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아베 개요
고대 그리스인은 이탈리아를 '외노트리아(Oenotria, 와인의 땅)'라고 불렀습니다. 전 국토에서 포도를 재배할 수 있고 와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와인에 관한 다른 나라 소비자들의 인식은 '생산량만 많은 저질 와인'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와인에 관한 이런 편견을 지워버리고 이탈리아 와인의 매력을 세계에 알린 선봉장격인 와인이 베네토(Veneto) 지방의 소아베(Soave) 입니다. 산도가 높고 상큼한 화이트 와인인 소아베가 미국과 영국 시장에서 최고의 식전주(食前酒)로 평가받으면서 이탈리아 와인에 대한 소비자들의 생각을 바꾼 거죠.
원래 ‘Soave’라는 단어는 "부드럽게, 사랑스럽게, 상냥하게"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오페라 아리아나 악보에서도 흔히 사용합니다.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의 화이트 와인에 소아베란 이름이 붙은 사연에 관해선 13세기에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쓴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와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단테가 소아베의 부드러움에 매료되어 ‘Soave(부드러워)’라고 칭송했고, 그래서 소아베란 이름이 붙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소아베 와인을 마셔보면 그 전설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와인의 강한 산도 때문에 조금 날카로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침샘을 자극하는 산미 덕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한 식전주로는 최고의 와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아베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아직은 낯선 존재입니다. 인기 없는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이고 소아베 지역도 우리에게 잘 안 알려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아베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 중 하나로 외국에서는 끼안티(Chianti)와 함께 무척 인기가 있죠.
2. 소아베의 역사
소아베에선 1세기경부터 와인을 생산해 왔습니다. 계단식 포도밭에 둘러싸인 소아베 성은 중세 시대의 소아베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명소라고 할 수 있죠.
20세기 초에 이탈리아 시인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le d'Annunzio)는
“이 와인은 젊음과 사랑의 와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점차 신중해지고 사려 깊어진 나에게 더는 어울리는 와인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화려한 과거에 대한 찬미로 이 와인을 마신다. 이 와인이 나에게 다시 젊음을 돌려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다시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라며 소아베를 젊음과 사랑의 와인으로 평가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 이탈리아 와인 붐이 일었을 때 소아베 와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미국에서 이탈리아 DOC 와인이 가장 많이 팔렸던 1970년대에 소아베 와인 판매량은 볼라(Bolla) 같은 대형 와인 업체의 마케팅에 힘입어 끼안티 와인을 뛰어넘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 와인과 남부 이탈리아 와인이 미국 시장에 대대적으로 진출하면서 미국의 소아베 와인 점유율은 줄어들고 맙니다.
3. 소아베 와인의 생산지
소아베는 이탈리아 북동부 베로나(Verona) 지역에 있는 총인구 6,8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입니다. 소아베 와인의 주요 생산지는 베로나(Verona)시 동쪽의 언덕 일대로 정확하게는 베로나와 베네치아(Venezia)를 잇는 도로의 18~25㎞ 지점 사이에 있는 "사레니씨마(Serenissima)" 고속도로의 북쪽이죠. 이곳엔 소아베 지자체를 비롯한 12개 마을이 있으며 마을들의 포도밭 전부, 혹은 일부가 소아베 DOC에 속합니다. 마을 이름은 ABC 순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① 칼디에로(Caldiero) ② 카짜노(Cazzano) ③ 콜로놀라(Colognola) ④ 일라시(Illasi) ⑤ 라바노(Lavagno) ⑥ 메짜네(Mezzane) ⑦ 몬테치아(Montecchia) ⑧ 몬테포르테 달포네(Monteforte d'Alpone) ⑨ 론까(Ronca) ⑩ 산 지오바니 일라리오네(San Giovanni Ilarione) ⑪ 산 마르띠노 부온 알베르고(San Martino Buon Albergo) ⑫ 소아베(Soave)
소아베 와인은 1968년에 DOC 와인으로 지정되었고, 생산지는 그 후 주기적으로 변경되고 확장되었습니다. 소아베 DOC를 설정한 후 얼마 안 있어 영역을 확장했을 때, 새로운 포도밭 대부분은 힐리 끌라시코 지역(the hilly classico zone)에서 멀리 떨어졌거나 아디제 강(Adige river)을 따라 흙이 퇴적된 낮은 평원 쪽이었습니다. 이때 수확량이 많은 트레비아노 토스카노(Trebbiano Toscano) 포도가 소아베 지역에 소개되었고 재배량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오늘날 이 비옥한 평야 지대엔 4,000헥타르 이상의 포도밭이 있으며 이곳에서 수확한 포도로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소아베 와인의 대부분을 생산합니다.
전통 생산지와 새롭게 포함된 지역을 합쳐서 현재 소아베의 재배 면적은 약 7,000ha에 달해 유럽 최대 규모의 화이트 와인 생산지이며, 경쟁자인 프랑스 샤블리(Chablis) 지역보다 15% 정도 더 넓습니다. 재배 면적이 넓다 보니 생산량도 많아서 베네토주 화이트 와인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며 DOC 화이트 와인의 50%에 달하죠. 이런 엄청난 생산량 때문에 소아베 와인은 아직도 품질과 명성보다 낮은 가격으로 유통됩니다. 그래서 와인 생산자 중에선 다른 이름으로 와인을 파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소아베란 이름을 쓰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소아베 최고의 양조장으로 1948년부터 와인을 생산했던 안셀미(Anselmi)가 대표적인 곳이죠. 소아베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손해를 본다고 판단한 안셀미는 2000년에 소아베 조합을 탈퇴했고, 지금은 베네토 지방 와인으로 등급을 낮추고 독자 노선을 가고 있습니다.
2001년에는 소아베 수페리오레(Soave Superiore) DOCG 등급이 제정되어 2002년 빈티지부터 적용되었죠. 하지만 와인 전문가 오즈 클라크(Oz Clarke)가 그의 저서에서 '불명확하고 감춰진 것이 너무 많다'라고 적었던 것처럼 불명확한 이유로 원래 끌라시코(Classico) 지역에 속했던 포도밭 중 어떤 곳은 등급에 포함되었고 어떤 곳은 제외되었습니다. 이처럼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일부 지역이 제외되고, DOCG 규정에 새로운 가지치기와 포도 재배법이 추가되자 소아베 생산자들은 날카로운 비판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몇몇 생산자들은 2003년 초반에 자진해서 DOC와 DOCG 등급을 버리고 규정상 아래 등급인 IGT 등급으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서나 관료들의 밀실 행정은 탈을 일으키기 마련이군요.
소아베의 기후는 가을철에 포(Po) 계곡에서 퍼져 나오는 안개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안개 때문에 포도 재배에 악영향을 미치는 곰팡이나 여러 가지 포도 질병이 생겨나기도 하죠. 소아베를 대표하는 가르가네가(Garganega) 포도는 껍질이 두껍고 늦게 익어서 트레비아노 토스카노처럼 껍질이 얇은 포도보다 안개의 악영향을 더 잘 견딥니다.
소아베 지역은 고대엔 바다였다가 솟아올라 육지가 된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전통 재배지인 소아베 끌라시코(Soave Classico) 지역의 토양을 평지의 충적토와 비교해보면 기름지지 못하고 거칩니다. 이런 토양은 유럽종 포도가 자라기에 좋죠. 또한, 소아베 끌라시코의 서쪽 지역은 석회석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흡수한 후 저녁에 방출해 기온을 유지해줍니다. 석회석의 이러한 작용은 포도가 잘 익도록 해서 와인에 더욱 많은 과일 풍미가 있도록 만들어주죠. 몬테포르테 달포네 마을 근처의 동쪽 지역은 풍화된 화산토로 토양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와인 전문가 젠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의 말에 따르면 이런 토양은 와인의 질감을 좀 더 '강철같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4. 소아베의 포도 품종
소아베라는 명칭을 붙이려면 소아베에서 재배가 허용된 네 종류의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 가지 포도 중 하나는 유명한 청포도인 샤르도네(Chardonnay)이며, 나머지 셋은 트레비아노 디 소아베(Trebbiano di Soave)와 이탈리아 특산종인 가르가네가, 피노 비앙코(Pinot Bianco)입니다.
트레비아노는 프랑스에선 우니 블랑(Ugni Blanc)이라고 부르며 풍미가 약한 벌크 와인이나 브랜디 제조에 사용하지만, 이탈리아에선 중성적인(Neutral)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으로 생산하는 일이 많습니다. 소아베의 트레비아노 포도는 토스카나의 것보다 더 고급스러운 풍미를 지녔죠.
신선한 풋사과와 섬세한 아몬드 풍미가 있는 가르가네가는 소아베 와인에 꼭 들어가는 포도입니다. 가을철에 포 계곡에서 퍼져나오는 안개 때문에 소아베에선 포도에 피해를 주는 곰팡이와 질병이 발생하곤 하지만, 가르가네가는 껍질이 두껍고 천천히 익어서 껍질이 더 얇은 트레비아노보다 안개의 피해를 덜 받는 편입니다.
소아베 와인은 가르가네가를 70% 이상 넣어야 하며, 트레비아노 디 소아베와 피노 비앙코, 샤르도네는 합쳐서 30% 이하로 사용합니다. 최근에는 가르가네가 100%로 만든 소아베 와인도 나오고 있죠.
소아베 와인은 묵직하고 진한 풍미가 있는 것보다 가볍고 상쾌한 맛과 향을 풍기는 것이 많습니다. 영국의 와인 평론가 오즈 클라크(Oz Clarke)는 자신의 저서인 '와인 이야기(Oz Clarke's Introducing Wine)'에서 소아베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가르가네가와 트레비아노 포도로 만든 소아베 와인은 본 드라이하고 뉴츄럴한 맛이 특징인 전형적인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이다. 소아베는 놀라운 깊이와 숙성 능력을 지녀 상당히 고급스러운 와인으로 탄생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라이트한 맛을 풍긴다. 이 지방의 중심부에서 생산하는 소아베 클라시코는 맛이 복잡하지 않고 유쾌하다."
5. 소아베 와인의 종류
소아베 와인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아베 DOC로 가장 많이 생산되고 흔히 볼 수 있는 와인입니다. 보통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양조해서 맛이 가볍고 상큼합니다. 생산하고 나서 1~2년 후에 마실 수 있으며 가격도 저렴하죠.
둘째는 소아베 끌라시코 DOC로 1927년에 베네토 지방 정부가 처음 설정한 소아베 클라시코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입니다. 아몬드와 레몬 풍미가 나면서 좀 더 깊은 맛을 갖고 있죠. 소아베 와인의 원래 생산지인 소아베 끌라시코 DOC는 소아베 지자체와 몬테포르테 달포네(Monteforte d'Alpone) 주변의 산비탈에 있는 2,720헥타르 넓이의 포도밭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셋째는 소아베 수페리오레 DOCG'와 레치오토 디 소아베(Rechioto di Soave) DOCG입니다. 두 와인은 소아베 끌라시코 DOC의 생산지 중에서도 더 척박하고 비탈진 제한 구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죠. 소아베 와인은 대부분 달지 않고 드라이하지만, 포도를 말려서 양조하는 아파씨멘토(Appassimento) 방식을 사용하는 레치오토 디 소아베는 달콤한 맛을 가졌습니다. 소아베 수페리오레 DOCG는 포도를 수확한 다음 해 9월 1일이 지나야 시장에 내놓을 수 있으며, 숙성에 따른 와인의 특성과 복합성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최소 세 달간 병 속에서 숙성해야 합니다. 소아베 수페리오레 DOCG 중에서 레이블에 "리세르바(Riserva)"라고 표시한 것은 최소 2년 이상 숙성한 것입니다.
<참고 자료>
1. 영문 위키피디아 소아베 와인 항목
2. 휴 존슨, 젠시스 로빈슨 저, 세종서적 편집부, 인트랜스 번역원 역, 와인 아틀라스(The World Atlas of Wine), 서울 : 세종서적(주), 2009
3. 크리스토퍼 필덴, 와인과 스피리츠 세계의 탐구(Exploring the World of Wines and Spirits), 서울 : WSET 코리아, 2005
4. 오즈 클라크 저, 정수경 역, 오크 클라크의 와인 이야기_OZ Clark's Introducing Wine, 서울 : (주)푸른길, 2001
5.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