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 이전의 프랑스 와인 산업
와인이 그저 음식과 함께 마시는 술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 유럽 여러 지역에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와인 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척박한 산지 사이에 폴리스를 세웠던 고대 그리스인이 위대한 그리스 문명을 이룩했을 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적 토대로써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이 와인과 올리브 수출이었죠.
로마인에게도 와인은 단순한 알코올성 음료가 아니라 중요한 수입 수단이었습니다. 1세기경 로마 황제 도미치아누스 황제는 이탈리아 반도의 와인 산업을 보호하려고 오늘날엔 프랑스가 있는 지역인 갈리아 일대와 스페인에서 포도 재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했죠.
중세 시대에도 와인 산업은 국가와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습니다. 중세의 수도원에선 인근의 땅에 포도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었고, 생산된 와인은 성찬식 등에 쓸 것과 수도원의 일상생활에서 마실 것을 제외한 나머지 물량은 근처의 도시에 판매해서 수도원에 필요한 경비를 벌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와인 산업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프랑스 남서부의 아키뗀(Aquitaine)은 도르도뉴, 지롱드, 랑드, 로테가론, 피레네자틀랑티크 등을 포함한 지역으로 중심지는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Bordeaux)입니다. 아키뗀 지역의 통치자로 푸아티에 백작 기욤 10세의 딸이며 아키뗀 여공작인 엘레오노르(Eleonore d'Aquitaine)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이혼하고 영국의 젊은 왕인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 이곳의 와인 산업은 영국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와인 산업에 종사하는 상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막대한 세금도 프랑스 왕이 아니라 영국 왕의 것이 되었죠. 와인 산업으로 인한 아키텐의 풍요로운 부와 막대한 세금의 귀속 문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두 국가 사이에 일어난 백년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인 산업은 오래전부터 유럽 각국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2. 근대의 프랑스 와인 산업
근대에 들어와 프랑스가 와인 산업을 정비하면서 프랑스 와인은 다른 나라보다 앞서기 시작합니다. 1855년에 정부의 주도하에 메독(Medoc) 지역의 고급 와인 61종을 5등급으로 분류했으며, 1935년에는 와인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원산지 명칭 통제(AOC) 제도를 만들고 국립 원산지 명칭 통제원을 세워서 품질을 신뢰할 수 있는 와인을 만들려고 했죠.
1932년에는 메독 지역의 와인 생산자들이 자체적으로 협의해서 크뤼 부르조아 협회를 창설했고, 1955년에는 쌩-테밀리옹(Saint-Émilion)에서 등급 제도를 시행하는 등등 프랑스 와인은 체계적이고 확실한 품질 관리를 통해 다른 나라의 와인과 차별화되면서 앞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와인은 최고급 와인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다른 나라 와인과 차별화되었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프랑스 와인의 명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3. 파리의 심판
하지만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이 없듯 20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와인의 평가와 와인 시장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와인 시장 점유율에서 신세계 와인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프랑스 와인의 입지는 날로 줄어들고 있죠. 더구나 품질 평가도 더는 프랑스 와인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프랑스 와인의 정체와 신대륙 와인의 성장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1976년과 1986년, 2006년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파리의 심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파리의 심판의 판정 결과에 이의가 있지만, 더는 프랑스 와인의 천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의미심장한 사건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죠.
와인 시장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먼저 미국과 칠레, 호주 등지의 와인 생산자가 포도 재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땅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와인 품질을 향상해 프랑스 와인에 못지않은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구세계의 와인 생산국 중에서 프랑스보다 와인 산업의 발전이 늦었던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도 프랑스 와인법을 참조해서 자국의 와인 산업을 정비한 다음 오랜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뛰어난 와인을 내놓았죠. 소비자들은 신세계의 가격 대비 뛰어난 와인과 구세계의 전통적이면서 개성적인 와인에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전통적인 법률과 생산 방식을 고수하는 프랑스 와인업계는 서서히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와인에 관한 열정과 자본을 갖춘 와이너리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포도원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와인 양조에 신기술을 적용해 여전히 프랑스 와인의 고고한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뛰어난 와인을 만들면서 재평가받는 곳도 있죠. 쇠락해가던 5등급 그랑 크뤼 와이너리인 샤토 도작(Château Dauzac)이 앙드레 뤼르통의 손길을 거쳐 재탄생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와이너리는 여전히 오래되고 낙후한 시설에서 옛날 방식 그대로 와인을 생산합니다. 그러니 맛도 향도 형편없고 앞으로 발전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 갈 뿐이겠죠. 프랑스 당국도 자국 와인 산업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없는 영세한 와이너리까지 살릴 수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