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슈퍼 투스칸
와인을 마시고 배우다 보면 자주 듣는 와인들이 있습니다.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이라는 일련의 와인들인데요, 슈퍼마켓에서 판다고 해서 슈퍼는 아니고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서 지정되지 않은 포도로 만드는 매우 우수한 품질의 와인들을 말합니다.
이탈리아 와인의 등급체계는 DOC(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데노미나지오네 디 오리지네 콘트롤라타)라고 하는데, 이탈리아 와인의 품질을 관리하는 체계를 만들고자 1963년에 프랑스의 AOC 제도를 본따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DOC는 프랑스의 AOC와 마찬가지로 각 와인 산지별로 와인 생산에 관한 규정을 정해 놓고 이를 통제해서 와인 품질을 관리하게 되어 있죠. DOC의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해당 지역에 지정된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주에서는 산지오베제(Sangiovese)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야 하며, 피에몬테(Piemonte)주에서는 네비올로(Nebbiolo)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야 상위 등급인 DOCG나 DOC 등급을 준다는 것이죠. 이러한 규정은 와인 품질이 평범해도 DOC 규정에 따르면 상위 등급을 주고, 아무리 와인 품질이 좋아도 규정에 어긋나면 하위 등급을 준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마르케시 인시자 델라 로체타(Marchesi Incisa della Rocchetta) 후작이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묘=삽목을 들여와 만든 최초의 슈퍼 투스칸 와인인 사시까이야(Sassicaia)가 1968년에 시장에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DOC의 등급 규정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71년 삐에로 안티노리(Piero Antinori)가 까베르네 소비뇽과 산지오베제를 성공적으로 혼합한 티냐넬로(Tignanello)를 만들어서 제2의 슈퍼 투스칸 와인의 물결을 가져오자 DOC의 등급 규정 문제는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죠.
매우 뛰어난 품질을 가진 티냐넬로가 "지역에 지정된 포도를 사용해야 DOC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법 조항으로 인해 "비노 다 따볼라(Vino da Tavola)"란 최하위 등급을 부여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DOC 규정의 모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또한, 비록 최하위 등급이지만 품질과 가격에서 엄연히 최고급 등급인 DOCG급을 능가하는 사시까이야와 티냐넬로가 시장에 나온 후 여기에 자극받은 토스카나의 많은 와이너리들이 최하위 등급 부여라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DOC 규정 외의 포도를 사용해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고품질 와인들에 와인 애호가들은 슈퍼 투스칸이란 이름을 붙이며 열광했죠.
슈퍼 투스칸 와인이 시장에서 주목을 받으며 영향력이 증대되자 1992년 1월에 이탈리아 정부는 DOC 제도를 개정합니다. 그리하여 전통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만든 와인들을 포괄할 수 있는 IGT(Indicazione Geografica Tipica)라는 등급을 만들어내죠. IGT는 DOC나 DOCG에 비해 규정이 상당히 완화되었고, 특히 포도 선택에 제한이 많이 줄어들어서 대부분의 슈퍼 투스칸 와인은 IGT 등급에 포함됩니다. 이처럼 와인에 대한 생산자들의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 혁신적인 시도가 훌륭한 와인을 만들었고, 애호가들의 호응과 열광이 법을 바꾸게 된 겁니다. 최근에는 전통 품종을 사용하지 않아도 DOC 등급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 변경이 또다시 이루어져서 사시까이야는 현재 볼게리 사시까이야(Bolgheri-Sassicaia) DOC라는 등급을 달고 있습니다.
2. 마르케시 안티노리의 티냐넬로
마르케시 안티노리 티냐넬로는 사시까이야나 오르넬라이아(Ornellaia), 마세토(Masseto)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슈퍼 투스칸 와인이지만, 와인 스펙테이터가 선정한 "2007년 올해의 100대 와인"에서 2004년 빈티지가 4위에 오르는 등 여전히 뛰어난 품질을 자랑합니다. 2006 빈티지는 산지오베제 80%, 까베르네 소비뇽 15%,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5%를 사용해서 만들었고, 비록 IGT 등급 와인이지만 맛과 향은 최고급 DOCG 와인과 어깨를 견줄 만큼 뛰어납니다.
예전에도 몇 번 마셔봤지만, 그때마다 오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로 마셔서 맛과 향을 충분히 음미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4시간가량 디캔팅해서 맛과 향을 충분히 끌어낸 상태로 시음했습니다.
3. 와인 시음기
한 잔을 따라 향과 맛을 음미해보니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 산딸기와 블랙 커런트, 말린 과일 향 등이 흘러넘치고 이어서 오크 향이 피어오릅니다. 한 잔 입에 넣어보면 입안에 꽉 차면서도 둥글고 탄탄한 탄닌의 감촉을 느낍니다. 향은 한 번 두 번 맡을 때마다 계속 천변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맛은 오래 두어도 기본적인 골격은 유지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디캔터에 4시간, 마시기 시작해서 2시간가량 흘러도 티냐넬로는 절정의 맛을 여전히 유지했습니다. 물론 처음의 맛과 향이 계속 유지되진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줬지만, 그 힘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여전하더군요. 이탈리아 와인 특유의 짜릿한 산미에 까베르네 소비뇽을 통해 맛볼 수 있는 강인함을 동시에 느끼고, 온갖 붉은 과일 향이 어우러져 뿜어져 나오는 균형 잡힌 걸작 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와규나 최고 등급의 한우로 만든 스테이크 및 구이, 양갈비 등과 잘 어울립니다. 2010년 3월 1일에 시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