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역사

[와인] 와인에 관한 몇 가지 역사적 이야기 (재업)

까브드맹 2023. 11. 20. 08:00

로마군의 모습을 새긴 부조

1. 와인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프랑스에 널리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 양조법을 보급한 것은 카이사르의 공이었습니다.

갈리아 지역을 침략할 당시에 갈리아의 물 상태가 안 좋은 걸 확인한 카이사르는 병사들의 건강이 나빠질 것을 염려하여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양조해서 배급해 줬습니다. 물론 프랑스 남부의 마실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가 있어서 그곳 주민들은 와인을 마셨지만, 갈리아 내륙까지 널리 와인이 퍼진 것은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라고 봐야 합니다.

당시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물에 와인을 타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와인의 알코올 성분이 물의 잡균을 소독해서 안 좋은 물을 마실 때 생길 수 있는 각종 질병을 예방해 주었기 때문이죠.

그럼 갈리아에서는 와인 대신 그냥 물을 마셨느냐? 비슷한 효과를 얻기 위해 맥주를 마셨습니다.

2.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보다 레드 와인이 더 비싼 것이 많지만, 고대에는 화이트 와인이 훨씬 고가로 취급받았다 합니다. 

네로 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인 페트로니우스도 와인 광이었고, 그가 자신이 마신 와인에 대한 품평을 적은 글이 아직도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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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와인은 오래된 것이 좋다'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 품종과 양조법에 따라 오래 둬서 좋은 와인이 있고 바로 마셔서 좋은 것이 있습니다.

대개 레드 와인은 병에 적힌 빈티지(포도 수확 연도)에서 3~4년 지났을 때 마시면 되고, 화이트 와인은 2~3년쯤 지났을 때 마시면 됩니다. 다만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같은 포도로 만든 장기 숙성용 와인은 10~15년 후에 마시는 것이 좋죠. 이것도 지역이나 와인의 레벨에 따라 다릅니다. 가메(Gamay) 포도로 만드는 보졸레 누보는 포도를 수확한 다음 해 부활절까지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구조가 약해서 오래 보관하기 힘든 와인입니다.

17~19세기에 걸쳐 보관 방법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2년 이상 숙성된 와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양조된 와인은 이듬 해 여름을 거쳐 가을이 되면 아주 뛰어난 일부 와인을 제외하곤 식초로 변했죠. 그 후 유리병의 대량생산, 코르크 마개의 보급, 산화방지제인 이산화황의 본격적인 사용, 탄닌 성분이 많은 포도 품종의 등장으로 와인의 장기 보관이 가능해졌고, 오늘날처럼 20~30년 된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서 수십 년 된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면 고증 오류입니다.

4.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선 와인을 그대로 먹으면 술꾼 취급을 받았습니다.

"야만인들이나 와인을 그대로 먹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답니다. 와인에 물을 타서 음료수처럼 마시는 게 보편적이었고, 이런 전통은 고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단, 물에 탄 와인을 마시는 부류가 달라졌습니다.

고대에는 교양 있는(?) 분들이 물을 탄 와인을 마셨다면 중세에서 근대로 들어오면 서민들이 물을 탄 와인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선 조선소에 늘 와인을 탄 물을 음료수로 제공했고, 때때로 물에 탄 와인의 양이 너무 적으면 노동자들의 항의가 있었습니다.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물을 탄 와인이 지급되었죠. 그러나 음료수를 만드는 데 사용된 와인은 대개 식초로 변하기 직전의 것들이었습니다.

 

 

5. 오늘날의 유럽 와인은 옛날의 유럽 와인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포도나무가 옛날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와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이른바 '필록세라(phylloxera)의 난(亂)'입니다. 필록세라는 신대륙의 미국종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일종의 진딧물로 유럽의 포도나무들은 이 벌레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신대륙에서 양조용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포도나무가 시들시들해지면서 죽어가자, 조사를 의뢰하려고 유럽으로 포도나무를 몇 그루 보냈고, 여기에 숨어있던 필록세라가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필록세라는 구대륙의 포도밭을 초토화했죠. 그 후 미국종 포도 나무의 뿌리 부분을 유럽종 포도에 접붙이면 필록세라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유럽의 와인 산업은 다시 살아납니다.

오늘날 유럽 와인은 유럽종 포도나무의 줄기에 미국종 포도나무의 뿌리를 접붙여 만든 혼혈(?) 포도나무에 열린 포도로 만듭니다. 다만 칠레에는 필록세라가 퍼지지 못해서 칠레산 와인은 100% 유럽종 포도나무의 열매로 만듭니다.

6. 오늘날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 이루어진 와인 산업은 대항해 시대와 관계가 깊습니다.

유럽인의 식습관, 특히 상류층의 식사 문화에서 와인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유럽에서 와인을 싣고 출항하여 희망봉을 거쳐 동남아 식민지로 가거나 대서양을 가로질러 남미의 식민지로 가려면 거리가 너무 멀고 태양이 이글거리는 적도를 통과해야 해서 식민지에 도착할 때쯤엔 와인들이 훌륭한 포도 식초로 변해버리는 일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인은 식민지가 어느 정도 개척되면 포도나무를 심어서 와인을 만들려고 했죠. 현재의 신대륙 와인 산업은 그때의 노력 속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7. 양조용 포도는 서안해양성 기후에서 잘 자라기에 동아시아에선 좋은 와인을 만들기 힘듭니다.

우리나라가 뛰어난 양조 기술을 갖고 있어도 좋은 와인을 만들기 힘들고, 중국과 일본의 와인이 유명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장성(長城)'이란 와인은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주로 내수용으로 팔리며 맛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일본 와인은 맛이 좋긴 하지만 불리한 환경에서 생산하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어가죠.

국산 와인인 마주앙은 주로 OEM 방식으로 들여온 와인을 판매합니다. 국내에서 양조하는 마주앙 레드와 마주앙 화이트도 수입한 포도 원액을 주로 사용합니다. 술꾼들 사이에서 호평받는 마주앙 모젤도 독일 모젤강 근처의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100% 독일제 와인입니다. 상표만 마주앙을 붙였을 뿐이죠. 다만 마주앙 미사주는 미사에서 사용하는 와인은 해당 국가의 포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100% 국산 포도로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