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앞마당 연못처럼 만들어버린 로마는 당대 지중해 세계의 거의 모든 와인 문화를 흡수, 통합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기원전 3~4세기 무렵에는 그리스인이 개간해 놓았던 이탈리아 남부의 포도밭을 접수해서 와인 산업의 토대를 단단히 굳혔죠. 기원전 2세기의 로마 정치가 카토(Cato)는 <농업론(De Agri Cultural)>에서 “포도 재배는 이제 생계가 아니라 이윤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당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가 가내 소비가 아닌 산업 형태를 갖췄음을 알 수 있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그리스와 발칸 반도 북쪽, 이집트, 프랑스, 스페인, 소아시아 반도까지 차례로 정복해서 지중해 세계의 중심 국가로 떠올랐습니다. 대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수 많은 사람이 거주했죠. 기원전 3세기경 로마 시민은 10만 명 정도였지만, 3백 년이 지난 기원 1세기 초에는 무려 백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로마와 주변 지역에서 생활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들이 마셔야 할 와인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당시 로마에서는 매년 1억 8천만 리터의 와인이 소비되었는데, 이는 당시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하루에 0.5리터씩 와인을 마셔야만 달성할 수 있는 수치입니다.
로마의 막대한 와인 수요는 당연히 와인 공급을 위한 포도원의 증가를 불러왔습니다.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포도밭의 확대를 더욱 부채질하게 되죠. 로마 근처에 있는 폼페이시엔 포도밭과 와인 수출입항이 있었는데,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무려 2년 치 물량의 와인이 잿더미가 돼버립니다. 이로 인해 로마로 공급되는 와인이 부족해지자 와인 가격이 폭등했고, 사람들은 한몫 벌기 위해 너도나도 포도 농사에 뛰어들었죠. 하지만 너무 몰려든 나머지 불과 몇 년 만에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났고 도리어 가격이 폭락하고 말았습니다.
온 사방이 포도밭으로 변하는 광경에 넌더리가 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는 92년에 금지령을 내려 로마 본국에서는 더는 포도를 심지 못하게 했고, 속령에서는 키우던 포도나무의 절반을 뽑아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계속 포도나무를 심어서 와인을 만들었고, 결국 황제의 금지령은 280년에 폐기되고 맙니다.
<참고 자료>
1. 로도 필립스 지음, 이은선 옮김, 도도한 알코올, 와인의 역사, 서울 : 시공사, 2002
2. 영문 위키피디아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