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생산지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상파뉴, 샴페인 1/2

까브드맹 2019. 1. 19. 08:00

잔에 따라지는 때땡저 샴페인의 모습
(이미지 출처 : https://static.vinepair.com/wp-content/uploads/2017/11/vintage-social-1.jpg)

1. 샴페인(Champagne), 또는 샹파뉴

샹파뉴(Champagne)는 프랑스 동북부의 와인 생산지이며 샴페인은 그곳에서 생산하는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생산지와 와인의 철자가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샴페인은 샹파뉴의 영어식 발음이죠. 유럽연합(EU)과 대부분의 나라에서 "샴페인"이란 명칭은 파리(Paris) 동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샹파뉴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에만 붙이게 되어있습니다. 

한정된 생산지에 만들기도 까다롭고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원하는 샴페인은 당연히 가격이 비쌉니다. 일반 스파클링 와인도 제조 과정이 복잡해서 다른 와인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샴페인은 다른 스파클링 와인보다 더욱더 비싸죠. 그래서 샴페인은 부귀와 미식의 상징이면서 사치와 허영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라는 말은 너무 빠른 성공으로 오만하게 굴다가 졸지에 망한 사람과 국가를 비웃을 때 종종 사용되죠. 

샹파뉴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습니다. 원시 영어로 "샴파니(Champany)"라는 지명이 있을 만큼 오래된 곳이죠. 와인 생산지로는 꽤 북쪽에 있는 샹파뉴는 독특한 떼루아로 인해 와인의 역사와 발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파리와 가까워서 와인 무역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마을과 포도밭이 프랑스의 수도로 오고 가는 군대의 행군로로 쓰이는 일도 많았죠. 잦은 군사적 충돌에도 샹파뉴는 중세 초기부터 고급 와인 생산지로 좋은 평판을 쌓아 올렸고, 이런 평가는 큰 샴페인 하우스가 생겨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17~18세기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2. 샹파뉴 지역의 역사

샹파뉴 와인은 중세 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최초로 포도밭을 가꾼 사람들은 로마인이며 적어도 5세기 이전부터 포도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교회가 포도밭을 가졌고, 수도사들은 성체 행사의 성찬식에 쓸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메로빙거 왕조를 이어서 프랑크 왕국을 통치한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가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을 장려하면서 샹파뉴는 번영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이(Louis the Pious)가 랭스(Reims)에서 대관식을 올렸고, 그 후 프랑스 왕의 즉위식은 랭스에서 거행하는 전통이 생깁니다. 이러한 전통은 샹파뉴 와인을 대관식 만찬주로 쓰게 되어서 이 지역 와인의 평판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었죠. 샹파뉴의 백작들은 서기 950년부터 1316년까지 샹파뉴를 독립적으로 통치했고, 1314년에 마지막 샹파뉴 백작인 루이 10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합니다. 이로써 샹파뉴는 왕의 직할령 중 하나가 되죠.

교황으로부터 관을 받는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
(https://ludwigheinrichdyck.files.wordpress.com/2017/11/charlemagne-coronation-kaulbach-friedrich-kalbach-1861.jpg)

역사를 살펴보면 샹파뉴는 군사적, 상업적으로 주변 지역의 교차로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을 때 종종 샹파뉴를 파괴하고 황폐화하는 원인이 되었죠. 서기 451년 아틸라(Attila) 대왕이 이끄는 훈족(Huns)이 샬렁 앙 샹파뉴(Châlons-en-Champagne) 부근에서 로마, 프랑크(Franks), 서고트(Visigoths) 연합군과 맞붙어 패했습니다. 이때의 전투는 훈족의 유럽 침공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죠.

샹파뉴는 100년 전쟁에서도 몇 번이나 파괴되고 황폐해졌습니다. 오빌레 사원(Abbey of Hautvillers)은 가톨릭과 위그노 교도 사이에 벌어진 종교 전쟁 시기에 포도밭까지 모두 파괴되고 말았죠. 30년 전쟁과 프롱드(Fronde)의 난 때에도 샹파뉴를 점령한 군인과 용병이 마을과 포도밭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전쟁 피해가 극심했던 샹파뉴가 비교적 안정된 것은 루이 14세 때였습니다. 이때 샹파뉴는 평화로웠고, 스파클링 와인은 많은 발전을 이뤘습니다.

교황 우르반 2세의 입상
(교황 우르반 2세의 입상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2/Pope_Urban.jpg/512px-Pope_Urban.jpg)

샹파뉴 와인에 대한 평가는 중세의 교황인 우르반 2세(Urban II) 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샹파뉴 출신인 우르반 2세는 "마른(Marne) 지방의 아이(Aÿ) 와인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와인"이라고 선포했죠. 한동안 "Aÿ"는 샹파뉴 전 지역의 와인을 위한 축약된 지명으로 불렸습니다. 비슷한 예로 부르고뉴 와인을 "본(Beaune)"이라고 불렀죠. 

13세기의 시인인 앙리 당델리(Henry d'Andeli)는 "라 바따예 데 뱅(La Bataille des Vins, 와인의 전투)"이라는 작품에서 샹파뉴 지방의 에뻬르네(Épernay), 오빌레르(Hautvillers), 랭스(Reims) 와인을 유럽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평가했습니다. 샹파뉴 와인의 평판이 올라가면서 교황과 유럽 왕족들은 샹파뉴에 포도원을 갖길 원했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François I)와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Carlos I),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가 샹파뉴에 포도원을 가진 왕들이었고, 교황 레오 10세(Leo X)도 샹파뉴에 자기 포도밭이 있었죠. 샹파뉴에서 영국으로 수출한 최초의 와인은 헨리 8세의 재무장관이었던 카디날 토마스 울시(Cardinal Thomas Wolsey)가 1518년에 받은 한 꾸러미의 "아이" 와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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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민들은 샹파뉴 와인을 강의 와인(vins de la rivière)과 산의 와인(vins de la montagne)으로 부르며 비싼 값에 샀습니다. 이런 이름은 포도를 수확한 곳이 샹파뉴 숲 지대의 포도밭인지, 아니면 마른(Marne)강 근처의 포도밭인지에 따라 달라졌죠. 물론 당시의 와인은 스파클링 와인이 아니라 일반 와인이었습니다. 

샹파뉴 와인은 북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에 걸친 플랑드르(Flandre) 지방의 와인 무역에서 부르고뉴 와인과 경쟁했습니다. 샹파뉴 와인 생산자들은 플랑드르에서 본까지 이어지는 무역로에 자리 잡은 랭스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죠. 15세기 내내 샹파뉴 와인 생산자들은 피노 누아를 주로 재배했지만, 샹파뉴 레드 와인은 부르고뉴 레드 와인과 비교할 때 색상과 맛의 깊이에서 경쟁하기 어려웠습니다. 불리한 부분을 극복하려고 샹파뉴 와인 생산자들은 엘더베리(Elderberry)를 넣어서 와인 색깔을 더 짙게 하려고 노력했죠. 결국 샹파뉴 와인 생산자들은 화이트 와인 생산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샴페인 고쎄 셀레브리스 엑스트라 브뤼 2002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하면서 샹파뉴의 와인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1800년에 연간 30만 병 정도를 생산했지만, 1850년에 이르면 생산량이 연간 2,000만 병에 이르게 되죠. 오늘날에도 운영 중인 가장 오래된 샴페인 하우스는 1584년에 일반 와인을 만들려고 설립한 고쎄(Gosset) 샴페인 하우스입니다. 루이나(Ruinart)는 1729년에 설립했고, 곧이어 떼땅저(Taittinger, 1734), 모에 에 샹동(Moët et Chandon, 1743),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1772) 샴페인 하우스가 문을 엽니다.

3. 샹파뉴 대 부르고뉴(Champagne vs Bourgogne)

샹파뉴 와인 생산자들은 부르고뉴 와인의 높은 명성을 부러워했고, 동등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와인을 생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부르고뉴보다 북쪽에 있는 샹파뉴의 추운 기후는 레드 와인 생산에서 샹파뉴 와인을 항상 도전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만들었죠. 프랑스 와인 생산지 중 가장 북쪽인 샹파뉴에서 포도가 충분히 익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종종 짜릿할 만큼 시큼한 맛과 당도가 떨어지는 포도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샹파뉴 와인은 능가하길 원했던 부르고뉴 와인 보다 바디가 가벼웠고 농도도 묽었습니다.

샹파뉴와 부르고뉴 와인 산업의 강력한 영향력은 수 백 년 동안 두 지역의 와인 생산자 사이에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도록 했습니다. 파리의 와인 시장부터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까지 샹파뉴와 부르고뉴 와인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죠. 살아생전 루이 14세는 거의 샹파뉴 와인만 마셨습니다. 그 이유는 왕의 주치의인 앙투안 다퀸(Antoine d'Aquin)이 왕의 건강을 위해 매일 샹파뉴 와인을 마시도록 권하고 처방했기 때문이랍니다. 

이래저래 많은 일화를 남긴 태양왕 루이 14세입니다.
(이래저래 많은 일화를 남긴 태양왕 루이 14세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biography.com/.image/t_share/MTMyNzA0NjYzMDk4MTA4NTQ3/louis_xiv_of_france_promojpg.jpg)

그러나 왕이 늙으면서 점점 병마에 시달리자 앙투안 다퀸과 경쟁하던 의사들은 왕의 병세를 완화하는 처방으로 샹파뉴 와인 대신 다른 와인을 마실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러한 의사 중 한 명인 기-크레상 파공(Guy-Crescent Fagon)은 왕의 정부(情婦)와 도모해 다퀸을 내쫓고 왕의 주치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루이 14세는 몽테스팡 부인, 라 발리에르 부인, 퐁탕주 부인 등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기에 파공과 모의한 정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파공은 주치의 자리에 앉자마자 왕이 병환에 계속 시달리는 것은 샹파뉴 와인 탓이라고 주장하며 왕의 식탁에 오로지 부르고뉴 와인만 올리라고 지시합니다.

이런 상황은 두 와인의 생산지뿐만 아니라 파리 와인 시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샹파뉴와 부르고뉴 와인 생산자들은 자신의 와인이 얼마나 건강에 좋은지 평가하는 사람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종종 와인상과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광고지에 인용되곤 했죠. 샹파뉴의 랭스(Reims) 의학대에선 샹파뉴 와인보다 부르고뉴 와인이 건강에 더 좋다는 파공의 주장을 반박하는 몇 종의 인쇄물을 출판했습니다. 부르고뉴 와인 생산자들은 이에 대응하려고 본(Beaune)의 의학 학교 원장인 내과의 장-밥티스트 드 살랭(Jean-Baptiste de Salins)을 고용해 파리 의대의 대강의실에서 연구 논문을 발표하도록 했죠. 살랭은 샹파뉴 레드 와인의 옅은 색과 비교하면서 부르고뉴 레드 와인의 짙은 색과 강인한 성질을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했고, 이러한 차이 때문에 샹파뉴 와인은 먼 거리로 보낼 때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2차 발효로 생겨난 거품도 결함이라고 지적했죠. 그의 발표 내용은 신문과 팸플릿을 통해 프랑스 전역에 퍼졌고, 샹파뉴 와인은 매출에 큰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와인 시장을 두고 앙숙이었던 샹파뉴와 부르고뉴의 위치. 빨간색이 샹파뉴, 그 아래 길다란 초록색 지역이 부르고뉴입니다.
(와인 시장을 두고 앙숙이었던 샹파뉴와 부르고뉴의 위치. 빨간색이 샹파뉴, 그 아래 길다란 초록색 지역이 부르고뉴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French_vineyards.svg)

샹파뉴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에 관한 논쟁은 의사와 시인, 극작가, 작가들의 끊임없는 논평과 함께 그 뒤로도 130년간 이어졌고, 그들이 선호하는 와인을 위해 언급한 이야기는 부르고뉴와 샹파뉴 와인 홍보를 위해 재생산됩니다. 두 지역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져서 몇 차례나 내전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극한 대치가 풀린 계기는 샹파뉴의 몇몇 와인 생산자들이 레드 와인 생산을 포기하고 스파클링 와인인 샴페인 생산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었죠. 샴페인이 인기를 끌면서 의사들은 샴페인이 말라리아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내용을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발표합니다. 더 많은 샹파뉴 와인 생산자들이 기존 와인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와인 생산에 뛰어들자 일반 와인 시장을 놓고 다퉜던 부르고뉴와의 다툼은 점차 완화되었고, 마침내 잦아들게 되었죠.

4. 샴페인(Champagne)의 기원

샴페인의 명성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꾸준히 높아졌습니다. 당시 선도적인 샴페인 하우스들은 포장과 홍보로 자신들의 제품에 귀족적인 이미지를 연결하려 노력했고, 이런 노력은 부유한 신흥 중산층 사이에서 샴페인의 인기가 올라가도록 만들었죠. 

인기 있는 이야기나 전설에서 알려진 것과 다르게 돔 페리뇽(Dom Pérignon)은 샴페인을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샹파뉴 와인의 품질 향상과 생산 방식 개선에 중대한 공헌을 했죠. 문헌에 적힌 가장 오래된 스파클링 와인은 1531년 프랑스 남부의 카르카손(Carcassonne) 근처에 있는 상-틸레르 사원(Abbey of Saint-Hilaire)에서 활동하던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만든 블랑께뜨 드 리무(Blanquette de Limoux)입니다. 그들은 1차 발효가 끝나기 전에 와인을 병에 담는 방법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었죠. 1세기 후에 영국의 과학자이면서 의사인 크리스토퍼 메렛(Christopher Merret)은 발효가 끝난 와인에 설탕을 첨가해서 2차 발효를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은 돔 페리뇽이 오빌레 사원(Abbey of Hautvillers)에 발을 들여놓기 6년 전의 일이며,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샴페인을 만들었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보다 4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장 프랑소와 트로이의 1735년 작 <굴 오찬>. 샴페인이 묘사된 최초의 그림
(장 프랑소와 트로이의 1735년 작 <굴 오찬>. 샴페인이 묘사된 최초의 그림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f/De_Troy_Oyster_Lunch.PNG)

1662년에 메렛은 영국 왕립 협회에 논문을 제출했고, 논문에 오늘날 메쏘드 샹파누아즈(méthode champenoise), 또는 전통 방식(Methode Traditionnelle)이라고 부르는 스파클링 와인 제조법을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메렛의 발견은 영국의 유리병 제조술 발전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영국의 유리병 생산자들은 2차 발효 동안 병에서 발생하는 압력을 버틸 수 있는 병을 제조할 수 있었죠. 그러나 프랑스 유리병 생산자들은 스파클링 와인 제조에 쓸 수 있을 만큼 강하고 품질 좋은 유리병을 생산할 기술이 없었습니다. 영국의 시인인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는 1663년에 와인의 거품이 올라가는 모습을 빗대어 “활발한 샴페인”을 언급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병을 폭발시키거나 코르크 마개를 튀어 나가게 만드는 탄산가스를 뿜어내는 스파클링 와인을 "악마의 와인(le vin du diable)"이라 부르며 꺼렸습니다. 1844년에 아돌프 자끄송(Adolphe Jacquesson)이 탄산가스 때문에 코르크가 튀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철사로 만든 고정구를 발명했습니다. 이를 뮤즐레(muselet)라고 하죠. 그러나 초기의 고정구는 장착하기 힘들고 제거하기도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샴페인은 오늘날 병 안에서 2차 발효로 탄산가스를 만드는 방법과 다르게 1차 발효가 끝나기 전에 병에 담는 방법으로 생산했습니다. 이를 "시골 방식(méthode rurale)"이라고 부르죠. 크리스토퍼 메렛이 스파클링 와인 생산법을 발표하고 약 200년이 지난 19세기 말까지 샴페인은 메쏘드 샹파누아즈라는 2차 발효 방식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19세기의 샴페인은 오늘날의 샴페인보다 더 달았습니다. 단맛이 드라이한 맛으로 변하는 것은 런던으로 샴페인을 수출하던 페리에-주에(Perrier-Jouët) 샴페인 하우스가 1846 빈티지의 샴페인을 달지 않게 만들면서 시작되었죠. 그러나 달지 않은 맛을 뜻하는 "브뤼(Brut)"라는 용어는 1876년에 뽀므리(Pommery) 샴페인의 뽀므리 여사가 영국 샴페인 애호가들의 입맛에 맞는 샴페인을 만든 다음 무어라 부를까 고민하다가 영국을 뜻하는 브리티시(British)를 줄여서 "Brut"라고 표시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겁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2/2

5. 샴페인 명칭의 (사용) 권리(Right to the name Champagne) 샹파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드는 샴페인은 탄산가스를 주입하려면 규정상 반드시 병에서 2차 발효해야 합니다. 일부 국가에선 "Champagne"이라

aligalsa.tistory.com

 

<참고 자료>

1. 휴 존슨, 젠시스 로빈슨 저, 세종서적 편집부, 인트랜스 번역원 역, 와인 아틀라스(The World Atlas of Wine), 서울 : 세종서적(주), 2009

2. 크리스토퍼 필덴, 와인과 스피리츠 세계의 탐구(Exploring the World of Wines and Spirits), 서울 : WSET 코리아, 2005

3. 방문송 외 6인 공저, 와인미학, 서울 : 와인비전, 2013

4. 김의겸 저, 소믈리에 실무, 서울 : 백산출판사, 2007

5. 영문 위키피디아 샴페인 항목

6. 영문 위키피디아 샴페인(와인 생산지) 항목

7. 영문 위키피디아 샴페인 포도밭의 등급 항목

8.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