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 시음회
지난 11월 30일 오후 12시에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메리어트 힐튼 호텔에서 소펙사(Sopexa)에서 주관하는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 시음회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산 식품 및 농산물 판매촉진을 위한 기관(Société pour l'Expansion des Ventes des Produits Agricoles et Alimentaires Français)'의 약자로 이름 지어진 소펙사는 프랑스 식품, 와인, 라이프스타일의 전 세계적인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1961년에 설립된 마케팅 기관입니다. 국내에서는 프랑스 와인 시음회와 세미나, 소믈리에 경연대회, 식품 박람회, 요리 대회 등등 프랑스 식품 산업에 관한 각종 이벤트를 주관하고 있지요.
프랑스 와인에 관한 여러 가지 굵직굵직한 행사를 많이 주최하지만, 연말에 있는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 시음회야말로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미(大尾)랄 수 있는 이벤트입니다. 보르도 지역의 최고급 와인을 공짜(!)로 시음해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자, 시장에 곧 출시될 보르도 와인의 품질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죠.
다만 일반인도 참관이 가능한 '서울국제주류박람회'와 달리 보르도 그랑 크뤼 시음회는 단 하루만 열리는 관계로 와인 관련 업계의 종사자들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입니다. 제 경우엔 WSET 관련 와인 교육 기관인 와인비젼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시음회에 참여할 수 있었죠. 2011 보르도 그랑 크뤼 전문인 시음회는 2008년 빈티지 와인들을 소개하기 위해 동양권의 3개국 7개 도시에서 진행되었는데, 서울이 그 첫 번째 도시였습니다. 서울 다음에는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그다음엔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복건성의 하문(Xiamen), 마지막으로 광저우의 순으로 진행되었죠. 서울 행사장은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밀레니엄 서울 힐튼 호텔 그랜드볼룸이었습니다.
밀레니엄 서울 힐튼의 위엄 있는 모습. 이날은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오후 12시 즈음엔 비가 한 두 방울씩 흩날리더군요. 다행히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에 호텔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안내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랜드볼룸 전체를 그랑 크뤼 시음회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규모로 진행되었는지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을 듯. 그런데 참석자들의 말을 들어보니 작년에는 규모가 더 적은 호텔에서 진행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한-EU FTA 때문에 국내 와인 시장에 대한 프랑스 와인 업계의 관심이 커진 모양입니다. 그런데 국내가 워낙 불경기라... 저가 와인이나 초고가 와인이라면 몰라도 중간 가격대 와인의 내년 시장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고 봅니다. 이미 작년부터 와인 소매점에서 와인 판매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며 당분간 더 좋아질 것 같지 않거든요.
2. 행사장 모습
오후 12시에 시작이지만 저는 늦지 않게 오려다 보니 30분 전쯤에 도착했습니다. 아직은 한산한 모습을 보이는 접수처이지만, 조금 더 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더군요.
시음을 하다 보면 와인이 잔에 조금씩 남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걸 처리하는 게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에요. 물로 헹궈서 버킷에 버리고 냅킨으로 닦은 다음 다시 사용하곤 하지만, 어떤 분들은 귀찮은지 잔을 거꾸로 들고 와인을 탈탈 털기도 하지요. 이럴 경우 와인 얼룩이 카펫에 남게 되기 때문에 호텔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미리 협조문을 붙여놨네요.
3. 시음회장 모습
12시에 그랜드볼룸의 출입문이 열리고 시음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음회장에 들어서자 바로 오른편에 보였던 리델 글라스 부스의 모습. 한 때 오스트리아의 리델사과 독일의 슈피겔라우사가 와인 글라스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면서 서로 경쟁을 했지만, 현재는 리델이 슈피겔라우를 병합한 상태입니다. 물론 브랜드는 그대로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얼마든지 슈피겔라우 와인잔을 찾아볼 수 있죠.
시음회는 그랜드볼룸 벽 쪽과 중앙에 시음 부스가 설치되어 있는 가운데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각 부스를 오가며 시음을 하고 설명을 들으며 와인 판매자 측과 상담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출품한 와인 전체를 다 시음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반해, 시음 시간은 4시간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빠르게 시음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와인들을 찬찬히 즐기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안타깝더군요. 게다가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다가는 중간도 못 가 취기로 뻗어버리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다 뱉어야 했던 것도 아쉬웠고요. 뭐... 도저히 뱉지 못하고 삼켜버린 것도 조금 있습니다만.
4. 시음 와인
이날 시음한 와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자면,
오-메독(Haut-Médoc)과 쌩-떼스테프(St-Estephe), 뽀이약(Pauillac), 마고(Margaux), 쌩-줄리앙(St-Julien)의 그랑 크뤼들입니다. 1등급 그랑 크뤼와 몇몇 그랑 크뤼는 나오지 않았더군요. 그래도 이렇게 다양한 메독 그랑 크뤼를 한 자리에서 시음할 수 있어서 무척 흐뭇했습니다.
보르도 좌안 지역에 속하며 오-메독 남쪽에 위치한 그라브(Graves)와 페싹-레오냥(Pessac-Leognan) 지역의 그랑 크뤼들입니다. 유명한 샤토 스미쓰 오 라피트(Château Smith Haut Lafitte)는 조금 늦게 갔더니 다 떨어져서 치워버렸더군요. 그래서 예전에 마셨을 때 찍었던 사진을 대신 집어넣었습니다. 샤토 빠프 클레망(Château Pape Clement)도 시음해보지 못했고요.
다음은 강 건너 보르도 우안 지역의 쌩-테밀리옹(St-Émilion) 그랑 크뤼들입니다. 수십 종이 넘는 그랑 크뤼들이 있지만 다 오진 못했고, 그중 일부만 시음회장에 나왔더군요.
그리고 등급은 없지만 높게 평가받고 있는 뽀므롤(Pomerol) 지역의 유명 와인들도 나왔고요.
그랑 크뤼 와인뿐만 아니라 보르도 각 지역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는 와인들도 시음회장에 대거 모습을 드러내어 아주 큰 즐거움을 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모두 훌륭한 와인들인데, 그랑 크뤼가 즐비한 가운데 품질을 겨루다 보니 상대적으로 맛과 향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쏘떼른(Sauternes)과 바르삭(Barsac) 지역의 스위트 화이트 와인 부스들이었는데, 생각과 달리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제가 찾아갔을 때는 시음이 끝났더군요. 그냥 사진만 찍고 왔습니다.
5. 시음을 마치고
보르도 그랑 크뤼 2008 빈티지 와인들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습니다. 참석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2007년 빈티지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작년의 그랑 크뤼 시음회에 참석하지 못해서 어느 정도 더 나은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2008년 빈티지가 훌륭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아직 충분히 숙성하지 않아 제 모습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와인들이 몇 개 있더군요. 그것도 최고급 그랑 크뤼 중에서요. 그러니 만약 2008 빈티지의 그랑 크뤼 와인을 구입하신다면 맛과 향이 제대로 들 때가 언제인지 파악하신 후 드시기 바랍니다. 너무 빨리 코르크를 따신다면 맛과 향을 100% 즐기지 못하고 70%나 60%만 맛볼 수 있으니까요.
자유롭게 시음을 즐기는 참석자들을 뒤로하며 저는 3시 40분쯤 시음회장을 나왔습니다. 시음을 다 끝낸 부담 없는 상황에서 계속 시음회장에 있다간 끊임없이 와인에 손이 갈 거고,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결국 크게 취하게 될 것 같았거든요. 멋지고 매력적인 와인들이 가득한데 마시는 양을 조절하면서 참는 것도 큰 고역이랍니다.
출구에 설치된 안내판을 뒤로하고 돌아오면서 그레이트 빈티지라고 소문이 자자한 2009년 그랑 크뤼 시음회가 진행될 내년에도 꼭 이 시음회에 참석하리라고 마음먹었답니다.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여러 모임이 있을 겁니다. 지금 경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을 한 병 사서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맛과 향을 즐기며 한 해의 마무리를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