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프랑스] "나의 마음은 늘 깔롱에 있소." - Chateau Calon-Segur 1996

까브드맹 2010. 7. 26. 00:10

샤토 깔롱-세귀르 1996

1. 샤토 깔롱 세귀르

"내가 와인을 만드는 곳은 라피트와 라투르이나, 내 마음은 늘 깔롱에 있소."

이 말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보르도 와인 메이커였던 "니콜라스 알렉상드르 마르퀴스 드 세귀르 후작(Nicolas -Alexandre Marquis de Ségur(1695~1755))"이 한 말입니다. 세귀르 후작은 당시 프랑스 국왕인 루이 15세가 '포도나무의 왕자'라는 별칭을 지어줄 정도로 보르도 와인업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던 사람이었죠. 그는 세 군데의 샤토를 갖고 있었는데, '샤토 라피트(Château Lafite)', '샤토 라투르(Château Latour)' 그리고 '샤토 깔롱-세귀르(Chateau Calon-Ségur)' 였습니다.

당시엔 보르도 메독 와인의 공식 등급이 아직 매겨지지 않았지만. 샤토 라피트와 샤토 라투르는 이미 네고시앙 사이에서 최고의 와인으로 인정받아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훗날 1855년 메독 와인의 등급을 매길 때 당시 네고시앙들이 거래하던 와인 가격을 기준으로 샤토 등급을 결정했고, 샤토 라피트와 샤토 라투르는 자연스럽게 1등급의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한편 깔롱-세귀르는 3등급으로 선정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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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샤토 라피트와 샤토 라투르가 더 훌륭한 와인인데도 세귀르 후작은 왜 깔롱-세귀르에 마음이 가 있다고 했을까요? 아마 샤토 라피트와 샤토 라투르는 상속받은 것이지만, 샤토 깔롱-세귀르는 본인이 직접 찾아보고 구매한 샤토여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본래 갖고 있던 것보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에 더 애착이 가기 마련이니까요. 아니면 깔롱-세귀르의 맛과 향이 후작의 입맛에 더 맞았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세귀르 후작은 1718년에 깔롱-세귀르를 산 후 죽을 때까지 애착을 갖고 가꿨으며, 깔롱에 대한 후작의 애틋한 마음은 그의 후손들이 와인 레이블에 그려 넣은 통통한 하트 표시로 이어집니다. 후대에 이르러 레이블의 하트 표시는 그 뜻이 조금 변해서 남녀 간의 사랑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고 밸런타인데이의 완벽한 선물이 되었죠.

우리나라와 일본에선 제과업계의 마케팅 때문에 밸런타인데이 때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지만, 서양에서는 카드와 함께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이때 깔롱-세귀르는 레이블 디자인 덕분에 인기 아이템이 되었을 겁니다.

 

 

2. 깔롱 세귀르 1996

제가 마신 깔롱-세귀르는 1996년산으로 로버트 파커가 92점의 점수를 준 빈티지입니다. 보르도 쌩-테스테프(St-Estephe) 마을에서 수확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53%에 메를로(Merlot) 38%와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7%,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2%를 섞어서 만들었죠.

처음에 느껴지는 향은 싱싱하고 진한 나무 향입니다. 마르지 않은 생나무 느낌이 나는 향으로 저가 와인에서 맡을 수 있는 잔가지의 비린 냄새가 아니라 물이 오른 큰 나무의 향긋한 향이죠. 백단나무에서 맡을 수 있는 향과 비슷하더군요. 초반엔 과일 풍미가 두드러지지 않고 동물 가죽의 비릿한 내음이 더 강했습니다. 그리고 말린 빨간 고추 냄새가 나는데, 파커가 '아시아 향신료 냄새'라고 표현했던 그 향일까요?

맛을 보면 산미가 풍부하고 씁쓰름한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탄닌의 거친 기운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억센 탄닌과 강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쌩-테스테프 와인답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슬슬 단맛과 함께 과일 풍미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맛에서도 새콤달콤한 느낌이 나며, 상큼한 산미와 함께 단 풍미가 적당하게 납니다. 잔에 따른 지 30분이 넘어가면 아주 맛있는 단계로 돌입해서 풍부한 글리세린의 느낌과 함께 진득하고 진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근한 가죽 노린내는 여전하지만 역하지 않고, 야성적이며 기분 좋습니다. 코르크를 딴 지 2시간이 지났을 때에도 여전히 상태가 좋으며, 이후 1~2시간이 더 지나도 맛과 향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쳐나는 와인입니다.

 

 

파커는 깔롱-세귀르 1996 빈티지에 대해 

"짙은 루비색에 말린 허브와 아시아 향신료 냄새, 블랙 체리 잼과 계피 향이 어우러져 있으며, 아주 깔끔하고 피니쉬에 탄닌이 상당히 많이 느껴진다. (최종시음 2002.12)"

라고 테이스팅 노트를 적었습니다. '신의 물방울' 2권에서는 깔롱-세귀르 2000년이 나왔는데, 파커는 95+라는 높은 점수를 준 놀라운 빈티지였죠. 2000년은 그레이트 빈티지(Great Vintage)라고 할 정도로 기후가 좋아서 훌륭한 보르도 와인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깔롱-세귀르도 예년보다 훨씬 뛰어난 품질로 생산되었습니다.

그릴에서 레어 정도로 익힌 와규나 최고급 한우 등심 스테이크와 함께 마시면 최고의 마리아쥬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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