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베라(Barbera)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주에서 많이 재배하는 레드 와인용 포도입니다. 이탈리아 내에서 재배량은 2000년 기준으로 산지오베제(Sangiovese)와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에 이어 3위죠. 포도밭이 많기도 하지만,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많은 것도 순위에 보탬이 됩니다.
1. 바르베라의 특성
1) 포도의 특성
바르베라는 색이 진하지만 탄닌은 적습니다. 충분히 익으려면 더운 환경이 필요하고, 산도는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흑포도치곤 유난히 높습니다. 이탈리아 곳곳의 포도밭에는 100년 이상 자란 바르베라 포도나무가 많습니다. 이 늙은 나무에서 열리는 포도는 과일 향이 풍부하고 평균 이상의 탄닌이 들어 있어서 장기 숙성할 수 있는 강렬한 와인을 만들 수 있죠. 바르베라 와인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에몬테주에 있는 아스티(Asti)로 이곳에서 생산하는 바르베라 와인에는 "Barbera d'Asti(바르베라 다스티) DOCG"라는 지역 명칭을 붙일 수 있습니다.
네비올로(Nebbiolo)와 마찬가지로 바르베라도 산도가 높습니다. 네비올로보다 훨씬 먼저 다 익은 포도를 딸 수 있는 조생종 포도로 실제로 네비올로보다 먼저 수확하지만, 아스티와 알바(Alba)의 일부 생산자는 산도가 어느 정도 낮아지고 당분이 더 축적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합니다. 단위당 수확량을 낮춘 포도밭에서 잘 자란 포도는 과일 향과 당분이 더 많아져서 특유의 높은 산도와 균형을 이룹니다. 하지만 너무 익은 포도로 만든 와인에선 건포도 냄새가 나기도 하죠.
2) 와인의 특성
바르베라는 달콤하면서 원숙한 향이 나는 레드 와인을 생산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바르베라 와인은 네비올로 와인보다 덜 묵직하지만, 아주 잘 익은 포도를 사용하면 웬만한 바롤로(Barolo)를 능가할 만큼 우수한 와인이 되기도 합니다. 바르베라 와인은 바르베라의 적은 탄닌과 높은 산도를 다루는 다양한 방법으로 만듭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다른 품종을 섞거나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드는 것이죠.
바르베라 와인은 미디엄 바디에 과일 풍미가 풍부한 것부터 힘이 있고 강렬하며 숙성이 필요한 것까지 품질과 맛이 아주 다양하지만, 한결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깊은 루비색과 핑크빛 테두리, 뚜렷한 탄닌, 확연한 산도가 그것이죠. 보통 따뜻한 곳에서 재배하면 산도가 낮아지는 다른 포도와 달리 온난한 기후에서도 높게 나오는 바르베라의 산도는 훌륭한 장점이 되죠. 바르베라의 진한 색소도 품종을 혼합할 때 장점이 됩니다. 그래서 바르베라 와인은 전통적으로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에서 네비올로 와인의 색을 진하게 만드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가볍게 만든 바르베라 와인은 보통 신선한 과일과 말린 과일의 맛과 향이 나지만, 장기숙성력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산도와 과일 맛이 균형을 이루고 풍부한 오크 추출물과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가진 바르베라 와인은 꽤 오래 숙성할 수 있죠. 이런 와인은 솎아내기 등으로 생산량을 최대한 줄인 품질 좋은 포도로 만듭니다.
바르베라 와인 생산자들은 풍미와 탄닌의 구조를 강화하려고 오크통을 사용하곤 합니다. 가장 좋은 오크통은 프랑스의 225ℓ 들이 오크통인 바리끄(barrique)입니다. 오크통은 바르베라 와인의 맛과 향에 확실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바르베라 와인의 자두와 향신료 향을 늘려주면서 더 둥글고 풍부한 질감을 만들어 주죠. 다만 나무와 향신료 향이 강한 새 오크통보다 체리 같은 선명한 향이 나오게 해주는 중고 오크통을 많이 사용합니다.
대다수의 와인 생산자와 소비자는 바르베라의 높은 산도를 신경 쓰지 않지만, 좀 더 부드러운 와인을 만들려는 생산자는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 등을 넣어서 바르베라 와인의 산도를 낮추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2. 바르베라의 역사
1) 바르베라의 기원
바르베라의 기원에 대하여 학자들은 피에몬테 중부의 몬페라토(Monferrato) 언덕이 고향이며, 13세기에 이미 일대에 널리 자라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카살레 몬페라토(Casale Monferrato) 대성당에 보관된 1246년~1277년 사이의 문서에 "드 보니스 비티부스 바르베지니스(de bonis vitibus barbexinis)", 또는 바르베라 포도밭에 대한 임대차 계약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식물학자인 삐에르 비알라(Pierre Viala)는 롬바르디아(Lombardia)주의 올트레포 파베세(Oltrepo Pavese) 지방이 바르베라의 고향이라고 추측합니다. 최근에는 DNA 조사를 통해 바르베라가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서 많이 재배하는 무르베드르(Mourvèdre) 포도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2) 바르베라 와인 사건
1985년 피에몬테주에서 바르베라 와인에 얽힌 큰 사건이 터집니다. 일부 바르베라 와인 생산자가 불법적으로 와인에 메탄올을 첨가한 것이죠. 그들이 만든 바르베라 와인을 마시고 죽은 사람이 30명이 넘었고, 더 많은 사람이 시력을 잃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후 연일 이어진 신문과 매스컴의 혹평으로 바르베라 와인 판매와 포도 재배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결국 1990년대 후반부터 몬테풀치아노에 밀려나 이탈리아의 바르베라의 재배량은 3위가 되고 맙니다.
3) 새로운 바르베라 와인 양조법의 등장
바르베라 와인에 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일은 새로운 양조법의 등장입니다. 원래 피에몬테주에선 바르베라 와인을 커다란 슬로베니아산 오크통에서 숙성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프랑스의 양조학자인 에밀 뻬노(Émile Peynaud) 교수가 바르베라 와인 생산자들에게 더 나은 발효와 숙성을 위해 작은 오크통의 사용을 제안했죠.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면 와인에 미묘한 오크 스파이스 향을 더해주고 산소 공급을 제한할 수 있어서 와인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숙성할 때 오크통에 스며드는 산소량을 줄이면 바르베라 와인의 품질이 떨어지는 걸 막아주고, 몇몇 와인에서 생기곤 하는 악취 나는 황화수소의 발생을 줄여줍니다. 게다가 오크에 들어있는 다당류는 바르베라의 풍부한 맛을 늘려주죠. 향신료 풍미와 미세한 산소 공급, 풍부한 맛을 늘려주는 다당류뿐만 아니라 오크의 목질성(木質性) 탄닌도 와인 품질이 좋아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목질성 탄닌은 포도의 페놀 화합물에 들어있는 탄닌만큼 수렴성(收斂性)이 강하진 않지만, 와인의 구조는 향상시켜 줍니다. 그래서 숙성 시간은 줄여주면서 더 부드러운 와인을 만들 수 있게 해주죠. 바르베라는 네비올로보다 작은 오크통과 친화력이 좋아서 이 방법이 더욱 알맞았습니다.
에밀 뻬노가 작은 오크통의 사용을 제안했을 때 옛 방식을 고수하는 많은 바르베라 와인 생산자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오크통을 사용한 수퍼 투스칸(Super Tuscan) 와인이 성공하고, 1970년대 중반에 안젤로 가야(Angelo Gaja)가 이 방법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1990년대부터 프랑스의 225ℓ 오크통인 바리끄(Barrique)에서 숙성한 바르베라 와인이 등장했습니다. 오늘날엔 많은 와인 생산자가 바리끄를 사용해서 바르베라 와인을 만들죠.
바르베라 와인은 오랫동안 지나치게 높은 산도와 낮은 타닌 때문에 낮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재배 방법과 양조 기술의 발전, 이탈리아 토착 품종에 대한 새로운 관심 덕분에 점점 주목받고 있습니다. 물론 뛰어난 와인의 숫자도 점점 늘고 있죠.
3. 바르베라 포도의 재배지
1)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모스카토 다스티(Moscato d'Asti)로 유명한 아스티(Asti) 마을의 바르베라 다스티(Barbera d'Asti)는 피에몬테주의 또 다른 특산 와인으로 유명합니다. 다른 재배지로는 가티나라(Gattinara)와 겜메(Ghemme), 바르베라 달바(Barbera d’Alba), 바르베라 디 몬페라토(Barbera di Monferato), 악퀴(Acqui), 디나오 달바(Dinao d’Alba), 돌리아니(Dogliani), 랑게 몬레가레시(Langhe Monregalesi), 오바다(Ovada) 등이 있습니다.
2) 신세계
이탈리아 외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바르베라를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수많은 이탈리아 이민자가 신대륙으로 바르베라를 가져갔기 때문이죠. 이때 가져간 바르베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아르헨티나에 뿌리를 내려 현재까지 이어져 옵니다.
4. 바르베라 와인의 색과 향
바르베라 와인은 밝거나 진한 루비색을 띠며, 딸기와 체리 등의 베리류 과일과 서양 자두, 제비꽃, 감초, 아몬드 향을 풍깁니다. 맛은 드라이하고 높은 산도 덕분에 맑고 활기찬 느낌이 나죠. 탄닌이 적은데도 부드러운 풀 바디 와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대중적인 바르베라 와인은 양조 후 3년 이내에 마시기 좋지만, 고급 바르베라 와인은 병에서 더 오래 숙성할 수 있습니다.
갓 익은 바르베라로 와인을 만들면 붉은 과일과 블랙 베리 향이 풍부하게 나옵니다. 좀 더 무르익은 열매로 만들면 서양 자두와 블랙베리, 블랙 체리 향 같은 검은 과일 향이 주로 나오면서 산딸기와 블루베리 향도 가볍게 나오죠. 많은 와인 생산자가 그을린 오크통에서 바르베라 와인을 숙성합니다. 숙성되면서 와인은 복합성과 숙성 잠재력을 갖게 되고 바닐라 풍미도 나오게 되죠.
5. 바르베라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역시 향신료를 곁들인 토마토소스로 조리한 파스타와 피자 같은 이탈리아 음식이 제일 잘 맞습니다. 그밖에 어울리는 음식으로는 라타투이(Ratatouille)와 프로슈토(Prosiutto), 소고기 수프와 스튜, 체더(Cheddar) 치즈, 미트로프(Meatloaf), 버섯이나 소시지로 토핑한 피자, 양고기, 돼지고기, 스테이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