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남아공] 수다쟁이 요정들의 발랄한 움직임 - Fairview Goats do Roam White 2009

까브드맹 2011. 1. 19. 08:30

페어뷰 고트 두 롬 화이트 2009

1. 와인의 다양성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와인이 만들어지며 와인 시장에서 유통하는 와인 브랜드만 해도 숫자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애플 앱스토어(Appstore)에 등록된 드라이 엔씨(Dry Nc) 같은 와인 관련 앱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와인 숫자만 해도 120만 종입니다.

이 숫자는 같은 브랜드로 빈티지(Vintage)가 다른 와인을 모두 합한 것이지만, 하나의 브랜드에서 등록된 빈티지가 12개 정도라고 봐도 무려 10만 개의 와인 브랜드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더욱이 많이 판매되지만, 이 앱에 등록 안 된 와인도 있고, 우리나라 가양주(家釀酒)처럼 집에서만 마시는 것도 있으며, 생산량이 적어서 와이너리 주변의 좁은 지역에서만 유통되는 와인도 많죠. 국내에 수입된 와인 브랜드의 숫자도 역시 만만치 않아서 최소 1만 종이 넘는 와인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다양한 와인들이 제각기 다른 맛과 향을 낸다는 겁니다. 빈티지에 따라 향과 맛이 조금씩 다르며, 같은 브랜드에 같은 빈티지의 와인이라도 보관 상태와 식사 장소 등의 요소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기도 하죠. 몇 년 전 같은 브랜드의 1987 빈티지의 와인 두 병을 함께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한 병은 이미 힘이 빠져서 마치 노인처럼 향이 죽고 맛이 싱거웠던 반면, 다른 한 병은 아직도 멋진 향과 힘차고 풍부한 맛을 보여주더군요. 이렇게 와인은 브랜드마다 병마다 다양한 모습과 개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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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마시다 보면 머릿속에 자연스레 이미지가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모든 와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품질이 좋고 개성이 뚜렷할수록 특별한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르곤 하죠. 마치 디자인이 훌륭한 자동차나 핸드폰을 봤을 때 머릿속에 저절로 특별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자동차나 핸드폰은 주로 시각과 촉각을 통해서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와인은 주로 후각과 미각을 통해서 이미지가 떠오르는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와인을 마실 때 느끼는 다양한 개성과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와인이 종종 사람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민족별로, 국가별로, 지역별로 공통된 기질은 존재하지만, 사람마다 개성은 모두 다르죠? 와인 역시 품종별로, 국가별로, 지역별로 공통된 향과 맛이 나타나지만, 브랜드마다 개성이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프랑스 와인은 프랑스 와인의 특징을 가졌고 칠레 와인은 칠레 와인의 특징을 가졌지만, 때때로 프랑스 와인 같은 칠레 와인을 맛볼 수도 있죠.

부드러운 와인, 완고한 와인, 섬세한 와인, 우아한 와인, 조잡한 와인, 탄탄한 와인, 여성 같은 와인, 남성 같은 와인, 품격 있는 와인, 천박한 와인, 수수한 와인, 요염한 와인, 귀부인 같은 와인, 처녀 같은 와인, 소녀 같은 와인, 차도남 같은 와인, 시골 청년 같은 와인, 전사 같은 와인, 유쾌한 와인, 침울한 와인 등등... 다양한 와인을 마실 때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이 와인의 진정한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2. 고트 두 롬 화이트(Goats do Roam White)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팔(Paarl) 지역에서 생산하는 고트 두 롬 화이트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진 와인으로 마치 개구쟁이 요정 같습니다. 고트 두 롬은 남아공에서 스틴(Steen)이라 부르는 슈냉 블랑(Chenin Blanc) 포도를 필두로 다섯 종의 청포도를 잘 혼합해서 만든 화이트 와인입니다. 품종 비율은 슈냉 블랑 28%, 크루첸 블랑(Crouchen Blanc) 20%, 쎄미용(Semillon) 19%, 비오니에(Viognier) 17%, 끌래레뜨 블랑슈(Clairette Blanche) 16%이죠. 가격은 중저가이지만, 품질은 중고가인 아주 착한 와인입니다.

고트 두 롬을 만드는 페어뷰(Fairview) 와이너리의 소유주이며 와인 메이커(Wine maker)인 찰스 백(Charles Back)은 남아공 와인 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와인 생산으로 유명합니다. 와인 뿐만 아니라 페어 뷰에서 만드는 염소 치즈도 유명해서 와이너리 안의 염소 탑은 남아공 와인 여행의 관광 명소라고 하네요. 페어 뷰는 와이너리에서 키우는 염소와 염소 우유를 남아공 북쪽에 있는 나미비아(Namibia)의 고아들에게 공급하는 자선활동도 합니다. 페어 뷰의 와인 레이블에 염소가 많이 그려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합니다.

페어 뷰 고트 두 롬 빌리지
(페어 뷰 고트 두 롬 빌리지의 레이블에는 흑인 어린이와 염소가 그려져 있죠)

페어 뷰의 와인 이름을 보면 찰스 벡이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와이너리의 상징(?)인 염소(Goat)를 와인 이름에 넣으면서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산지가 떠오르도록 지은 것을 볼 수 있죠.

•고트 두 롬(Goats do Roam) : 꼬뜨 뒤 론(Cote du Rhone)

고트 로티(Goat Roti) : 꼬뜨 로띠(Cote Rotie)

보어 도(Bored Doe) : 보르도(Bordeaux)

고트 도어(Goat Door) : 꼬뜨 도르(Cotes d'Or)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어서 와인을 구매하는 사람이 재미난 작명 솜씨에 웃음 짓도록 합니다. 마치 아디다스와 아디도스, 나이키와 나이스 같은 감각이랄까요?

 

 

3. 와인의 맛과 향

황톳빛이 도는 투명한 밀짚 색입니다. 풍성한 향이 나옵니다. 오렌지 기름과 살짝 볶은 커피콩 향, 덜 익은 멜론 같은 열대과일 향이 나옵니다. 처음엔 조금 서툰 몸짓을 하는 듯한 향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우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가벼운 무게감과 함께 탄산이 없는데도 입안에서 발랄하게 쏘아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마치 입안에서 수다쟁이 요정들이 까르르 웃어대며 노닐다 부딪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죠. 적당한 산미와 살짝 단 풍미가 있습니다. 조금 쌉쌀한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지며 기분 좋은 느낌을 전해주죠. 오크 처리를 안 하고 슈냉 블랑을 비롯한 다섯 가지 청포도를 버무려서 그런지 과일 풍미가 많이 나며 재미난 맛과 느낌을 전해줍니다. 마치 입에 갓 짠 오렌지 기름을 머금은 듯한 향과 맛이죠. 깊고 우아한 맛은 없지만, 신선하고 활기차며 여러 느낌을 짓궂게 전달해 줍니다. 장난기 많은 들꽃 요정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와인으로 시간이 지나면 개구쟁이 같던 모습이 슬슬 숙녀처럼 우아해집니다. 여운도 제법 길고 기분 좋게 끝마무리해 줍니다.

다섯 가지 포도를 잘 섞어 신선하고 활기차며 재미난 와인을 만들어냈습니다. 남아공 와인이 원래 품질과 비교해서 가격이 좋지만, 2만 원대 후반이라는 가격은 정말 좋군요.

생선회나 초밥과 함께 마시면 아주 멋진 맛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특히 초밥 안에 든 고추냉이의 톡 쏘는 매운맛과 와인의 톡톡 쏘는 듯한 느낌이 함께 섞이면 어떤 느낌을 줄지 무척 궁금합니다. 흰살생선구이와 조개 요리, 생선가스 같은 생선튀김 요리 등과 먹어도 좋습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B-로 맛과 향이 훌륭한 매력적인 와인입니다. 2011년 1월 17일 시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