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와인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와인 라벨을 자세히 들여다본 분이라면 누구나 듣고 봤던 이름일 겁니다. 레드 와인용 품종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를 정도로 까베르네 소비뇽은 레드 와인을 위한 포도로 잘 알려져 있죠. 메를로(Merlot), 피노 누아(Pinot Noir), 시라/쉬라즈(Syrah/Shiraz)와 함께 국제 품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많이 재배하는 품종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국내에선 줄여서 '까쇼'라고도 부르는 이 포도는 품종 교배의 걸작품이기도 합니다.
1. 까베르네 소비뇽의 특성
이 포도는
- 작은 사이즈
- 깊고 어두운 색
- 많은 씨앗
- 두꺼운 껍질
의 4가지 특성을 가졌습니다. 나무줄기의 껍질이 단단한 까베르네 소비뇽은 추위를 잘 견디고, 싹이 늦게 터서 이른 봄의 서리와 낮은 기온에 의한 동사(凍死)를 피해 갈 수 있습니다. 포도알의 두꺼운 껍질 덕분에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강해서 여러 지역의 다양한 풍토에 대한 적응성도 뛰어나지요. 두꺼운 껍질과 씨앗에는 탄닌(Tannin)이 많이 들어있고, 탄닌에는 포도의 산패(酸敗)를 늦추는 성분이 있어서 와인이 오랫동안 숙성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런 이유로 까베르네 소비뇽은 오크통에서 숙성한 후에 병에 오래도록 저장했다가 마시는 와인을 만들 때 가장 알맞은 품종입니다. 오랜 숙성을 통해 만들어진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색상과 향(Aroma)이 좋고 맛의 깊이가 있으며, 입안을 맴도는 부케(Bouquet, 숙성 과정에서 생긴 복합적인 2차 향)와 함께 마신 후에 긴 여운이 남습니다.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숙성과 보관 기간은 보통 5~20년 정도이지만, 고급 와인은 그 이상 숙성할 수 있고 적합한 환경의 셀러에서 보관하면 50년 이상 맛과 향이 발전하면서 유지됩니다.
다만 까베르네 소비뇽은 늦게 싹이 터서 늦가을에야 완숙에 이르는 품종이라서 날씨가 너무 덥고 땅이 비옥한 곳에서 재배하면 와인이 포도 주스처럼 느껴질 수 있고, 너무 선선한 곳에선 충분히 익지 못해 와인에서 풀 냄새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2. 까베르네 소비뇽 재배지
까베르네 소비뇽은 날씨가 서늘한 일부 와인 생산지를 제외한 세계 여러 곳에서 재배합니다. 그러나 최고의 까베르네 소비뇽 산지는 역시 프랑스 보르도 지방이죠. 미국 캘리포니아나 칠레의 마이포 밸리(Maipo Valley), 호주의 쿠나와라(Coonawarra) 등의 유명한 신세계 와인 생산지에서도 개성 있고 뛰어난 품질을 가진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생산합니다.
1)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까베르네 소비뇽과 함께 메를로나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말벡(Malbec), 쁘띠 베르도(Petit Verdot)로 와인을 만듭니다. 이때 까베르네 소비뇽에 많이 들어있는 탄닌은 와인의 구조(골격이라고도 합니다.)를 탄탄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죠.
보르도의 세부 지역 중에서 좌안의 메독(Medoc)과 오-메독(Haut-Medoc), 그라브(Graves), 페싹-레오냥(Pessac Leognan)의 와인이 까베르네 소비뇽 사용 비율이 높습니다. 까베르네 소비뇽 함량이 높은 이 지역의 그랑 크뤼(Grand Crus) 와인들은 강건하고 웅장한 구조와 복합적이고 매력적인 풍미를 맛볼 수 있죠. 이 지역 와인은 보통 10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저장과 숙성이 가능합니다. 와인을 양조할 때 까베르네 소비뇽을 50% 이상 섞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2) 미국
미국의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뉴월드 와인의 강자입니다. 수많은 훌륭한 와인이 있지만, 까베르네 소비뇽을 주로 사용해서 만드는 컬트 와인(Cult Wine)은 캘리포니아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죠. 북쪽의 워싱턴 주에서도 뛰어난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이 나옵니다.
3)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도 훌륭한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이 나옵니다. 대부분 이탈리아 고유 품종인 산지오베제(Sangiovese)와 혼합하지만, 까베르네 소비뇽을 85%가량 넣어 만든 슈퍼 투스칸 와인인 사시까이아(Sassicaia)처럼 전 세계 와인 시장에 충격을 가져온 와인도 있죠. 개인적으로는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최고의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4) 칠레, 호주, 기타 생산국
칠레 역시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강자입니다. 돈 멜초(Don Melchor)처럼 까베르네 소비뇽을 주로 사용한 뛰어난 와인이 많고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나죠.
호주에선 쿠나와라와 마가렛 리버(Margaret River)에서 좋은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이 많이 나옵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주로 북섬에서 보르도 블렌딩으로 만든 와인이 나오죠.
그밖에 동유럽,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페루, 일본, 중국 등지에서도 까베르네 소비뇽을 많이 재배합니다.
3. 까베르네 소비뇽의 향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에서 풍기는 가장 대표적인 향은 진하고 달콤한 블랙커런트(Black Currant)향입니다.
블랙커런트는 우리말로 까막까치밥나무를 뜻하지만, 아무래도 국내의 것과 유럽의 것은 품종이 다른 것 같습니다.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맛이 한창 좋을 때에는 서양 삼나무(Cedar)와 연필심(Lead Pencils) 같은 향이 나옵니다. 신세계에서 만드는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블랙커런트 향을 더 진하게 풍기지만, 바닐라 향도 나오고 때때로 민트 향이 날 때도 있습니다. 특히 호주산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 중에 민트 향이 강한 것이 많습니다. 그 밖에 블랙베리와 블랙 체리, 서양 자두 같은 과일 향을 풍기고, 올리브와 박하, 버섯 같은 식물성 향이 나옵니다. 오크 숙성을 거치면 시가 상자(Cigar Box), 다크 초콜릿, 연기(Smoke) 같은 향도 나옵니다.
고급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감미로운 맛과 농익은 향을 겹겹이 풍기며, 저렴한 와인이나 충분히 익지 않은 포도로 만든 와인은 흙냄새와 잼, 또는 피망이나 새순 같은 풋풋한 식물성 향을 더 진하게 풍깁니다. 특히 칠레의 저가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에서는 특유의 흙냄새가 나옵니다.
4. 까베르네 소비뇽의 역사
재배 역사가 오래된 샤르도네(Chardonnay)나 시라(Syrah)와 달리 까베르네 소비뇽은 18세기 중반의 보르도에서 탄생한 품종으로 까베르네 프랑과 부자 관계입니다. 까베르네 소비뇽의 기원을 밝혀내려고 캘리포니아 UC 데이비스 대학의 유전자 연구팀이 까베르네 소비뇽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고, 1997년 5월 15일 캐롤 메레디스(Carol Meredith) 박사팀이 까베르네 소비뇽이 까베르네 프랑과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의 교잡종인 것을 밝혀냅니다. 17세기에 보르도의 서로 다른 곳에서 자라던 두 품종이 우연히 교차수분이 이루어져 새로운 품종이 탄생한 것이죠.
연구팀은 51개 품종의 DNA를 조사했고 30종류의 DNA 표지를 비교해서 일치하는 두 개의 품종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까베르네 소비뇽과 소비뇽 블랑이었죠. 재미있는 것은 소비뇽 블랑은 청포도이지만, 까베르네 프랑과 소비뇽 블랑의 교잡으로 탄생한 까베르네 소비뇽은 흑포도의 특징을 더욱더 강하게 갖고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포도는 부모가 되는 두 포도의 앞뒤 이름을 따서 까베르네 소비뇽이라고 이름 지어졌고, 소비뇽은 야생을 뜻하는 “소바쥬(sauvage)"란 프랑스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까베르네 소비뇽이 가진 거칠고 공격적인 성격은 소비뇽 블랑의 성질을 상당 부분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5.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
모든 종류의 붉은 육류와 잘 어울리지만, 그중에서도 맛이 담백한 쇠고기와 양고기 요리에 가장 잘 맞습니다. 특히 레어에서 미디엄 레어로 구운 소고기 스테이크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죠. 양 갈비도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훌륭한 짝이 됩니다. 맵게 양념한 것을 제외한 육류 요리라면 대부분 잘 맞습니다.
치즈는 오래 숙성하고 단단한 경성 치즈가 어울립니다. 파스타와 피자 역시 잘 어울리며, 뜻밖에 초콜릿과 잘 맞기도 합니다. 다만 해산물 종류는 피해야 합니다. 특히 생선회 같은 날생선 요리는 와인과 음식 모두를 버리는 선택이 되죠.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의 강한 탄닌 성분이 회와 만나는 순간 회에 엉겨 붙어 거칠고 뻑뻑한 느낌을 주고, 와인 맛도 쓰게 느껴집니다.하지만 양념 안 한 장어구이나 서양식으로 조리한 해산물 요리라면 잘 맞는 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