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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한 매력과 중독성의 평양 냉면집 - 필동면옥

까브드맹 2010. 10. 10. 14:41

냉면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의 독특한 전통 면요리 입니다. 많은 나라의 면요리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사용한 육수로 맛을 내지만, 그걸 차갑게 내놓는 곳은 거의 없죠. 여름철에 중국집에서 맛볼 수 있는 중국식 냉면은 정작 중국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라고 합니다. 중국냉면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본의 화교가 일본에서 차가운 면요리를 먹는 것을 보고 개발했다는 설과 조선족들이 냉면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 냉면을 중국화한 것이라는 설, 또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냉면을 선호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화된 중국 음식으로 개발했다는 설 등등 다양한 얘기가 있습니다만,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일본과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를 볼 때 중국 냉면의 역사가 아무리 길어도 100여년에 넘지 못한다는 것이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가운 면요리는 일본에도 많이 있으며 소바(메밀국수)나 냉우동 등이 대표적인 요리이지요. 하지만 모두 어패류를 기본으로 한 육수를 사용합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사용한 육수를 쓰는 차가운 면요리로는 히야시 라멘 등이 있는데, 히야시 라멘은 1952년 야마가타시에 있는「사카야에 본점」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 역사가 6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냉면은 1849년에 편찬된 동국세시기에 

“用蕎麥麵沈菁菹?菹和猪肉名曰冷麵”

메밀국수를 무김치,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섞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11월 月內條)

라 하여 냉면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아울러 서북지역의 것을 최고로 친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로 보아 냉면은 동국세시기가 만들어질 무렵에 이미 여러 곳에서 즐겨먹었던 면요리로, 아마 최소한 200여년 전에 냉면이라 불릴만한 음식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해봅니다.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요. 또한 단순히 고기 육수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발효된 채소의 국물을 섞는 것도 다른 나라의 면요리와 구별되는 냉면만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차가운 고기 육수에 발효된 채소의 국물을 섞어서 메밀면을 말은 냉면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며, 전 국민이 사랑하는 요리라는 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면요리라고 부를 수 있죠.

아시다시피 냉면은 크게 함흥냉면으로 대표되는 비빔냉면 계열과 평양냉면으로 대표되는 물냉면 계열로 나뉘어지지요. 냉면을 즐기시는 분들의 선호도도 양쪽으로 나뉘고요. 저의 경우는 어려서는 비빔냉면이 더 맛있었지만, 나이가 먹어갈수록 물냉면쪽이 더 입맛을 끌더군요.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면 평양냉면집은 빠짐없이 다녀왔지만, 함흥냉면 잘하는 집은 요 몇년 사이에 정말 한 손으로 꼽을 정도만 다녀온 것 같습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평양냉면이 당겨서 지난 여름에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필동면옥에 다녀왔습니다.

충무로 대한극장 뒷편에 위치한 필동면옥은 우레옥, 을지면옥, 평양면옥, 을밀대 등과 함께 뛰어난 맛의 평양냉면을 내놓는 대표적인 식당 중 하나지요. 원래 의정부에 있는 평양면옥에서 갈려 나온 식당으로, 을지로 을지면옥과 함께 모두 일가 친척이라고 합니다. 처음 평양냉면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즐겨 찾던 집이라 이 집 냉면이 제 입맛에 맞는건지, 제 입이 이 집 냉면에 길들여진 것인지 구분을 못하겠습니다만, 어쨌든 가장 맛있게 먹고 자주 들르는 곳이지요.

일단 앉으면 나오는 면수. 냉면 사리를 삶을 때 나오는 물로 구수한 내음이 나지요. 제대로 된 평양냉면집은 보리차나 생수 대신에 면을 삶은 면수를 내줍니다. 그러므로 면수가 나오지 않는 평양냉면집이라면 약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

기본 찬 세트. 무김치(?)와 배추김치. 이북식이라 심하게 심심합니다.

이날은 두 사람이 가서 돼지고기 편육에 각각 냉면 한 그릇씩을 시켰습니다.

냉면과 함께 필동면옥의 주가를 올려주는게 이 돼지고기 편육입니다. 다른 집에 비해 촉촉하며 냄새 없이 잘 삶아져 나옵니다. 최근에는 때때로 퍽퍽하게 삶아져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제가 갔을 때는 상태가 아주 좋게 나왔습니다.

함께 찍어먹는 양념장. 새콤 달콤하며 살짝 매콤해서 돼지고기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 양념장도 다른 돼지고기 집에서 맛볼 수 없는 이 집만의 전매품이죠.

요로코롬 찍어서 먹으면 굿! 자연스럽게 술이 땡겨집니다.

그래서 시킨 참이슬 후레쉬 19.5℃. 파란 건 후레쉬, 빨간 건 오리지날.

권커니 잣커니 하며 소주와 돼지고기를 섭취하는 가운데 등장하신 냉면님. 말갛고 반투명하며 살짝 기름끼 뜬 육수에 풍부한 사리, 파, 고축가루, 달걀 반쪽, 고기 몇 점.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의 비쥬얼_Visual적인 특징입니다.

면의 모습. 살짝 말갛고 투명하며 흰빛을 띱니다. 메밀을 넣었다고 색깔이 검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메밀 껍질을 벗겨서 면을 만들면 이렇게 색깔이 하얗게 나오거든요. 물론 필동면옥은 을지면옥이나 다른 평양냉면집에 비해선 메일의 함량이 적은 편이고, 전분의 함량이 많은 편입니다. 최고의 평양냉면 면빨은 단연코 우래옥이지요. 덕분에 가격은 더 비쌉니다 ㅠㅠ. 그래도 필동면옥의 면은 상당히 맛있는 편입니다. 너무 질기지도 너무 무르지도 않고 입안에서 꾸득꾸득하게 씹히며 이빨로 툭툭 끊을 수 있을 정도의 끈기를 보여줍니다.

꾸미로 올려지는 고기는 항상 석 점 이상 나오는데, 돼지고기, 소고기, 돼지 비계 부위가 각각 올려집니다. 사진 맨 앞의 짙은 색의 고기가 소고기, 가운데가 돼지 비계 부위, 맨 뒤가 돼지고기입니다. 이 고기들은 육수를 삶고 난 후에 건져낸 고기들을 잘라서 얹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평양냉면집에서 수육, 편육을 취급 안하거나, 냉면 위에 고기 꾸미가 얹혀져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 집은 100% 공장제 육수를 쓰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필동면옥의 냉면은 은근하면서도 조금 짠맛이 도는 깊고 그윽한 육수에 꾸들꾸들하면서도 툭툭 끊어지는 면빨이 잘 조화를 이룬 맛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안에서 바로 느껴지는 자극성은 없지만, 한 번 입에 넣게 되면 계속 안으로 면과 육수를 집어넣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결국 몇 젓가락 만에 면을 다 먹고 천천히 육수를 마시노라면 그 넉넉한 포만감에 온 몸이 즐거운 기분으로 들뜨게 되지요. 

물론 처음 드시는 분들의 경우엔 면이 쫀득쫀득 하지도 않고, 다른 면요리에 비해 국물이 닝닝하기만한 평양냉면이 입에 안맞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대로된 평양냉면은 한 번, 두 번, 세 번 먹을수록 점점 깊어지는 맛을 느끼게 되고 갈수록 머릿 속에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하는 힘을 가졌답니다. 그러니 처음엔 맘에 안 드시더라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계속 드시다보면 평양냉면의 진미를 느끼실 수 있게 될 겁니다.

필동면옥은 단골도 많지만 안티들도 많은 집인데요, 그 이유는 육수를 만들 때 다른 평양냉면집과는 달리 조미료를 넣는다는 혐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조미료를 넣는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예전부터 이런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가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필동면옥의 퀄리티가 가끔 기복이 심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비평가 고형욱씨의 글에 의하면 필동면옥의 육수 맛은 2001년 전후로도 한 번 크게 변한 적이 있는 것 같더군요. 이처럼 일정치 않는 냉면 맛으로 인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미료를 넣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도 있구요.

아무튼 저의 경우엔 현재까지 만족스럽게 먹은 기억 밖에 없습니다만, 필동면옥의 냉면이 늘 일정한 퀄리티로 유지되길 바랄 뿐입니다

※ 2011년 6월에 이곳에서 냉면을 먹었는데, 면도 육수도 예전의 그맛이 아닙니다. 질이 많이 떨어졌어요. 특히 육수는 상태가 아주 안좋더군요. 제가 갔던 날만 안좋았다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필동면옥의 냉면 맛이 예전의 상태를 회복했다는 얘기가 들리기 전까지는 갈 생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