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와인을 만들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선택한 포도가 리슬링(Riesling)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와인을 만들려고 시도했을 때 고른 포도도 역시 리슬링이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양조용 포도로 리슬링을 선택한 것은 리슬링이 추운 날씨에도 강건하게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리슬링의 뿌리는 영하 20℃의 추위도 견디는 강한 내한성이 있어서 겨울 날씨가 매서운 독일에서 주로 재배하지만, 호주의 일부 지역에서도 훌륭한 리슬링 와인이 나옵니다.
1. 리슬링의 특성
1) 리슬링과 변종 품종
독일의 와인 학자들은 리슬링을 바탕으로 많은 변종을 만들었습니다. 만생종인 리슬링은 완전히 익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독일의 쌀쌀한 가을 날씨를 생각할 때 포도 수확 시기는 늘 문제였기 때문이죠. 양조용인 유럽종 포도가 충분히 익을 수 있는 기후의 북방 한계선에 있는 독일에선 어떻게 하면 햇볕을 더 많이 받도록 해서 포도가 잘 익게 할 것인지가 큰 고민거리입니다. 그래서 햇볕을 가장 많이 받는 땅 중에서 토양이나 지표층의 반사율이 높은 곳, 큰 바위로 둘러싸여 있어서 열의 보관과 방사가 쉬운 곳, 차가운 안개가 덜 끼는 곳 등에 어김없이 리슬링을 재배하죠.
또한 위의 걱정거리를 해결하려고 리슬링과 실바너(Sylvaner)의 교잡종인 뮐러 투르가우(Muller-Thurgau)처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익는 리슬링 변종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더 빨리 익는 뮐러 투르가우는 가을 추위와 습기에 대한 걱정을 리슬링보다 덜 해도 되죠. 독일에선 이런 변종들을 리슬링보다 더 많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여 종이나 되는 리슬링 변종 중에서 질적으로 고상하고 섬세한 리슬링을 따라가는 품종은 없습니다. 오로지 리슬링만이 최후의 완숙 단계에서도 충분한 당분과 함께 "합당한 산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능력은 늦게 수확한 포도로 스위트 와인을 만들 때 더욱 빛이 납니다.
2) 리슬링으로 만드는 스위트 와인
독일은 늦가을이 덥고 낮엔 건조하지 않으며, 리슬링의 껍질이 워낙 튼튼해서 프랑스의 소테른(Sauternes)처럼 포도에 귀부(貴腐, Botrytis) 현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귀부 현상이 발생한 리슬링으로 만든 스위트 와인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미묘한 향과 맛이 나옵니다.
스위트 와인 생산을 위해 포도를 늦게 수확하는 일이 많아서 흥미 있는 규칙도 많습니다, 유명한 산-니콜라우스 와인(St-Nikolaus Wein)을 만들려면 12월 6일에 수확하고, 크리스마스 와인(Christwein)을 만들려면 12월 24일에 수확해야 합니다. 드레이쾨니히 와인(Dreikonigswein)을 만들기 위해 이듬해 1월 6일에 수확하기도 하죠. 이렇게 늦게 수확해도 리슬링은 강하고 고결한 산도가 있어서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초기의 신선한 느낌과 세월의 무게를 동시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으로서 리슬링 와인의 가치입니다.
3) 리슬링과 소비뇽 블랑
리슬링은 곧잘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비교되곤 합니다. 이 두 품종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둘 다 향이 풍부하고 일정한 산도가 주는 신선한 맛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여 시음해 보면, 리슬링이 소비뇽 블랑보다 꽃향기와 과일 풍미가 더 풍부하고, 맛이 더 달콤한 걸 알아챌 수 있습니다. 장기 숙성 능력을 갖추고 있는 점에서도 리슬링 와인은 소비뇽 블랑 와인과 크게 대조됩니다.
2. 리슬링의 역사
리슬링의 원산지는 독일 라인(Rhine)강 유역입니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15세기에 처음 리슬링에 관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15세기를 기점으로 유럽 각지에서 폭넓게 재배되기 시작한 리슬링은 1716년경부터 라인가우 지방에서 단일 품종 와인으로 만들어졌고,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샤르도네(Chardonnay)가 누리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DNA 조사 결과 리슬링의 부모 품종으로 밝혀진 포도 중 하나는 지금은 거의 재배하지 않지만, 중세 프랑스와 독일에서 널리 재배했던 구애 블랑(Gouais blanc)입니다. 독일어로는 바이써 허니쉬(Weißer Heunisch)라고 하죠. 또 하나의 부모 품종은 야생 포도와 트라미너(Traminer)의 교배종으로 추측되는 포도입니다. 바이써 허니쉬와 트라미너 모두 독일에서 오랫동안 재배했던 포도들로 학자들은 리슬링이 라인강 부근에서 둘 사이의 교배종으로 탄생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3. 리슬링 포도 재배지
최고의 떼루아(Terroir)는 역시 독일이지만, 리슬링은 세계 각국에서 잘 자랍니다. 프랑스 알자스(Alsace), 오스트리아, 호주 에덴 밸리(Eden Valley)와 클레어 밸리(Clare Valley)에서 뛰어난 리슬링 와인을 생산합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워싱턴주, 동부 지역과 캐나다, 뉴질랜드, 칠레, 남아프리카 공화국, 동부 유럽 등지에서도 각지의 기후와 토양에 따라 리슬링 와인은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온대 기후에선 화이트 와인으로서의 매력을 보여주기엔 바디가 조금 무겁고, 반대로 한대 기후에선 완전히 익지 못해 풋풋한 풀 냄새가 나곤 하죠.
독일산 리슬링 와인은 단맛이, 프랑스와 호주산은 드라이한 맛이 납니다. 풍부한 산미는 양쪽 모두의 특징이죠. 풍부한 산미는 리슬링 와인을 화이트 와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보관하고 숙성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리슬링 와인은 출시 후 바로 마셔도 좋지만, 오래 보관해 뒀다가 마셔도 신선한 맛이 납니다.
1) 프랑스
알자스에서는 리슬링으로 근사한 와인을 생산합니다. 이곳의 리슬링 와인은 독일산보다 산미가 좀 더 강하고 대부분 아주 드라이합니다. 알자스의 고급 리슬링 와인은 견고한 구조와 복잡미묘한 향이 아주 대단하죠. 알자스의 자랑인 그랑 크뤼 포도밭 50여 개는 대부분 리슬링이 자리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2) 호주
호주산 리슬링 와인은 독일산처럼 달지 않고 알자스산처럼 향이 복잡하지 않지만, 맛과 향이 아주 깨끗하고 깔끔합니다.
4. 리슬링 와인의 향
리슬링 와인에선 레몬과 사과, 살구, 시트러스, 라임, 복숭아, 리이치 같은 과일과 미네랄 향이 많이 나옵니다. 스위트 와인은 꿀 내음이 풍성하죠.
가장 특징적인 향은 석유(Petrol) 향입니다. 리슬링 와인은 숙성하면서 많든 적든 석유 향을 풍깁니다. 노골적인 석유 향부터 무척 근사한 석유 향까지 와인마다 느낌이 조금씩 다르죠. 그 외에 인동덩굴(Honeysuckle), 제라늄(Geranium), 엘더 플라워(Elder Flower), 감초, 자갈, 석판 등등 다양한 향을 풍깁니다.
5. 리슬링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생선과 해산물, 닭, 돼지고기 등이 잘 어울립니다. 리슬링 와인은 한식이든 중식이든 일식이든 아시아 음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맛이 납니다. 고추와 마늘 같은 매운 양념, 신선한 허브, 후추 같은 강렬한 향신료를 넣은 음식과 먹어도 좋죠. 심지어 와인과 상극이라는 간장을 넣은 음식도 맞는 편입니다. 찌거나 오븐에 구운 음식은 물론이고 생선회도 좋습니다.
달콤한 리슬링 와인은 인도와 동남아, 중국, 우리나라의 매콤한 음식과 잘 맞습니다. 김치찌개와 닭도리탕도 잘 맞고, 양념치킨과 먹을 땐 제일 먼저 추천해 줄 만합니다. 단맛이 적은 드라이한 리슬링 와인은 상큼한 샐러드와 갑각류가 잘 맞죠. 아주 달콤한 리슬링 와인은 디저트 대신 마셔도 좋고 블루치즈처럼 맛이 진한 치즈나 생크림과 버터가 많이 들어간 기름진 음식과 조화를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