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생산지

[이탈리아] 뿔리아(Puglia)

까브드맹 2018. 7. 1. 08:00

뿔리아(Puglia) 와인 생산지 지도
(이미지 출처 : http://italianwinecentral.com/wp-content/uploads/ Puglia.png)

1. 뿔리아 와인의 역사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에서 뒷굽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는 뿔리아(Puglia)는 어쩌면 이탈리아반도에서 가장 역사 깊은 와인 생산지일지도 모릅니다. 일찍이 그리스인은 이곳에 식민 도시를 세운 다음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었죠. 도시를 건설하고 정착한 그리스인은 포도가 잘 자라는 이탈리아반도에 "와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외노트리아(Oenotria)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들의 와인 양조 기술은 고대 로마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훗날 뿔리아를 점령한 로마인은 로마와 뿔리아의 항구도시 브린디시(Brindisi)를 잇는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건설했고, 이 도로를 따라서 힘 있고 개성이 뚜렷한 뿔리아산 레드 와인이 로마 시민에게 전해졌죠. 일부는 바다를 통해서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유럽 각 지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오랜 역사를 가진 뿔리아는 20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 와인 산업계에서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탈리아 와인의 명성을 깎아 먹는 지역으로 남아있었죠. 왜냐하면, 한때 뿔리아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95%가 싸구려 벌크 와인이나 브랜디를 만들기 위한 증류용 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이 와인의 땅이라고 격찬했던 역사 깊은 와인 생산지인 뿔리아에서 벌크 와인을 많이 생산하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전 유럽에 퍼진 필록세라 때문이었죠. 당시 필록세라가 거의 모든 유럽 지역의 포도밭을 황폐하게 했기 때문에 유럽인은 식탁에서 마실 와인을 구하려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병충해로 인한 배추의 흉작으로 김치를 담글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많은 돈을 줘도 국산 김치를 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눈물을 머금고 맛없는 수입 김치를 먹을 수밖에 없듯이 유럽 여러 나라도 자국산 와인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와인 품질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일단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요를 채워야 할 대량의 와인이 필요했을 뿐이죠.

오랜 와인의 역사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존재, 필록세라입니다.
(오랜 와인의 역사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존재, 필록세라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ile:Dactylosphaera_vitifolii_1_meyers_1888_v13_p621.png)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와인 공장 역할을 했던 곳이 이탈리아의 뿔리아와 시칠리아였습니다. 두 지역은 토양에 필록세라가 싫어하는 모래가 많아서 다행히 필록세라가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두 지역에선 닥치는대로 포도를 재배해서 품질을 따지지 않고 와인을 만든 다음 유럽 곳곳에 공급했습니다. 유럽인들은 형편없는 맛에 투덜대면서도 두 곳에서 만드는 와인을 마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미국종 포도나무(Vitis Aestivalis)의 뿌리를 유럽종 포도나무(Vitis Vinifera)에 접붙여서 필록세라의 공격을 막는 방법이 개발되고,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와인 생산자들이 유럽 각지의 포도밭을 재건하면서 뿔리아 와인은 찬밥 신세가 됩니다. 더는 뿔리아 와인을 마시지 않아도 다른 곳의 와인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뿔리아 와인은 조롱의 대상일 뿐이었죠.

여기에 뿔리아의 와인 생산자들도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기존에 사용했던 생산 방식을 뜯어고치고 고품질 와인을 생산하기에는 기술, 자본, 마케팅 등 모든 요소가 부족했죠. 결국, 뿔리아에선 싸구려 벌크 와인과 브랜디 생산용 와인을 계속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뿔리아 와인에 대한 낮은 평가는 계속 이어졌고, 오랫동안 싸구려 대량 생산 와인이란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뿔리아에서 와인을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는 와이너리가 겨우 3곳이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고급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더구나 소량의 고급 와인을 생산하기보다 대량의 저급 와인을 만드는데 익숙한 이곳 농민들은 고품질 포도를 재배하는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고급 와인 생산지에서는 와인의 재료인 포도를 가장 좋은 상태에서 수확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선 포도나무가 흡수하는 각종 영양분과 광합성으로 만드는 포도당이 소수의 포도에 농축되도록 가지치기로 포도송이 숫자를 줄입니다. 포도가 썩지 않고 잘 익도록 철사를 따라 포도나무 줄기를 묶어서 잎이 포도를 가리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하죠. 반대로 더운 곳에선 포도가 햇빛에 시들지 않도록 잎으로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지열이 필요하면 포도송이가 낮게 열리게 하고, 반대라면 높게 열리게 해주죠. 이렇게 품질 좋은 포도를 얻기 위해서 농부들은 쉴 새 없이 노력하죠.

포도가 잘 여물도록 포도나무를 관리해주는 모습
(포도가 잘 여물도록 포도나무를 관리해주는 모습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lafondwinery.com/wineweblog/wp-content/uploads/2013/03/3.26.13-hand-pruning-1.jpg)

그런데 뿔리아에서는 그동안 이런 노력을 거의 안 했다고 합니다. 농부들은 대부분 포도 품종에 상관없이 포도를 심은 다음 가지치기도 안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물을 준다는군요. 이렇게 대충 관리한 다음 가을에 포도가 엄청나게 열리면 잘 익었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조리 수확해서 그대로 와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니 좋은 와인이 나올 수가 없죠.

하지만 세계 와인 시장의 고급화에 따라서 오늘날 뿔리아의 와인도 많은 발전을 이뤘습니다. 이제는 병에 담아 자기 레이블을 붙여서 판매하는 와이너리도 200개 이상으로 늘어났죠. 그래도 여전히 수확한 포도의 1/4만 제대로 된 와인으로 생산될 뿐, 나머지 포도는 계속 벌크 와인으로 생산되어서 싼값에 팔려나가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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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뿔리아 와인 생산지

뿔리아는 남북으로 450km가 넘는 매우 긴 지방이라서 지역에 따라 기후와 토양의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지역별로 특화된 포도 품종을 대량으로 재배하죠. 와인 산지도 재배하는 포도에 따라 구분됩니다. 주요 와인 산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뿔리아 지도
(이미지 출처 : http://www.dialuce.com/S-ITALY-WINES.html)

① 포지아(Foggia) : 북부 지역으로 트레비아노와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 산지오베제(Sangiovese)를 재배하며 특색 없는 벌크 와인을 대량 생산합니다.

②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 : 발리의 서쪽 지역으로 우바 디 트로이아(Uva di Troia) 포도로 발전 가능성이 엿보이는 와인을 만듭니다.

③ 살렌토(Salento) 반도 : 남쪽의 세 지역을 포함하는 곳입니다. 뿔리아 와인 중에서 우수한 것은 대부분 이곳에서 생산합니다. 샤르도네(Chardonnay)로 만드는 샤르도네 델 살렌토(Chardonnay del Salento) IGT 같은 싸고 맛있는 와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요즘엔 개성 있는 몇몇 토착 품종에 관한 관심이 시장에서 날로 늘어나고 있죠. 그런 토착 품종 중에서 유명한 것이 네그로아마로(Negroamaro)와 프리미티보(Primitivo)입니다.

 

 

3. 뿔리아의 포도 품종

프리미티보는 뿔리아에서 주로 재배합니다. 하지만 프리미티보의 원산지는 뿔리아가 아니라 크로아티아입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프리미티보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특산 포도인 진판델(Zinfandel)이 같은 품종이란 것이 밝혀졌고, 동유럽에서 재배하는 츨레냑 카스텔란스키(Crljenak Kaštelanski)라는 포도도 프리미티보와 DNA 구조가 같은 것이 밝혀졌죠. 츨레냑 카스텔란스키가 캘리포니아로 건너간 사연은 아래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크로아티아] 진판델/프리미티보 -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포도 (재업)

원래 동유럽에서 태어났지만, 이제는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포도로 자리 잡은 진판델(Zinfandel)은 가장 미국적인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품종입니다. 짙은 색깔, 묵직한 느낌, 풍부하고 부드러운

aligalsa.tistory.com

진판델 와인은 포도의 상태에 따라 풍미가 좌우됩니다. 서늘한 곳에서 자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라즈베리처럼 붉은 베리류의 과일 풍미가 많이 나오고, 따뜻한 곳에서 자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블랙베리와 아니스(Anise), 후추 풍미가 강하게 나오죠. 프리미티보도 진판델과 특성이 같아서 두 포도로 만든 와인을 나란히 놓고 마시면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는 걸 누구나 느낄 수 있죠. 너무 값싼 와인은 특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제외하고요.

프리미티보의 수확량은 이탈리아의 양조용 포도 중에서 12위 정도이며 주요 와인 생산지는 아래의 세 곳입니다.

①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Primitivo di Manduria) DOC

② 조이아 델 꼴레 프리미티보(Gioia del Colle Primitivo) DOC

③ 팔레르노 델 마씨코 프리미티보(Falerno del Massico Primitivo DOC

프리미티보 만두리아 DOC와 조이아 델 꼴레 프리미티보 DOC는 뿔리아에 있으며 레드 와인은 프리미티보를 100% 사용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조이아 델 꼴레 DOC의 로제 와인은 프리미티보를 50~60%가량 섞어야 하죠. 팔레르노 델 마씨코 프리미티보 DOC는 깜파니아(Campania) 지방에 있으며 프리미티보를 최소 85% 넣어서 만들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뿔리아에서 발효가 끝난 프리미티보 와인을 배편으로 토스카나나 피에몬테로 보내서 그곳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질감과 무게감을 늘리기 위해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리미티보와 진판델의 관계가 알려지자 프리미티보 재배지가 늘어났고, 다른 품종을 섞지 않고 프리미티보만 사용한 와인의 생산도 증가했죠. 현재 이탈리아에서 만드는 프리미티보 와인은 대부분 투박하고 알코올 도수도 16%가 넘는 것이 많지만, 와인을 미국산 새 오크통에서 숙성해서 미국의 진판델 와인과 비슷하게 만드는 와인 생산자도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휴 존슨, 젠시스 로빈슨 저, 세종서적 편집부, 인트랜스 번역원 역, 와인 아틀라스(The World Atlas of Wine), 서울 : 세종서적(주), 2009

2. 영문 위키피디아 뿔리아 항목

3. 영문 위키피디아 바인 트레이닝 항목

4. 영문 위키피디아 필록세라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