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와인의 주요 포도인 산지오베제(Sangiovese)는 토스카나 와인 양조자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어린 포도입니다. 한때 잘못된 품질 관리로 저가 와인의 대명사로 취급받았지만, 현재는 세계 각지의 최고급 와인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키안티(Chianti) 와인에 들어가는 주요 포도이죠.
1. 산지오베제의 특성
1) 포도의 특성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은 최상의 산지오베제를 재배할 수 없기 때문에 자구책에서 나온 와인이다”
“만약 좋은 토양을 확보하고 있다면 굳이 다른 품종을 재배할 이유는 없다.”
키안티 와인의 대표 주자 중 하나인 까사 루피노(Casa Ruffino)의 양조 책임자 카르멜로 시몬첼리에가 이렇게 말했을 만큼 토스카나주 와인 생산자들의 산지오베제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산지오베제를 토스카나주에서만 기르는 것은 아닙니다. 북부의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주부터 중부의 라치오(Lazio)주와 남부의 캄파니아(Campania)주까지 산지오베제는 이탈리아 농부들의 사랑을 두루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최남단의 시칠리아(Sicilia)주에서도 산지오베제를 재배하죠.
만생종 포도인 산지오베제는 와인으로 만들면 붉은빛에 높은 산도와 풍부한 과일 향,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탄닌을 가진 전통적인 이탈리아 와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와인색은 석류처럼 선명한 붉은 빛부터 약간 검은 빛을 띤 적색까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숙성되면서 옅은 적색, 또는 주황빛을 띠고, 가장자리는 오렌지빛을 띠는 것이 특징이죠.
2) 와인의 특성
입에 군침이 돌게 할 만큼 새콤하고 붉은 과일 풍미가 가득한 전형적인 이탈리아 와인용 포도인 산지오베제는 가벼운 키안티부터 좀 더 묵직한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까지 다양한 와인으로 생산됩니다. 카르미냐노(Carmignano)와 모렐리노 디 스칸사노(Morellino di Scansano) 와인 양조에 사용하는 주요 품종이기도 하죠.
예전에는 산지오베제만 사용하지 않고 다른 품종도 섞어서 와인을 만드는 일이 많았지만, 최근엔 산지오베제 100% 와인이 많습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와 로쏘 디 몬탈치노(Rosso di Montalcino)는 산지오베제의 클론인 산지오베제 그로쏘(Sangiovese Grosso = 브루넬로)만 사용하는 대표적인 와인들이죠.
산지오베제는 대부분 파스타 같은 이탈리아 요리와 어울리면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 만들어지지만, 품질 좋은 와인은 10년 정도 숙성이 가능합니다. 최고급 산지오베제 와인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와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는 둘 다 묵직한 풀 바디 와인으로 충분한 숙성기간이 필요하지만, 숙성이 덜 되었을 때 마셔도 맛이 좋습니다.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처럼 탄닌이 강한 품종에 산지오베제를 혼합해서 와인을 만들면 상대적으로 탄닌이 적은 산지오베제가 와인을 부드럽게 해주므로 티냐넬로(Tignanello) 같은 수퍼 투스칸 와인과 산지오베제 디 로마냐(Sangiovese di Romagna) 와인을 만들 때도 산지오베제를 사용합니다.
2. 산지오베제의 역사
산지오베제의 기원에 관한 초기 학설은 이 포도의 역사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토스카나주에 살았던 고대 에트루리아인이 재배했던 야생 포도가 선조라는 것입니다. 산지오베제라는 이름은 '주피터의 피(blood of Jupiter)'를 뜻하는 라틴어인 Sanguis Jovis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산타르칸젤로 디 로마냐(Santarcangelo di Romagna) 소속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어떤 와인을 마시는지 묻는 방문자에게 대답하려고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오늘날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주의 리미니(Rimini) 지역입니다.
산지오베제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농업경제학자인 지오반베토리오 소데리니(Giovanvettorio Soderini)가 1590년에 쓴 저작입니다. 소데리니는 산지오베제를 산지오게토(Sangiogheto)로 적으면서 "토스카나주에서 이 포도로 매우 뛰어난 와인을 만들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식초로 변할 위험성이 있다."라고 적었습니다. 산지오게토가 산지오베제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으나 대부분의 와인 학자는 이 기록이 산지오베제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산지오베제가 말바지아(Malvasia), 트레비아노(Trebbiano)와 함께 토스카나주 전역에서 가장 널리 재배하는 포도란 점은 18세기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738년에 코시모 트린치(Cosimo Trinci)는 산지오베제를 다른 포도와 혼합하면 매우 우수한 와인이 나오지만, 산지오베제만 사용하면 단단하고 산도가 높은 와인이 된다고 적었습니다. 1883년에 이탈리아의 작가인 지오반니 코시모 빌리프란키(Giovanni Cosimo Villifranchi)도 산지오베제와 다른 포도를 혼합한 와인의 품질에 관하여 비슷한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와인 생산자이며 정치가인 베티노 리카솔리(Bettino Ricasoli)도 키안티 와인의 초기 양조법 중 하나를 공식화하면서 카나이올로(Canaiolo) 포도를 상당량 섞는 방법을 채택했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산지오베제는 키안티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와인 양조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토스카나 와인 생산자들은 현대적인 오크 사용법을 쓰는 동시에 산지오베제에 까베르네 소비뇽 같은 국제 품종을 혼합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슈퍼 투스칸 와인 등을 통해 성공을 거두게 되죠.
2004년 트렌티노-알토 아디제주에 있는 산 미켈레 알다디제 농업연구소(Istituto Agrario di San Michele all’Adige, IASMA) 의 연구팀은 DNA 조사를 통해 산지오베제가 칠리에졸로(Ciliegiolo)와 칼라브레제 디 몬테누오보(Calabrese di Montenuovo) 포도의 교배로 탄생한 품종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칠리에졸로는 토스카나주에서 오랫동안 재배해 온 포도지만, 이탈리아 남부 지역이 원산지인 칼라브레제 디 몬테누오보는 칼라브리아(Calabria)주에서 캄파니아(Campania)주로 퍼져 나간 품종입니다. 이 사실은 산지오베제의 유전적 자산이 토스카나주에 절반,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절반이 있다는 것을 뜻하죠.
학자들은 칠리에졸로와 칼라브레제 디 몬테누오보의 교배가 토스카나주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남부 이탈리아에서 발생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배가 일어났다는 주장의 증거는 이탈리아 남부 여러 지역에서 자라는 산지오제베의 씨 없는 돌연변이 품종들입니다. 시칠리아 북쪽의 리파리(Lipari)섬에서 자라는 코린토 네로(Corinto Nero), 뿔리아주의 투까제(Tuccanese), 캄파니아주에 있는 사벨리(Savelli) 마을의 네렐로(Nerello), 모타 산 지오반니(Motta San Giovanni) 마을의 네렐로 깜포투(Nerello Campotu), 만다토리치오(Mandatoriccio)와 비냐 델 콘테(Vigna del Conte)의 푸타넬라(Puttanella) 등이 산지오베제의 돌연변이 품종들이죠. 이탈리아 남부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산지오베제의 돌연변이 품종이 산지오베제가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근거라는 겁니다.
3. 산지오베제 포도의 재배지
1) 토스카나주
토스카나주는 산지오베제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지오베제로 만드는 토스카나 와인의 3 대장이라면 이탈리아 와인의 대명사인 키안티 & 키안티 클라시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를 들 수 있죠.
숙성 기간이 더 짧은 로쏘 디 몬탈치노와 로쏘 디 몬테풀치아노(Rosso di Montepulciano) 역시 산지오베제로 만듭니다. 다만 몬탈치노 마을에서 재배하는 산지오베제는 클론 품종인 브루넬로(산지오베제 그로쏘)이며,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에서 재배하는 것도 클론 품종인 프루뇰로(Prugnolo)이죠.
토스카나주에서 산지오베제는 아르노(Arno)강 이남에서 많이 재배하며 칼슘 성분이 풍부한 이회토에서 가장 품질 좋게 자라는 알려져 있습니다.
토스카나의 산지오베제 포도밭은 이탈리아 전체 산지오베제 재배지 중 53%를 차지합니다.
2) 토스카나주 북쪽
토스카나주 북쪽의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선 산지오베제를 "산지오베제 디 로마냐(Sangiovese di Romagna)"라고 부르며, 산지오베제로 다양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합니다.
포를리(Forlì)와 라벤나(Ravenna)에선 맛과 향이 풍부하면서 풀 바디하고 탄닌이 많은 산지오베제 와인을 만들죠. 반대로 볼로냐(Bologna) 지역에선 과일 풍미가 많이 나오는 가벼운 스타일로 생산합니다.
에밀리아-로마냐의 산지오제베 포도밭은 이탈리아 전체 산지오베제 재배지 중 12%를 차지합니다.
3) 토스카나주 남쪽
토스카나 동남쪽의 마르케(Marche)주에서는 가볍고 과일 풍미가 많이 나오는 산지오베제 와인을 만듭니다. 남부에서는 주로 프리미티보(Primitivo)와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 네로 다볼라(Nero d'Avola) 같은 지역 토착 포도와 혼합한 와인을 생산하죠. 대표적인 재배 지역은 뿔리아(Puglia)주로 이탈리아 전체 산지오베제 재배지 중 17%를 차지합니다.
그 외에 아브루쪼(Abruzzo), 캄파니아, 라치오, 샤르데냐(Sardegna), 시칠리아(Sicilia), 움브리아(Umbria)주에서 산지오베제를 재배합니다.
4) 프랑스
코르시카섬에선 오래전부터 산지오제베를 재배했고, 종종 스키아카렐로(Sciacarello) 포도와 섞어서 와인을 만듭니다. 랑그독(Languedoc)에서도 일부 생산자가 다양한 와인을 시험 생산하고 있죠.
5) 그리스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 동부의 PGI 드라마(Drama)와 PGI 트라케(Thrace)의 와인 생산자들이 산지오베제와 까베르네 소비뇽을 블렌딩한 후 오크통에 숙성한 슈퍼 투스칸 스타일의 와인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6) 신세계 와인 생산국
캘리포니아와 호주, 아르헨티나, 뉴질랜드의 일부 지역에서도 산지오베제를 재배합니다. 단일 품종 와인으로 만들거나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Merlot), 진판델 등과 혼합한 와인을 만들죠.
4. 산지오베제 와인의 맛과 향
산지오베제 와인은 아주 드라이하며 탄닌과 산도의 균형이 좋습니다. 오랜 숙성 후에는 아주 부드럽고 화려한 맛이 나오죠. 홍차의 쌉쌀한 맛에 딸기와 산딸기, 체리, 서양 자두 같은 붉은 과일과 담배, 허브, 향신료 향에 흙 내음 등이 섞인 복합적인 풍미가 있죠. 여운도 긴 와인도 많습니다.
산지오베제의 기본 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과일 계열
딸기(Strawberry), 산딸기(Raspberry), 체리, 비터 체리(Bitter cherry), 붉은 자두(Red plum), 블랙베리(Blackberry)
2) 나무 계열
오크(Oak), 삼나무(Cedar)
3) 식물 계열
마른 꽃(Dried flowers), 카모마일(Chamomile), 장미 꽃잎(Rose petal), 허브(Herbs), 송로버섯(Truffle), 커피콩(Coffee bean), 담배(Tobacco)
4) 향신료 계열
육계피(Cinnamon), 후추(Pepper), 아니스(Anise). 향신료(Spices), 바닐라(Vanilla)
5) 기타 계열
훈향(Smoke), 타르(Tar), 흙냄새(Earthy)
5. 산지오베제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산도가 높아서 와인만 마시기엔 조금 부담스럽지만, 음식과 함께 마시면 아주 맛있습니다. 파스타와 피자, 크림과 버섯을 사용한 리소토 같은 이탈리아 요리와 아주 잘 어울리죠. 토마토를 사용한 음식과 먹어도 훌륭하고 소고기와 양갈비구이 같은 기름진 육류와 먹으면 산지오베제의 산미가 느끼한 맛을 깔끔하게 씻어줍니다. 중식과 한식에도 잘 맞죠.
치즈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Parmigiano Reggiano)와 그라나 파다노(Grana Padano)처럼 단단한 경성 치즈가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