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라브의 지리와 토양
그라브는 나중에 지롱드 강에 합쳐지는 가론(Garonne) 강의 북쪽 강변과 접한 와인 생산지입니다. 하위 와인 생산지로 페싹-레오냥(Pessac-Léognan)과 쏘테른(Sauternes), 바르삭(Barsac)이 있죠. 토양엔 자갈이 매우 많은 걸로 유명하고, 지역 이름도 자갈을 뜻하는 ‘Grav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자갈들은 빙하시대의 빙하 때문에 퇴적된 것으로 석영 함량이 많으며, 최고급 와인이 생산되는 일부 밭의 흙에는 이런 자갈이 많이 깔려 있습니다.
2. 그라브의 역사
그라브는 영국에서 보르도 와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클라레(claret)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라브가 속한 아퀴텐의 여공작 엘레아노르(Eleanor of Aquitaine)와 영국 왕 헨리 2세(Henry II)가 결혼하면서 두 국가 사이의 무역이 급증했고, 이때 아퀴텐의 와인과 영국의 철과 석탄은 주요 교역품이었죠. 중세 시대에 영국으로 수출된 최초의 와인은 그라브에서 생산되었습니다. 당시 보르도시 북쪽의 메독 지역은 습지여서 포도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그라브 지역은 배수가 잘되어서 포도 농사에 알맞았기 때문이죠.
14세기 무렵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가 세운 샤토 빠프 클레망(Château Pape Clément)은 보르도 최초로 샤토(chateaux)한 명칭을 붙인 와이너리입니다. 영국의 해군 대신이었던 사무엘 피입스(Samuel Pepys)의 언급에 따르면 샤토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이 런던에서 최초로 기록된 클라레 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그를 따르는 미국인들조차 그라브 와인이 보르도에서 가장 고급 와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네덜란드인들이 메독 지역을 간척하면서 메독이 가장 중요한 와인 생산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1855년 보르도 와인 공식 분류(Bordeaux Wine Official Classification of 1855) 1등급 와인에 그라브 와인으로는 오로지 샤토 오-브리옹만 들어가게 되죠. 나머지 1등급 와인과 2, 3, 4, 5등급 와인에는 오-메독과 오-메독의 하위 생산지의 와인들만 들어갑니다.
샤토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이 1855년 보르도 공식 와인 등급에 들어있긴 하지만, 그라브의 와인 생산자들은 1953년에 자체적으로 레드 와인을 위한 공식 등급을 제정했습니다. 1959년에는 화이트 와인도 등급에 포함시켜 리스트를 갱신했죠. 이 와인들의 레이블에는 'Grand Cru Classé de Graves'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3. 그라브 와인 생산지
그라브에서는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골고루 생산하며 두 종류의 와인을 함께 생산하는 샤토도 많습니다. 와인 레이블에는 ‘Graves’라는 지역 명칭이 표시되죠. 하지만 아래의 하위 생산지에서 만드는 와인은 레이블에 하위 생산지의 지명을 표시합니다.
1) 그라브 AOC
이곳에서 생산하는 레드와 화이트 와인에는 'Graves'라는 지역 명칭이 붙습니다. 중세시대엔 습지였던 메독 지역과 달리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았던 그라브 지역은 오늘날 보르도의 중산층과 보르도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현대식 고층 건물이 밀집한 곳입니다, 그래서 샤토 오-브리옹을 비롯한 많은 샤토가 도심지에 있죠. 2004년 기준으로 3,100헥타르의 포도밭이 있습니다.
2) 그라브 쉬뻬리에르(Graves Supérieures) AOC
그라브 AOC에서 생산하는 스위트 화이트 와인에 붙은 지역 명칭입니다. 와인은 일반적으로 세론 AOC의 와인보다 단순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2004년 기준으로 500헥타르의 포도밭이 있습니다.
3) 페싹-레오냥 AOC
보르도시 정남 쪽에 있는 생산지로 1855년 1등급 와인인 샤토 오-브리옹이 있는 곳입니다. 또한 샤토 오-브리옹과 함께 1953년 그라브 지역 공식 등급 와인에 선정된 샤토 라 미숑 오-브리옹(Château La Mission Haut-Brion)과 샤토 라빌르 오-브리옹(Château Laville Haut-Brion)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와인뿐만 아니라 소나무도 유명해서 포도밭의 경계가 종종 나무 숲으로 구분될 정도입니다. 그라브처럼 토양에 자갈이 많지만 지질학적으로 다른 시기의 퇴적물도 쌓여있습니다.
1987년 별도의 AOC로 지정되었고, 이곳에서 생산하는 레드와 화이트 와인의 레이블에는 ‘Pessac-Léognan’이라는 지역 명칭을 표시합니다. 1959년 그라브 지역 공식 등급에 선정된 모든 와인이 이곳에 있을 만큼 훌륭한 와인 생산지이죠.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가장 많이 재배하고, 메를로(Merlot)를 다음으로 많이 재배합니다. 청포도는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쎄미용(Sémillon)을 많이 재배하죠. 화이트 와인은 오크통에서 발효하며 효모 앙금인 리(lees)를 오랫동안 함께 숙성시킵니다.
4) 쏘테른 & 바르삭
쏘테른은 매우 달콤한 화이트 디져트 와인으로 유명합니다. 대표적인 와인으로는 1855년 보르도 공식 와인 등급에서 화이트 와인으로는 유일하게 특 1등급에 선정된 샤토 디껨(Château d'Yquem)을 들 수 있죠. 바르삭에서 생산하는 샤토 클리앙(Château Climens)과 샤토 꾸테(Château Coutet) 같은 1등급 와인은 레이블에 생산하는 마을과 ‘Sauternes’ 중 아무것이나 지역 명칭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쏘테른 와인의 강렬한 단맛은 보통 노블 롯(noble rot)이라 부르는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 곰팡이 때문에 만들어집니다. 가을이 되면 쏘테른 일대를 흐르는 시론(Ciron) 강 주변은 동트기 전까지 안개로 뒤덮입니다. 이러한 조건은 포도 껍질에 곰팡이가 번식하기 좋게 해 주죠. 곰팡이는 포도 껍질에 구멍을 뚫고, 포도알의 수분은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그 구멍을 통해서 증발합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포도알이 쪼그라들면서 당분이 농축되죠. 이렇게 쪼그라든 포도를 발효하면 매우 달콤한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포도가 쪼그라들면서 생산량도 함께 줄어들게 됩니다. 더욱이 포도 알마다 곰팡이의 번식과 건조 상태가 다르기에 일꾼들은 9월에서 11월까지 몇 차례나 포도밭을 왕복하면서 가장 알맞은 상태의 포도알을 일일이 손으로 따서 수확해야 하죠. 그 결과 쏘테른 와인의 생산비는 다른 보르도 와인보다 5~6배가량 올라가게 됩니다. 자그마한 오크통에서 와인을 발효하는 것도 비용 상승의 원인 중 하나이고요. 그래서 375ml짜리 1등급 와인의 가격이 수백 달러가 되어도 와인 생산자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손익 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작황이 아주 안 좋은 해에는 많은 와인 생산자가 와인 생산을 포기할 정도였답니다. 참고로 샤토 디껨의 생산량은 100 헥타르 당 1,000명 미만이며, 오-메독의 1등급 그랑 크뤼 와인은 같은 면적에서 5~6배를 생산합니다.
이곳에서 재배하는 주요 포도는 귀부 현상이 잘 일어나 와인의 단맛을 늘려주는 쎄미용, 산도가 높아서 단맛과 균형을 이루게 해주는 소비뇽 블랑, 와인에 꽃과 포도 향을 보태주는 무스까델(Muscadelle)입니다.
5) 세론(Cérons) AOC
쏘테른과 비슷한 스위트 화이트 와인 생산지입니다. 등급에 속한 와인이 없어서 쏘테른 와인보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그라브 쉬뻬리에르 AOC 와인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