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호주] 그날의 감동은 이제 없지만 추억만은 영원히 - Wolf Blass Presidents Selection Cabernet Sauvignon 2004

까브드맹 2011. 1. 12. 08:29

울프 블라스 프레지던트 셀렉션 까베르네 소비뇽 2004

1. 첫사랑 같은 와인

소주나 맥주, 막걸리를 마시다 보면 사람들과 아주 즐겁게 음주가무를 즐기고 그 순간이 평생의 추억으로 남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즐거웠던 감정은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들과 나눴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지 술의 향과 맛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와인이나 전통주 같은 술은 술 자체의 느낌이 감동으로 다가와 기억 속에 아로새겨지는 일이 있습니다. 술이 보여주는 향기로운 향과 맛있는 맛, 우아한 질감에 코와 혀와 입이 정신을 못 차리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것이죠.

"아니 술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라고 생각할 분도 있겠지만, 정말 정말 맛있는 술을 마신다면 틀림없이 감탄사를 연발할 겁니다. "오 하나님! 죽기 전에 샤토 페트루스_Chateau Petrus를 좀 더 마실 수 있게 해 주세요! (Oh god! I hope I get some more Chateau Petrus before I die)"라고 외쳤던 뉴욕의 유명한 가십 칼럼니스트 리스 스미스(Liz Smith)[각주:1]처럼 "오 하느님 맙소사! 이 술을 더 마실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외칠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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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2001년 봄부터 3개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와인 맛을 잘 몰랐습니다. 이건 달구나, 이건 안 다네, 이건 떫구먼, 이건 가볍군. 정도였지 사람들이 와인을 평가하는 여러 가지 얘기가 이해되질 않았고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죠. 다만 좋다는 와인을 마셔보면 다른 것보다 맛있게 느껴졌고, 싸다는 와인을 마셔보면 평범하거나 별로라고 생각되는 그런 느낌만 받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30분 동안 코를 잔에 박고 향에 취했던 첫 번째 와인이 바로 "울프 블라스 프레지던트 셀렉션 까베르네 소비뇽(Wolf Blass Presidents Selection Cabernet Sauvignon)"이었습니다. 와인 잔도 아니고 흔한 맥주잔에 따랐는데도 강렬하게 뿜어 나오던 과일 향과 바닐라 향, 박하 향에 매혹되고, 진하고 묵직하면서 부드러운 질감에 연신 감탄하면서 마실수록 줄어드는 와인이 아까워서 조금씩 조금씩 마셨던 기억은 아직도 제 뇌리에 생생합니다. 그것이 제가 와인을, 아니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감동을 했던 사건이었고, 이후 제 생활에서 와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죠.

시간이 지나면서 더 비싸고 더 좋은 와인을 마시고 더 강한 감동을 한 적도 많았지만, 울프 블라스 프레지던트 셀렉션 까베르네 소비뇽에서 느꼈던 충격과 감동만큼 뇌리에 깊게 남은 와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첫 경험'은 각별한 법이라 그런 걸까요? 지금은 울프 블라스 프레지던트 셀렉션 까베르네 소비뇽을 마셔도 그때 같은 감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역시 좋은 와인이로구나." 하는 느낌만 있을 뿐이죠. 하지만 첫사랑의 여인을 다시 만났을 때 예전 같은 두근거림은 없을지라도 마음속에 아련하고 따스한 감정은 되살아나듯 이 와인 역시 언제까지라도 제게 잊히지 않을 그리운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2. 와인의 맛과 향

사우쓰 오스트레일리아(South Australia)의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100%로 만드는 울프 블라스 프레지던트 셀렉션 까베르네 소비뇽의 색은 아주 짙은 루비 빛으로 여과하지 않았는지 약간 탁합니다. 처음엔 검은 체리와 말린 자두가 떠오르는 검은 과일 향이 풍부하게 나옵니다. 이어서 오크와 생나무의 싱그러운 향이 나오죠. 약간의 박하 향과 그을린 나무 향도 조금 맡을 수 있습니다. 초반부터 향이 풍부하지만, 조금 단순합니다. 하지만 개봉 후 20분 정도 지나면 박하와 바닐라 향이 강해지면서 우아하고 그윽한 나무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말린 검은 과일의 풍부하고 생생한 향도 가득해지죠. 검은 과일과 향긋한 나무 향이 잘 어울리는 가운데 그윽하고 편안한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끄럽고 탄력 있는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며 마치 과일 조직을 씹는 듯한 진한 질감을 가졌습니다. 초반에 혀와 잇몸에 탄닌이 살짝 끼는 것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묵직하면서 비로드 같은 느낌이 주로 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탄닌의 떫은 느낌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질감만 남습니다.

 

 

둥글고 부드러운 신맛이 느껴지며 살짝 단 느낌도 있습니다. 마치 잘 익은 말린 자두를 갈아 넣은 듯한 그런 느낌? 뒷맛에는 약간의 박하 풍미를 맛볼 수 있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약간 그을린 포도 잼을 마시는 듯한 맛이 나고, 매력적인 산미가 계속되면서 기분 좋은 쌉쌀한 맛이 살짝 이어집니다. 질감이 점차 부드러워지면서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신맛이 두드러진 과일 풍미가 주로 나타나죠. 여운은 상당히 길게 이어지면서 입안에 울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탄닌과 산미, 알코올 등의 각 요소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훌륭한 풍미와 부드러운 질감을 보여줍니다. 마시기 편하고 즐거움을 주는 와인이죠. 맛에 약간 아쉬움이 남지만, 계속 변화하는 풍부한 향을 고려해보면 5만 원 초-중반대의 가격은 이해가 갑니다.

미국식 소스를 얹은 소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 소갈비, 갈비찜, 그릴에 구운 소고기구이 등과 잘 어울립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B-로 맛과 향이 훌륭한 매력적인 와인입니다. 2011년 1월 13일에 시음했습니다.

와인 생산자인 울프 블라스에 관해선 아래의 글을 참조하세요.

 

[호주] "바로싸의 남작" - 울프 블라스(Wolf Blass)

1. 울프 블라스(Wolf Blass) "블렌딩의 달인" "랭혼 크릭(Langhorne Creek)의 전설" "바로싸(Barossa)의 남작" 이런 엄청난 칭송은 모두 울프 블라스(Wolf Blass)가 오랜 세월에 걸쳐 받아온 찬사입니다. 그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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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녀는 어느 날 뉴욕의 유명한 레스토랑인 라 꼬트 바스크(La Cote Basque)와 라 파비용(La Pavillon)의 주인인 앙리 쑬(Henri Soule)에게서 1960년대 초에 그가 처음 수입한 와인 한 병을 받았고, 그녀는 이 와인을 닭튀김과 함께 별 생각 없이 마셔버렸답니다.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위와 같은 통한의 외침이 나오고 말았다는군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