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면 전 세계적으로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가 출시됩니다. 수확한 해가 가기 전에 마실 수 있는 와인인 보졸레 누보는 한 해의 포도 농사와 와인 품질을 가늠할 수 있는 와인입니다. 신선한 과일 향과 가벼운 탄닌이 어우러져 상큼한 느낌이 나는 보졸레 누보를 만들 때 사용하는 포도가 가메(Gamay)입니다.
1. 가메의 특성
가메 와인은 붉은 체리 향이 진한 것이 특징입니다. 과일 향이 풍부하고 산도도 충분하죠. 가메로 만든 보졸레(Beaujolais) 와인은 빛깔이 참 아름답습니다. 루비의 붉은빛(Ruby pink), 진한 담홍색(Scarlet, Purple Pink), 홍당무의 붉은빛(Reddish Red) 등으로 표현되며 매우 투명하고 찬란합니다. 색상만 따진다면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와인 못지않은 것이 보졸레죠.
보졸레는 산도가 높고 체리와 라즈베리 향이 나며 상큼하고 가벼운 느낌을 줘서 더운 날에 약간 차게 마시면 아주 그만입니다. 보졸레는 탄닌이 매우 적습니다. 가메 포도에 함유된 탄닌의 양이 원래 적을뿐더러 수확한 해에 와인을 만들어서 내보내려고 속성으로 발효하는 보졸레의 제조법 때문에 그렇습니다.
탄닌이 적다 보니 보졸레는 당연히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보졸레 누보는 빈티지 다음 해의 수확 직전인 8월 31일까지 유통할 수 있지만, 수확한 해의 연말까지 마시는 것이 좋고 이듬해 부활절까진 마셔줘야 제맛을 느낄 수 있죠. 상위 등급의 보졸레 빌라지는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지만 역시 다른 포도로 만든 와인과 비교하면 보관 기간이 짧습니다.
2. 가메의 역사
가메의 고향은 프랑스 보졸레 지방이며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메는 1360년대 부르고뉴 본(Beaune)의 남쪽에서 처음 재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사라지는 시기였지만, 인구가 격감한 상황에서 가메는 구원과 같은 포도였습니다. 피노 누아보다 2주나 빨리 익고 재배가 까다롭지 않으며 수확량도 많았기 때문이죠.
이처럼 초기엔 가메를 부르고뉴의 와인 생산 중심지에서도 재배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난을 겪게 됩니다. 1395년 부르고뉴 공작인 “용담공” 필리프 2세(Philippe the Bold)는 가메 와인을 마시고 숙취로 심한 두통을 앓습니다. 공작은 가메 와인 때문에 심한 숙취가 발생했다고 여기고 부르고뉴 모든 곳에서 가메를 뽑아버리고 다시는 심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죠.
60년 후에 가메는 또 한 차례 수난을 겪습니다. 당시 군주인 “선량공” 필리프 3세(Philippe the Good)가 “기독교 세계에서 부르고뉴의 공작은 최고급 와인의 군주로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우리의 평판을 유지해야 한다.”라는 이유로 가메를 배척했고, 결국 가메는 부르고뉴에서는 퇴출당했죠. 그러나 화강암 토양 지대인 보졸레에선 피노 누아가 잘 자라지 못하고 가메만 잘 자랐기에 가메를 심어도 내버려 뒀고, 가메는 보졸레에서 명맥을 유지합니다.
3. 가메 포도 재배지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도 가메를 재배하지만, 수확량은 적고 명성도 보졸레만 못합니다. 보졸레 이외의 지역에선 재배가 어렵기 때문이죠. 프랑스 남부의 아르데슈(Ardeche)와 북서부의 루아르 밸리(Loire Valley)에서 조금 재배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처럼 한 지역에 국한되어서 재배되는 포도 품종은 매우 드뭅니다.
프랑스 동남부에 있는 보졸레 지방은 행정구역이 다소 애매한 곳입니다. 일부는 부르고뉴 지방에, 다른 일부는 론 지방에 속해 있기 때문이죠. 이런 까닭에 때로는 부르고뉴의 보졸레 지역, 때로는 론의 보졸레 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AOC 규정으로는 부르고뉴에 속하는 보졸레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으로 마꽁(Macon)의 남쪽 8km 경계 지역에서 남으로 리용(Lyon)시 외곽에 이르는 길이 약 90km의 포도 재배지를 일컫습니다. 총 2만 2천5백 헥타르의 경작지가 15km를 넘지 않는 좁은 폭으로 손(Sone)강과 나란히 펼쳐져 있죠. 해발 300m의 높이에 기후는 남방 대륙성이며, 토양은 북쪽은 화강암질과 편암질, 진흙과 석회질토 등으로 되어 있어 가메가 자라는데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죠.
4. 보졸레 10크뤼
보졸레에선 크뤼 뒤 보졸레(Crus du Beaujolais), 또는 보졸레 크뤼(Beaujolais Crus)라고 해서 품질이 뛰어난 와인도 생산됩니다. 마을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고급 보졸레 와인으로 10종이 있죠.
① 레니에(Régnié) : 산딸기와 꽃 향이 진하고 여운에 강한 신맛이 남는 라이트 바디 와인
② 쉬루블(Chiroubles) : 감미로운 검은 체리와 딸기류의 향과 계피 향이 뒷맛에서 감지되는 라이트 바디 와인
③ 부루이(Brouilly) : 검은 체리와 매콤한 향이 나오고 뒷맛이 약간 견고한 단순한 와인
④ 프뢰리(Fleurie) : 바이올렛과 검은 체리, 자두 향 등 잘 응집된 과일 향이 가득하며 뒷맛이 우아한 와인
⑤ 꼬뜨 드 부루이(Côte de Brouilly) : 검은 체리와 자두 향이 강하며 뒷맛이 상당한 와인
⑥ 쥴리에나(Juliénas) : 활력이 넘치고 감칠맛과 상큼한 과일 향이 일품이며 알코올 도수가 높은 미디엄 바디의 와인
⑦ 생-타무르(Saint-Amour) : 검은 체리, 산딸기와 매콤한 스모크 향이 느껴지며 탄닌이 부드러운 상쾌하고 활기찬 미디엄 바디 와인
⑧ 모르공(Morgon) : 중후한 짙은 적색으로 농익은 검은 체리와 초콜릿, 스모크 향이 두드러지며 여운에 탄닌이 남는 미디엄 바디 와인
⑨ 쉐나(Chénas) : 이웃의 물랭아방과 질감이 비슷하며, 색이 진하고 탄닌이 강하게 응축된 와인
⑩ 물랭-아-방(Moulin-À-Vent) : 진한 적색으로 매력적인 검은 바닐라와 계피 향이 곁들여진 미디엄 바디 와인
보졸레 와인의 최상위 등급인 10 크뤼는 꽤 오랫동안 보관하고 숙성할 수 있으며,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와인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습니다.
5. 가메 와인의 향
대표적인 향은 레드 체리와 딸기, 산딸기, 라즈베리, 석류 같은 붉은 과일 향입니다. 때로는 달콤한 과일 사탕 향을 풍기기도 하죠. 10크뤼 같은 고급 와인에선 블랙커런트와 제비꽃, 화분의 흙, 바나나 향도 나옵니다. 와인잔에 남은 잔향에서 버터 스카치 캔디 향이 진하게 올라오기도 합니다.
6. 가메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레드 와인이지만, "빨갛게 되어버린 화이트 와인"이란 평가가 있을 만큼 보졸레 누보는 화이트 와인과 성격이 비슷합니다. 와인을 마실 때도 일반적인 레드 와인은 16~18℃ 정도에서 향과 맛이 잘 살아나지만, 보졸레 누보는 11℃ 정도로 시원하게 마시는 게 좋습니다.
간단한 안주로는 무염 크래커나 바게트가 좋고, 크림치즈와 리코타 치즈처럼 부드럽고 맛이 강하지 않은 치즈를 함께 하면 더 좋습니다. 탄닌이 거의 없어서 참치회도 잘 어울리고, 샐러드 같은 채소 요리와 먹어도 좋습니다. 돼지고기 편육과 소고기 수육도 괜찮은 선택이 되죠. 닭백숙과 삼계탕도 좋고 살라미 같은 생햄도 잘 맞습니다. 깐풍기와 팔보채 같은 중국요리도 보졸레 누보와 궁합이 좋습니다. 풍미가 강한 생선 요리와 함께 마셔도 괜찮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대구와 함께 즐겨 마신답니다. 햄버거나 피자를 먹을 때 콜라 대신으로 마셔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