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인구트 로이머(Weingut Loimer)의 글루끌릭(Gluegglich) NV는 오스트리아의 바인란트 외스터라이히(Weinland Österreich)에서 재배한 샤르도네(Chardonnay)와 지에르팬들러(Zierfandler), 리슬링(Riesling), 무스카텔러(Muskateller=Muscat Blanc à Petits Grains), 로트기플러(Rotgipfler), 트라미너(Traminer) 포도를 섞어서 만든 타펠바인(Tafelwein) 등급의 화이트 와인입니다.
1. 넌 빈티지(Non Vintage) 와인
오랫동안 빈티지는 와인 품질의 척도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작황이 좋은 해와 나쁜 해의 와인을 섞어서 파는 일을 막았고, 좋은 빈티지의 와인은 생산자가 좋은 가격에 팔 수 있도록 해주는 반면 안 좋은 빈티지의 와인은 소비자들이 좀 더 경제적인 가격으로 와인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줬죠.
그러나 여러 빈티지를 섞어서 만드는 와인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해마다 작황이 달라도 안정된 품질의 샴페인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 상파뉴에서는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섞는 일이 일반적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샴페인은 넌 빈티지입니다. 빈티지 샴페인은 아주 작황이 좋을 때만 만듭니다.
또한 와인 양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좋은 맛과 향을 위해 일부러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섞어서 샴페인을 만드는 일도 있습니다. 유명한 샴페인 하우스인 크룩이 이러한 샴페인을 만드는 대표적인 생산자이죠. 크룩 하우스는 멀티 빈티지(multi vintage)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넌 빈티지와 멀티 빈티지의 차이점은 넌 빈티지는 안정된 품질이 목적이며 최근 생산한 와인을 주로 블렌딩 하지만, 멀티 빈티지는 여러 빈티지의 블렌딩을 통해 풍부한 향과 맛을 얻으려고 10여 종이 넘는 빈티지의 베이스 와인을 120여 종가량 사용해서 만든다는 것이죠. 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목적은 다릅니다.
이런 시도는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뿐만 아니라 일반 와인에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행운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인구트 로이머의 글루끌릭 NV입니다.
2. 와인 생산자
바인구트 로이머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에 있는 니더외스터라이히(Niederösterreich=Lower Austria) 주의 캄프탈(Kamptal)에 있는 와이너리입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화이트 와인 생산자 중 하나로 이름 높으며 캄프탈 DAC과 캄프탈 DAC 레제르브(Reserve), 에르스테 라게(Erste Lage) 등급을 비롯한 다양한 와인을 생산합니다.
글루끌릭은 샤르도네 33%, 지에르팬들러 24%, 리슬링 20%, 무스카텔러 10%, 로트기플러 7%, 트라미너 6%를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무려 6개 품종을 블렌딩 했죠. 여기에 2017(21%), 2018(48%), 2019(31%) 이렇게 세 개의 빈티지를 사용했습니다. 다 품종 멀티 빈티지 와인인 셈이죠.
이처럼 독특한 와인이 된 것은 글루끌릭이 19세기에 오스트리아에서 사용했던 전통 와인 양조법과 오늘날의 양조 지식을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포도 품종은 맛있는 와인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판매와 홍보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여러 품종을 섞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 빈티지도 품질을 위해 혼합했으므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죠. 바이오다이내믹(Biodynamic) 농법 역시 현대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요즘 와인처럼 필터로 앙금을 걸러내지도 않았습니다. 포도를 으깨고 짜서 얻은 즙에 산화를 막는 이산화황을 넣고 신선한 효모를 사용하는 것, 그것만이 당시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죠. 발효도 전통 방식에 따라 오크통에서 했습니다. 숙성할 때 효모 잔해인 리(lees)는 그대로 뒀지만, 품종에 따라 숙성 기간은 다르게 했습니다.
3. 와인의 맛과 향
약간 흐릿한 중간 농도의 금색입니다. 양조 후 남은 앙금을 필터로 걸러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잘 익은 사과와 리치(lychee) 같은 열대과일 향이 나오고 뉴질랜드 꿀과 목련 같은 흰꽃 향도 올라옵니다. 속살이 흰 나무와 말린 로즈메리 향이 이어지고 후무사처럼 속이 노란 자두 향도 풍깁니다.
매끄럽고 탄탄하면서 미네랄 느낌이 조각조각 거칠게 느껴집니다. 구조는 제법 굳세고 치밀합니다. 드라이하면서 미네랄의 짠맛이 나네요. 노란 사과와 열대 과일의 풍미과 산미가 좋고, 나무와 허브, 밀짚 같은 식물성 풍미도 돋보입니다. 나무 순의 매콤한 풍미도 살짝 나오는군요.
내추럴 와인 같은 느낌도 약간 있지만, 거슬리지 않습니다. 알코올은 조용하게 필요한 만큼 와인에 기운을 주네요. 여운에선 미네랄과 밀짚, 흰 나무 등의 풍미가 길게 남습니다.
온화하면서 부드러운 진한 산미가 12%의 알코올과 잔잔하게 균형을 이루고, 미네랄 풍미가 재미를 더합니다. 한 가지 풍미가 지배적이지 않고, 다채로운 맛과 향이 조화를 이루는 섬세하고 우아한 와인입니다.
각종 샐러드, 생선 스튜와 해물 수프, 바게트처럼 달지 않은 식사용 빵, 감자 요리, 생선구이와 생선찜, 오븐구이 치킨, 삼계탕과 닭 한 마리, 라자냐, 캐비지 롤, 각종 나물, 조개찜과 새우찜, 흰 살 생선회, 초밥, 누룽지탕과 전가복, 팔보채, 까망베르 같은 연질 치즈 등등 다양한 음식과 잘 맞습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B+로 맛과 향이 훌륭하고 매력적인 와인입니다. 2021년 1월 26일 시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