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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와인 역사

[역사] 칠레에서 부활한 보르도 포도, 까르메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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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https://cdn2.justwineapp.com/assets/article/2017/01/Carménère.jpg)

까르메네르(Carmenere)는 까베르네(Cabernet) 계열의 포도 중 하나로 까베르네 소비뇽과 까베르네 프랑, 메를로, 말벡, 쁘띠 베르도와 함께 프랑스 보르도가 원산지인 6개의 적포도 중 하나입니다. 보르도에서 까르메네르는 색이 짙은 와인을 만들 때 사용했으며, 때때로 쁘띠 베르도처럼 이국적인 향신료 향과 색, 탄닌을 보강하려고 다른 품종과 혼합하곤 했죠. 

까르메네르라는 이름은 진홍색(Crimson)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 "카민(Carmin)"에서 유래했으며 가을에 잎이 지기 전의 까르메네르 잎 색깔이 밝은 진홍색을 띠어서 붙은 것이랍니다. 이 포도는 역사적으로 보르도와 동의어로 사용된 "그랑드 비두르(Grande Vidure)"라는 이름도 갖고 있지만, 생산지와 관련된 혼란을 줄 수 있으므로 현행 EU 법규에는 EU 회원국이 이와 같은 이름을 쓴 칠레 와인을 수입하는 걸 금지합니다. 그래서 그랑 드 비두르란 이름을 쓴 까르메네르 와인은 찾아보기 힘들죠.

까르메네르는 가장 오래된 유럽종 포도 중 하나로 요즘 잘 알려진 다른 포도들의 선행 품종이라고 생각됩니다. 까르메네르가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진 까베르네 소비뇽의 클론(clone)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죠. 까르메네르의 이름이 옛날에는 까베르네 소비뇽의 클론 품종을 가리키는 보르도의 사투리인 "비두르(Vidure)"였다는 걸로 봐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까르메네르가 고대 로마 시대에 보르도에서 유명했던 도시 이름이면서 당시에 평판이 좋았던 포도인 "비투리카(Biturica)"일지도 모른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로마의 시인이자 생물학자였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Gaius Plinius Secundus)가 남긴 연구에 따르면 비투리카는 이베리아반도에서 기원한 포도로 오늘날 토스카나에서 산지오베제(Sangiovese)와 함께 인기 있는 포도인 프레디카토 디 비투리카(Predicato di Biturica)로 까르메네르가 바로 이 포도라는 거죠.

어쨌든 까르메네르의 원산지가 프랑스 보르도의 메독(Medoc)인 것은 확실하며 필록세라가 이 지역을 덮치기 전만 해도 남쪽의 그라브까지 이 포도를 널리 재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67년에 필록세라가 퍼지면서 유럽의 거의 모든 포도밭을 파괴한 후로 프랑스에서 까르메네르를 찾기는 매우 어려워졌죠. 몇십 년간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마침내 까르메네르가 멸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유럽의 와인 생산자들이 포도밭을 재건했을 때 찾기 힘들 뿐만 아니라 포도알이 제대로 익으려면 온화하고 건조한 날씨와 긴 시간이 필요한 까르메네르는 다른 포도보다 재배하기 까다로워서 더는 심지 않았습니다. 와인 생산자들은 더 다양하게 쓸 수 있고 재배할 때 실패할 가능성도 낮은 메를로 같은 포도를 선택했죠. 결국, 까르메네르는 프랑스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프랑스에서 까르메네르가 멸종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 칠레의 비냐 까르멘(Vina Carmen) 포도밭에서 메를로로 알고 재배했던 포도가 사실은 까르메네르란 것이 알려집니다. 칠레의 포도 재배자들은 거의 150년간 까르메네르를 의도하지 않은 체 보존했는데, 그것은 까르메네르가 메를로와 비슷했고 칠레의 재배자들은 이 둘을 파악할 만한 식견이 없었기 때문이죠.

19세기에 칠레에선 프랑스 보르도의 샤토를 모델로 삼아 포도원을 가꿨습니다. 1850년에 들어온 꺾꽂이(Cutting) 중에 까르메네르가 있었고 재배자들은 산티아고 주변의 계곡에 그 꺾꽂이를 심었습니다. 안데스산맥으로 둘러싸인 칠레의 지리적인 경계선과 성장기 동안 거의 내리지 않는 비 덕분에 재배자들은 까르메네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었고 필록세라도 퍼질 수 없었습니다. 까르메네르 꺾꽂이는 메를로와 종종 혼동을 일으켰고 재배자들은 20세기 내내 메를로와 함께 까르메네르를 수확하고 처리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기간에 수확한 메를로 중 50%가량은 아마 까르메네르였을 거로 추측합니다.

이런 사정으로 칠레산 메를로 와인은 다른 곳의 메를로 와인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줬습니다. 칠레의 포도 재배자들은 자신들이 재배하는 포도가 메를로와 뭔가 다르다고 눈치챘지만, 아마 메를로의 클론 품종일 거라 믿고 "메를로 셀렉션(Merlot selection)", 또는 칠레에 있는 뻬우모 밸리(Peumo Valley)의 이름을 따서 "메를로 뻬우말(Merlot Peumal)"로 불렀습니다. 그러던 중에 몽펠리에 대학 포도주학과의 쟝-미셸 부르시코(Jean-Michel Boursiquot) 교수는 1994년에 메를로와 비슷하지만, 더 빨리 열매 맺는 포도는 메를로가 아니라 보르도의 까르메네르라고 밝혀냅니다. 이 소식에 칠레 와인 생산자들은 흥분했고, 칠레 농무부는 1998년에 까르메네르를 독립된 품종으로 공식 인정합니다. 오늘날 까르메네르는 칠레의 꼴차구아 밸리(Colchagua Valley)와 라펠 밸리(Rapel Valley), 마이포 지방(Maipo Province)에서 주로 재배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원산지가 프랑스이지만, 프랑스에서는 까르메네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까르메네르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곳은 역시 남미의 칠레로 센트럴 밸리에서만 8,800헥타르가 넘는 포도밭에서 이 포도를 재배하죠. 칠레에선 까르메네르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데, 칠레 와인 산업이 성장하면서 더욱더 실험적인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까르메네르의 잠재력을 보완하고 특성을 끌어올리려고 다른 포도와 섞는 것으로 까베르네 소비뇽을 많이 혼합합니다.

(까델 보스꼬의 까르메네로입니다. 레이블에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를 그렸는데 다른 품종으로 알려졌던 까르메네르를 풍자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altissimoceto.it/Image/Salmoiraghi/carmenero.JPG)

1990년에 이탈리아에서도 칠레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까델 보스꼬 와이너리(Ca' del Bosco Winery)에서는 까베르네 프랑이라고 생각되는 포도나무를 프랑스 종묘상으로부터 들여왔습니다. 그러나 와인 생산자들은 그 포도가 색상과 향에서 전통적인 까베르네 프랑과 다르다는 걸 눈치챘고, 까베르네 프랑보다 더 일찍 열매를 맺는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자 다른 이탈리아 와인 생산지에서도 이 포도를 의심했고 마침내 까르메네르라는 것을 밝혀냅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까르메네르는 브레스키아(Brescia)부터 프리울리(Friuli)에 이르는 북동부 지역에서만 주로 재배하며, 이탈리아 국정 포도 품종 카탈로그에도 최근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로부터 까르메네르를 사용하도록 허가받은 지역은 없고, 까르메네르로 와인을 만들어도 원래 이름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품종으로 기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더구나 레이블에 IGT나 DOC, DOCG 같은 등급을 표시하는 와인에는 절대로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까델 보스꼬 와이너리에선 까르메네르로 만든 와인에 "까르메네로(Carmenero)"란 이름을 붙였죠. 2007년에 이르러서야 까르메네르는 베네토(Veneto)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Friuli-Venezia Giulia), 사르디니아(Sardinia)에서 DOC 등급의 와인을 만들 때 쓸 수 있는 허가를 받았을 뿐입니다.

까르메네르와 메를로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같은 품종으로 오인되었을까요? 두 포도는 수 세기 동안 외관이 유사하다고 인정받은 만큼 겉모습이 비슷합니다. 유전학적으로도 까르메네르는 메를로와 멀리나마 서로 연결되어 있죠.

그러나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품종 사이에 약간 눈에 띄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까르메네르는 잎이 막 자라날 무렵에 잎 아래쪽이 붉은색을 띠지만, 메를로는 흰색을 띱니다. 잎 모양도 메를로는 중앙의 돌출부가 조금 더 긴 미세한 차이점이 있죠. 열매를 맺는 것은 까르메네르가 빠르지만, 완전히 익는 것은 메를로가 2~3주 정도 빠릅니다. 그래서 까르메네르는 열매가 맺은 다음 다 익기까지 가장 오래 걸리는 품종 중 하나입니다. 

(까르메네르와 메를로. 이미지 출처 : https://i.pinimg.com/originals/ae/a6/40/aea640b77ff9ad11b04a2bf54cb8741b.jpg)

이런 이유로 까르메네르와 메를로를 함께 심은 곳에선 수확 시기가 두 포도를 혼합해서 만드는 와인의 특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까르메네르가 충분히 익었을 때 수확하면 메를로가 너무 익어서 와인은 잼 같은 풍미가 날 겁니다. 반대로 메를로가 잘 익었을 때 수확하면 덜 익은 까르메네르 때문에 와인은 피망 같은 식물성 풍미가 강할 거고요. 그래서 메를로와 까르메네르는 종종 혼동되지만, 결코 같은 품종이라고 볼 수 없죠.

까르메네르 와인은 심홍색 빛을 띠며 붉은 과일과 장과류의 과일, 풋풋하고 매콤한 향신료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탄닌은 까베르네 소비뇽보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며, 대개 미디엄 바디의 질감과 무게감이 있습니다. 대개 다른 포도와 혼합하지만, 아주 잘 익어서 체리 같은 붉은 과일, 그을린 나무, 향신료, 구수한 흙 향이 나오고 깊은 진홍색을 띨 수 있다면, 오로지 까르메네르만 사용한 와인도 만듭니다. 까르메네르의 풍미 중에는 다크 초콜릿과 담배, 가죽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있죠. 까르메네르 와인은 숙성하지 않고 바로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 자료>

1. 휴 존슨, 젠시스 로빈슨 저, 세종서적 편집부, 인트랜스 번역원 역, 와인 아틀라스(The World Atlas of Wine), 서울 : 세종서적(주), 2009

2. 크리스토퍼 필덴, 와인과 스피리츠 세계의 탐구(Exploring the World of Wines and Spirits), 서울 : WSET 코리아, 2005

3. 영문 위키피디아 까르메네르 항목

4. 까델 보스꼬(Ca' del Bosco) 홈페이지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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