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아르헨티나] 순대와 궁합이 잘 맞는 와인? - Finca La Celia Piedra del Aguila Malbec Rose 2006

까브드맹 2011. 1. 13. 17:25

핀카 라 셀리아 삐에드라 델 아길라 말벡 로제 2006

1. 와인과 순대

우리나라에선 와인을 마실 때 와인만 마시거나 간단한 안주를 곁들이는 일이 많지만, 유럽에서 와인은 식사의 한 부분으로 음식과 함께 마시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국내 와인 애호가 중에선 음식, 특히 한식과 와인의 궁합을 탐구하는 분들이 많죠. 이분들은 기회만 되면 식당에 와인을 들고 가서 사장님의 양해를 얻고 음식과 와인의 마리아쥬를 실험해 보곤 합니다. 이분들의 노력으로 알게 된 한식과 와인의 궁합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죠.

① 황구수육(黃狗水肉)에는 북부 론(Northern Rhone)지역의 시라(Syrah)가 최고, 그다음이 호주 쉬라즈(Shiraz)

② 민물장어에는 와인보다 역시 복분자

③ 매콤한 양념치킨이나 생선찜 요리에는 새콤달콤한 독일 리슬링(Riesling)

④ 생선회에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등등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먹는 음식 중에서 와인과 함께 마시기에 은근히 까다로운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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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는 흔히 동물성 음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순대의 정의는 "돼지 곱창에 당면을 담고 선지로 맛과 색깔을 내어 수증기에 쪄낸 음식"입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당면 대신 다진 돼지고기를 넣기도 하고 양파 같은 채소를 더 넣기도 하지만, 일단 육식성인 돼지 곱창에 식물성인 당면, 찹쌀, 양파 같은 음식이 섞여 있는 음식이죠. 그래서 화이트 와인이든 레드 와인이든 어느 쪽으로도 맞추기 힘듭니다. 차라리 육식과 채식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음식이라면 와인과 맞추기 쉽겠지만, 그렇지 않은 게 순대의 딜레마입니다. 묵직한 레드 와인과 함께 먹으면 순대가 눌리고,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으면 순대의 풍미에 가벼운 화이트 와인은 밀리거든요. 차라리 순댓국이나 순대 전골이라면 뜨거운 맛과 향신료 때문에 시라나 그르나슈 같은 레드 와인이 어울리겠지만요.

하지만 로제 와인은 레드와 화이트 와인 양쪽의 성질을 조금씩 갖고 있어서 동식물성 재료가 섞인 순대와 잘 어울립니다. 돼지고기와 궁합이 잘 맞아서 서양에서는 종종 돼지고기에 로제 와인을 함께 마시곤 하죠. 이런 로제 와인의 특성 때문에 돼지의 창자에 식물성 재료를 넣어서 만드는 순대는 로제 와인과 잘 맞는 구석이 있습니다. 당면이 많은 서울식 순대에 레드 와인만큼 풍미가 강하지 않은 로제 와인은 순대의 맛을 억누르지 않으면서 조화된 맛을 보여주고 함께 나오는 내장과 간의 풍미에 뒤지지 않는 힘을 갖고 있죠. 그래서 100%의 궁합을 보여주진 않아도 레드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보다 훨씬 그럴듯한 마리아쥬를 보여주죠. 실제로 아르헨티나 멘도사(Mendoza)의 말벡(Malbec) 포도로 만든 삐에드라 델 아길라(Piedra del Aguila) 로제 와인과 순대를 함께 먹었을 때 상당히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2. 와인의 맛과 향

색은 맑고 깨끗하며 연한 갈색입니다. 마치 타우니 포트 와인을 약간 묽게 하면 나올 것 같은 색입니다. 로제 와인치고는 이례적으로 진한 색이며 잘 마른 곶감이 떠오릅니다. 향은 풍부하진 않아도 코안을 자극할 만큼 충분히 피어오릅니다. 잘 말린 과일에서 나오는 약간 달콤한 향이 함께하는 붉은 과일 향으로 깨끗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깨끗하고 깔끔한 질감을 가졌습니다. 약한 산미와 더불어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이 인상적인데 마치 칼로 깎아낸 것처럼 깨끗한 느낌입니다. 이런 맛 때문에 안주 없이 가볍게 마셔도 좋지만, 양념을 안 한 삶은 고기, 예를 들어 순대와 내장과 궁합이 잘 맞습니다. 가벼운 산미가 살짝 꼬릿 한 풍미가 나는 삶은 고기의 잡맛을 깨끗이 씻어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초반에는 깔끔한 맛이 주로 나오지만, 나중엔 맛과 향이 점점 강해집니다. 가볍게 마시는 값싼 로제 와인답게 여운은 바로 사라집니다. 가벼운 향과 산뜻한 질감, 약간의 산미와 깨끗한 맛, 짧게 끊어지는 여운이 잘 어울려서 편하고 마시기 쉽습니다.

깊은 맛이 나는 건 아니지만, 1만 원 후반~2만 원 초반의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부담 없이 편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 삼겹살, 돼지고기 수육, 닭백숙 같은 닭고기 요리, 차가운 햄, 순대, 잡채, 고기와 채소가 섞여 있는 요리 등과 잘 맞습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D+로 맛과 향이 부족한 와인입니다. 2011년 1월 6일 시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