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책 이야기

[문화] 신화, 전설, 문학 속의 와인 이야기 2 - 포도로 술을 만드는 여인 시두리(Siduri)

까브드맹 2010. 9. 27. 09:44

(이미지 출처 : https://48kxke1sh1v71u2d9b1f8chq-wpengine.netdna-ssl.com/wp-content/uploads/2016/02/SiduriColor-new-no-background.png)

바닷가에서는 포도로 술을 만드는 시두리(Siduri)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신이 준 황금 술통을 안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몸을 베일로 감싸고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그녀는 길가메시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

그녀는 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에 빗장을 걸고는 못을 박았다. 그러나 못 박는 소리를 듣고 길가메시는 달려와 대문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술 만드는 젊은 여인아, 무슨 이유로 문에다 못을 박는가? 무엇을 보았길래 대문에 빗장을 거는가? 나는 대문을 부수고 방안으로 쳐들어갈 수 있다. 하늘 황소를 죽이고 향나무 숲에 살면서 숲을 지키던 훔바바를 집어 던지고 산길에서 만난 사자들도 찢어 죽인 길가메시가 바로 나다."

(중략)

길가메시가 대답했다.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 내 뺨이 야위고 얼굴이 어둡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가슴 속에는 절망이 있고 내 얼굴에는 긴 여행을 마친 자의 피곤함이 있으며, 그 얼굴은 추위와 열기로 그을었다. 내 어찌 바람 찾아 광야를 지나며 방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친구이자 내 동생이 있었다.

(중략)

이제야 그대를 만나게 되었으니 내가 이다지도 두려워하는 죽음의 얼굴을 보지 않게 해다오."

그녀가 대답하였다.

"길가메시여, 어디로 급히 가려 하십니까? 당신이 찾으려는 생명은 찾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그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게 남겨 두었습니다. 길가메시여, 당신에게 충고를 드리죠. 좋은 것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낮으로 밤으로, 밤으로 낮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 줄 어린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안에 꼭 품어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N.K. 센다아즈 판독, 이현주 역, 길가메시 敍事詩, 서울 : 범우사, 1979. 65~67페이지 부분 발췌)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시두리(Siduri, 또는 사비트(Sabit)라고도 합니다)는 신들의 동산에 있는 바닷가에 사는 여인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젊은 여인', 또는 '술집 작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녀는 포도로 술을 만드는, 즉 와인을 만드는 여인이라고 하는데, 신들이 사는 곳에서 기거한다는 걸로 보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유추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랑과 풍요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이며 길가메시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이시타르(Ishtar) 여신의 현신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이름은 베로수스(Berossus)의 저서에 나오는 '시빌(Sybil)'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바닷가 해안에서 길가메시를 만난 시두리는 처음엔 무서워서 집으로 도망쳤지만, 그녀를 쫓아온 길가메시로부터 절망과 한탄(?)에 찬 얘기를 듣게 되죠. 우룩의 왕이자 세상에 이름을 떨친 영웅으로서 길가메시는 온갖 권세와 부귀영화를 가졌지만, 가장 사랑했던 친구이자 동생인 엔키두(Enkidu)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죽어버리고, 자신도 그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 세상을 방황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에 시두리는 그런 노력은 부질 없는 것이고 현재를 충실하게 즐기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충고해줍니다. 마치 야망을 품고 온갖 노력을 하다 좌절하는 남자와 현실과 가족에 충실한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녀의 모습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후 시두리는 여성 예언자의 이미지로 전설이나 문학 작품에서 종종 차용되었고, 브랫 딘(Brett Dean)의 시두리 무곡(Siduri 舞曲) 같은 음악의 소재, 또는 와인 브랜드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