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프랑스] 25년이란 긴 세월 속에서 무르익은 맛과 향 - Château Bel Air Lagrave 1995

까브드맹 2020. 12. 31. 22:06

Château Bel Air Lagrave 1995

샤토 벨 에어 라그라브(Château Bel Air Lagrave) 1995는 프랑스 보르도(Bordeaux)의 오-메독(Haut-Medoc)에 있는 물리(Moulis) AOC에서 재배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Merlot) 포도로 만든 크뤼 부르조아(Cru Bourgeois) 등급의 레드 와인입니다.

1. 장기 숙성 와인

"와인은 오래 보관할수록 맛이 좋아진다."라고 알고 있는 분이 많지만, 이것은 일부 와인에만 해당하는 말입니다. 병에 담은 후 2~3년 내에 마셔야 하는 와인이 오래 보관할수록 맛있어지는 와인보다 훨씬 많죠. 오랜 시간 속에서 맛과 향이 좋아지는 와인은 전체 와인 중 극히 일부일 뿐이며, 이런 와인을 "뱅 드 가르드(Vin de Garde, 숙성용 와인)"라고 합니다. 뱅 드 가르드는 숙성과 함께 품질이 좋아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와인을 뜻하며, 길고 긴 와인 역사에서 뱅 드 가르드가 출현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흔히 올드 빈티지(Old Vintage), 줄여서 올빈 와인을 찾지만, 제대로 올빈 와인이 되려면 와인에 숙성 잠재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와인이나 오래되었다고 좋아지지 않으며 뱅 드 가르드의 특징을 가진 와인이어야 하죠.

좋은 보르도 와인, 특히 레드 와인은 알맞은 환경에서 적어도 5~10년 이상 지나야 맛과 향이 제대로 나오며, 10~20년은 되어야 맛과 향이 완성됩니다. 물론 그랑 크뤼 와인일수록 그 시기는 더 늦춰지며, 더 오래도록 아름다운 맛과 향을 뽐내죠. 마시기엔 이른 보르도 레드 와인의 맛과 향을 디캔터로 끌어낼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천천히 숙성해서 제 시기에 마시는 와인의 맛과 향을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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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인 생산자

최근 샤토의 지하 셀러에서 장시간에 걸쳐 천천히 익은 와인이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경제적인 가격에 잘 익은 보르도 와인을 맛볼 수 있게 되었죠. 샤토 벨 에어 라그라브 1995도 그런 와인입니다.

오-메독의 물리 마을에 있는 샤토 벨 에어 라그라브는 세갱-바케(Seguin-Bacquey) 가문이 150년 동안 가꿔온 샤토입니다. 세갱-바케 가문은 인근에 있는 라 클로세리 뒤 그랑 뿌죠(La Closerie du Grand Poujeaux)도 갖고 있죠. 포도밭 면적은 9헥타르 정도로 품종 비율은 까베르네 소비뇽 60%, 메를로 35%,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5%입니다.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30년 정도로 제초제와 화학 비료의 사용은 제한하고 수확량은 최대한 적게 하죠.

와인은 손으로 수확한 포도를 온도 조절되는 탱크에서 양조하며 오크 숙성 기간은 18~20개월입니다. 숙성할 때 새 오크통 비율은 35~50%이죠. 샤토를 대표하는 그랑 뱅으로는 크뤼 부르주아 등급인 샤토 벨 에어 라그라브가 있고, 세컨드 와인으로 샤토 페이비뉴(Château Peyvigneau)가 있습니다. 매년 생산량은 5,000 상자 정도입니다.

샤토 벨 에어 라그라브 1995 빈티지는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6:4 비율로 사용했고, 새 오크통을 1/3 사용해서 18개월간 숙성했습니다. 1995년의 와인 스펙테이터 빈티지 점수는 95점으로 꽤 높고, 더 보관할 수 있지만 지금 마셔도 좋습니다.

 

 

3. 와인의 맛과 향

Château Bel Air Lagrave 1995의 코르크

코르크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보관 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다만 오랜 숙성으로 앙금이 생겼기 때문에 마시기 전에 적어도 2시간 이상, 되도록 하루 전에 병을 세워둬서 앙금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Château Bel Air Lagrave 1995의 색

중간 농도의 루비색입니다. 가죽 향과 함께 블랙베리와 프룬 같은 검은 과일 향이 풍성하게 나옵니다. 향신료와 은은한 오크, 구수한 부엽토, 감초, 한약재 향이 나오고 정향과 크레졸 같은 화학적인 향도 있습니다. 이윽고 삼나무와 마구간 냄새가 나오고 블랙커런트 향도 은근히 퍼집니다. 박하처럼 시원한 허브와 강배전으로 볶은 커피콩 향도 풍기네요.

부드러우면서 탄탄하고 마신 후엔 탄닌 기운이 강건하게 이어집니다. 묵직한 구조는 제법 크게 느껴집니다.

드라이하며 그윽한 나무의 매끈한 기운이 입안을 훑고 지나갑니다. 검은 과일의 산미가 풍성하고 흑연과 오크 풍미가 느껴지네요. 점점 탄닌 기운이 가라앉으면서 검은 과일 풍미가 강해집니다. 구수한 부엽토와 한약재, 굉장히 다양한 숙성 향, 기분 좋은 씁쓸한 맛이 좋군요.

97년에 병에 담긴 후 23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기운이 좋고 알코올은 와인에 힘을 줍니다. 마시면서 질감이 점점 얇아지지만 그만큼 섬세해지며, 맑고 깨끗한 나무 느낌이 두드러집니다. 여운은 무척 길게 이어지며, 검은 과일과 그을린 나무, 부엽토, 크레졸 같은 숙성 풍미가 강하고 남습니다.

 

 

검은 과일의 묵직하고 풍부한 산미와 아직도 강건하면서 마시는 동안 점점 매끄러워지는 탄닌의 균형이 훌륭합니다. 12.5% 이지만 강하게 느껴지는 알코올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와인에 강한 힘을 줍니다. 검은 과일부터 오크, 그을린 나무, 부엽토, 흑연, 화학적 느낌 등등 굉장히 다양하고 맛있는 향과 풍미는 잘 익은 보르도 물리의 와인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네요.

지금 마시기 좋은 상태로 오픈하고 적어도 2시간 정도 즐겁게 마실 수 있습니다. 부케(bouquet)라고 부르는 와인의 숙성 향이 어떤 건지 제대로 느껴보고 싶은 분께 추천합니다.

함께 먹기 좋은 음식은 소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 언양 불고기, 후추와 허브로 간한 양고기, 갈비찜과 뵈프 부르기뇽 같은 고기찜 요리, 미트 스튜, 돼지 등갈비 구이, 숙성치즈 등입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A-로 비싸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마셔봐야 할 뛰어난 와인입니다. 2020년 12월 29일 시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