주요 와인 생산지인 센트럴 밸리(Central Valley)의 마이포(Maipo), 라펠(Rapel), 쿠리코(Curico) 밸리에서만 8,800헥타르 이상의 카르미네르 포도밭이 있습니다.

칠레 와인 산업이 발전하면서 카르미네르가 들어간 걸작 와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까사 라포스톨(Casa Lapostolle)의 끌로 아팔타(Clos Apalta)와 비냐 비크(Viña Vik)의 비크(VIK)가 대표적인 와인이죠. 와인 생산자들은 카르미네르에 다른 포도를 혼합해 카르미네르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 합니다. 까베르네 소비뇽이 특히 많이 사용되죠.

끌로 아팔타(Clos Apalta)와 비크(VIK) 와인

3) 이탈리아

최근 이탈리아 북부의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 주에서 까베르네(Cabernet) 품종이라고 생각하면서 재배해 온 포도가 사실은 카르미네르로 밝혀지면서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카르미네르 와인이 나오고 있습니다.

4) 기타 국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의 왈라왈라 밸리(Walla Walla Valley)에서 적은 양을 재배합니다. 호주에선 1990년대 후반에 유명한 포도 재배 전문가인 리처드 스마트(Richard Smart) 박사가 칠레에서 카르미네르 대목을 가져와 심었고, 2002년에 카르미네르를 사용한 첫 와인이 나왔습니다.

뉴질랜드에선 2006년에 마타카나(Matakana)에서 길러온 포도가 까베르네 프랑이 아니라 카르미네르로 밝혀졌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선 2014년에 로버트슨(Robertson) 지역의 두른부쉬(Doornbosch) 농장에 있는 로제른 와인스(Lozärn Wines)가 처음 카르미네르를 심었습니다. 2017년 로제른 와인스는 100% 카르미네르로 만든 와인 100병을 생산했고, 이 와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산 카르미네르 와인의 첫 빈티지입니다.

4. 카르미네르 와인의 향

카르미네르의 대표적인 향 중 하나인 시가 향

카르미네르 와인은 심홍색 빛을 띠며 붉은 베리(Berry)류 과일과 향신료, 피망 향이 특징입니다. 탄닌은 거칠지 않아 매우 부드럽고, 대개 미디엄 바디입니다. 잘 익은 카르미네르 와인은 체리와 붉은 과일, 스모크(smoke), 매콤한 스파이스(spice), 오크, 구수한 흙 향을 풍기며, 다크 초콜릿과 시가, 가죽의 복합적인 풍미가 나오는 와인도 있습니다. 값싼 카르미네르 와인은 피망과 식물성 향을 강하게 풍기고 맛도 단조롭죠.

5. 카르미네르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향신료 풍미가 강한 카르미네르 와인은 돼지구이나 양곱창구이처럼 터프한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 닭고기에 토마토, 모차렐라, 페퍼로니 등을 얹어서 매콤한 맛을 낸 디아블로라는 요리나 거칠게 간 후추와 파프리카가 들어간 초리소, 스테이크와 미트소스 파스타 등과 함께 마셔도 좋죠. 향신료와 채소를 많이 넣은 순대볶음 같은 음식과 먹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