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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류주] 인류가 창조한 술, 증류주의 탄생

까브드맹 2010. 7. 24. 00:05

증류주 제조용 팟 스틸
<증류주 제조용 팟스틸>

효모의 발효 작용으로 만드는 발효주가 자연에 있는 화학 현상을 인류가 활용해서 만든 술이라면, 증류주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인류의 기술로 만들어낸 술입니다. 발효된 술에 열을 가해 끓는 점이 물보다 낮은 알코올을 추출해서 만드는 증류주는 '끓는점의 차이를 이용해서 액체 상태의 혼합물을 분리'하는 증류법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나올 수가 없는 술이죠.

1. 증류법의 탄생

증류법은 의외로 오래전에 발명되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경에 이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빌로니아인이 원시적인 증류 장치를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빌로니아에서 최초로 탄생했다고 보이는 증류기술은 이윽고 주변 지역으로 천천히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쪽으로는 기원전 5세기경에 최소한 인도지역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 학자들이 인도 서북쪽에 있는 파키스탄에서 알코올 분리를 위해 사용한 기원전 500년경의 증류 장치를 발굴했다고 합니다.

서쪽으로는 기원후 1세기경에 고대 그리스로 증류기술이 전달되었고, 이후 그리스에서 대량의 증류주를 제조했다고 합니다. 이때 그리스에서 만든 증류주에 관한 정보를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웹상에서는 특별한 정보를 찾을 수 없더군요. 다만 당시의 와인에 관한 기록은 많아도 그리스의 증류주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는 걸 보면 특별히 인기를 끌지 못한 채 그리스 문명권의 쇠퇴와 함께 잊힌 것 같습니다. 4~5세기 무렵 일단의 수도승들이 증류주 제조기술을 갖고 영국에 건너갈 것으로 추정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위스키와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로 짐작됩니다.

증류법이 탄생한 것은 이처럼 오래전 일이었지만, 초기에는 기술이 조악해서 술 제조에 별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대 이집트에서는 숯을 만드는 과정에서 증류 기술을 사용했다고 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도 선원들이 바닷물을 끓일 때 발생하는 수증기를 스펀지 같은 것으로 흡수해서 식수를 만들기 위해 증류 기술을 썼다고 합니다. 또, 향수를 만들 때도 증류법을 사용하는 등 주류 외에 다른 물질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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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증류법을 개선한 이슬람 화학자들

증류주를 만들기 위해 증류법을 사용하려면 좀 더 완벽한 증류를 위한 개선이 이루어져야 했고, 8세기경 중세 이슬람 화학자들의 노력으로 필요한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알코올이나 에스테르 같은 물질의 공업적인 정제를 위해 증류법을 활발히 사용했고,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증류법을 개선했습니다. 증류법으로 순수한 알코올을 추출한 최초의 화학자는 '아부 유수프 야쿱 이븐 이샤크 알 킨디'라고 합니다. 하지만 와인을 증류해서 얻은 물질에 알코올이란 이름을 붙인 사람은 또 다른 중세 이슬람 화학자인 '자비르 이븐 하이얀(Jabir Ibn Haiyan)'이었습니다.

Jabir Ibn Haiyan

그는 의학과 화학에 관한 여러 기술을 연구하며 많은 실험을 하던 도중 알코올을 추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천연 상태에서 와인을 발효하는 도중에 와인 안에 생긴 불순물을 태워 버리고 그 정수액을 분리해서 원래의 와인보다 더 강한 응집물을 얻어낸 거죠. 자비르는 이것을 'al kulhul(알코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al kulhul'이라는 단어는 원래 아랍 여인들이 그들의 속눈썹을 더욱 길고 윤기 있게 보이게 하려고 이용했던 일종의 화장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비르가 고안한 여러 가지 실험 도구와 방법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된다고 하니 당시 이슬람 세계의 놀라운 화학 수준을 짐작할 수 있죠(Robert Briffault (1938), The Making of Humanity, p. 195:). 이후 이란의 화학자 '무함마드 이븐 자칼리야 알 라지'가 이런 증류법과 증류 도구들을 사용해서 세계 최초로 석유에서 등유를 증류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븐 시나

11세기 초에는 '이븐 시나'가 정유(精油)를 정제하려고 수증기 증류법이란 증류기술을 사용하는 등 이슬람 세계에서 증류법은 날로 발전합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의 화학자들은 향수 제조나 공업용 재료를 만들기 위해 증류법을 활발히 사용했으나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교 교리 때문에 증류주를 만들려고 증류법을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증류주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만들어지지 못하고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3. 유럽과 동아시아로 전파되어 새로운 술을 탄생시킨 증류법

이슬람 화학자들이 개선한 증류법은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유럽인들을 통해 12세기경에 중세 유럽으로 전파됩니다. 처음에는 당시 유럽에 유행한 연금술을 위한 중요한 기술로 받아들여져 연금술사들이 사용하고 연구했지요.

연금술사를 묘사한 그림

하지만 연금술사들이 증류를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것은 '알코올'이 아니라 '금'이었기에 한동안 증류주는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술의 주류는 여전히 와인 아니면 맥주였지요. 그러다가 13세기에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 대학교 의학 교수였던 '빌뇌브(Villeneuve)' 교수가 자비르가 발견했던 알코올을 극적으로 다시 찾아냅니다. 값싼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는 생각에만 사로잡혔던 연금술사들과 달리 당시 의사들은 만병통치약을 찾기에 급급했던 상황이었죠. 빌뇌브 교수도 만병통치약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하던 도중 증류법으로 알코올을 추출한 겁니다. 교수는 알코올이 주성분인 증류주 속에 만병통치의 영험한 기운이 들어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증류주(알코올)에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으로 "생명수(aqua vitae, 아쿠아 비떼)"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브라운 쉬바이그의 &lt;증류 기술&gt;

빌뇌브 교수는 증류주에 대해 "이것은 실로 불후 불변의 물이기 때문에 '생명수'라는 이름이 아주 적절하다. 이 술은 생명을 연장해 주고 모든 불쾌감을 깨끗이 제거하며 마음을 소생시켜 주고 젊음을 지켜 준다."라고 쓰면서 증류주에 대해 극찬을 했습니다.

15세기가 되어 독일의 연금술사 '브라운 쉬바이그'는 《증류 기술》을 저술했는데, 1512년 출판된 이 책은 증류법만 독자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으로 이후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며 전 유럽에 증류법을 알렸습니다. 이후 증류법은 전 유럽으로 퍼져 증류주의 생산을 촉진했고, 거대한 증류기를 이용한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진 등의 생산이 이어집니다.

성을 공격하는 몽골군

서양의 증류주가 십자군 전쟁을 통한 증류기술의 전파로 탄생했다면, 동양의 증류주는 몽골의 정복 활동으로 인한 문물 교류의 덕이 컸습니다. 알려졌다시피 몽골인은 동쪽으로는 고려와 만주, 서쪽으로는 러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정복해서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유목민족이라 농업보다 목축과 교역을 중시했고, 외국의 새로운 문물을 편견 없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몽골인은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선 교역이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고, 제국 안에서 동서양의 문화와 기술은 활발하게 교류되었습니다.

중동에서 탄생한 증류법도 이 시기에 동쪽의 중국과 한국에 본격적으로 전해집니다. 이윽고 동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증류법을 이용한 다양한 증류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탁주를 증류해서 만든 소주가 탄생합니다. 증류법은 대개 몽골군의 주둔지를 따라 퍼져나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동과 개성 지역에 몽골군이 주둔한 적이 있었죠. 이후 안동지역에서 증류주를 활발하게 생산했고, 오늘날에도 안동소주는 최고의 전통 소주로 손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