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프랑스] 소년 살해? - Chateau Mouton-Rothschild 2003

까브드맹 2010. 1. 2. 10:08

샤토 무통 로칠드 2003

1. 샤토 무통 로칠드 2003

신의 물방울 2권에는 와인 스노비즘에 빠진 카메라맨 츠키야마가 1855 보르도 와인 공식 1등급(Premier Grand Cru Classe) 와인인 샤토 무통-로칠드 2000년을 토미네 잇세의 의동생인 세라에게 마시게 하고 평을 물어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세라는 다음과 같이 답하죠.

'유아 살해'

뒤이은 장면에선 '태아 살해'라고 평을 정정하는데, 저도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09년 12월 31일에 샤토 무통-로칠드 2003년을 마실 기회가 있었습니다. 보르도 오-메독(Haut-Medoc) 지역의 뽀이약(Pauillac) 마을에 있는 샤토 무통-로칠드는 해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으로 레이블을 꾸미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2003년에는 샤토 무통-로칠드 150주년을 기념해서 1853년의 샤토 매입 계약서를 배경으로, 창업주인 나다니엘 드 로칠드(Nathaniel de Rothschild)남작의 사진이 들어가 있습니다. 보르도의 2003년은 한때 그레이트 빈티지라고 평가되었던 해입니다. 그래서 보르도 2003 빈티지는 출하되기 전부터 이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었죠. 하지만 그 후 다시 재평가되어 훌륭한 빈티지이기는 하지만 그레이트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요즘의 평가입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와인 가이드지인 '르 귀드 하슈테 데 뱅(Le Guide Hachette des vins)'에서는 2003년에 대해 2001년과 같은 15/20점을 주었죠.

여러 명이 한 병을 나눠 마셨기에 제가 마신 양은 이나오(INAO)잔으로도 정량에 좀 못 미칠 정도로 적었습니다. 그리고 셀러에서 바로 가져왔기 때문에 마시기엔 아직 너무 차가웠죠. 그래서 첫 향을 맡고 잠시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온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잠깐 맡은 첫 향으로도 매우 놀랍더군요. 여러 향이 매우 농축되어 들어있는 듯한 느낌. 이 와인이 보여줄 세계에 대해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반응형

 

2. 와인 시음기

한 5분쯤 지나서 슬슬 향을 맡아봤습니다. 부드럽고 살짝 달착지근한 산딸기 향, 거기에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의 특징적인 향인 블랙커런트, 그리고 감초인듯 단 내음. 이어서 오크 같은 나무 향이 부드럽게 올라오고 밀키(milky)한 부드러운 향도 퍼져나오더군요. 그런데 이러한 향들이 한 번의 느낌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뒤섞이고, 어울리고, 앞다투어 흘러나왔습니다. 처음 향을 맡을 때 틀리고, 두 번째 맡을 때 틀리고, 세 번째 맡을 때 틀리고... 짧은 순간에 그토록 향이 천변만화하다니... 오, 정말 놀랍더군요. 보르도 오-메독 지역의 고급 레드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향들이 총동원되어 뿜어져 나오는 듯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작은 잔에 따라진 적은

양으로도 이만한 향을 뿜어내는데, 최고의 시기에 충분한 큰 잔으로 마신다면 얼마나 향이 훌륭할지... 한 편으론 기쁘고 또 한 편으론 좀 아쉽더군요.

향을 맡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입안에 첫 모금을 넣어서 돌려보았습니다. 후~~~ 예상은 했습니다만, 맛은 향에 너무 못 미치더군요. 떫거나 쓰지는 않으면서 견고하고 의외로 부드러웠으며 여운은 길디길었습니다만,

'엥? 이게 뭐야!'

하는 맛이었습니다. 아직은 정말 어리다는 느낌? 오-메독의 고급 와인을 처음 따서 바로 마셨을 때 느끼는 약간은 덜 익고 덜 풀린 그런 맛이더군요. 시간이 좀 지나고 잔을 돌려주면 나아지려나 해서 틈틈이 잔을 돌리고 마시고 싶은 욕구를 최대한 참으며 기다렸지만, 마지막 한 방울을 마실 때까지 맛은 전혀 나아지지 않더군요. 물론 호랑이 새끼는 새끼라도 호랑이 듯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장래 거인으로 성장할 만한 볼륨감과 잠재력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 당장 마시라는 조건으로 와인을 선택해야 한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맛이었습니다.

 

 

다 마시고 난 후의 느낌은 '소년 살해'. 네 정말 그렇습니다. 몇 년 전에 시음회에서 비슷한 양으로 샤토 무통-로칠드 1997년을 마시고 난 후 두 번째입니다만, 어느 정도 와인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상태에서 마신 첫 번째 샤토 무통-로칠드 시음은 애석하게도 장래가 기대되는 소년(?)을 미리 마셔버린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적어도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와인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샤토 무통-로칠드 2003년을 마실 기회가 온다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장래가 촉망되었던 소년이 얼마나 훌륭하게 자라났는지 지난날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번 마셔보고 싶군요.

참고로 샤토 무통 로칠드 2003년의 블렌딩 비율은 까베르네 소비뇽 76%, 메를로(Merlot) 14%,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8%,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2%이며, 어울리는 음식으로는 소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 양갈비, 소고기 등심 등 붉은 육류로 만든 요리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