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칠레] 소주를 눌러라! - Manso de Velasco 1999

까브드맹 2010. 1. 4. 09:38

미구엘 토레스 만소 데 벨라스코 2007
(사진은 2007 빈티지입니다)

1. 미구엘 토레스 만소 데 벨라스코 1999

칠레 와인에 대한 선입관이 있었습니다. 싸고 괜찮지만 아, 이거다 하면서 마음에 드는 것은 없다는 거죠. 가격 대비 효율은 높은데 맘에 들 만큼 좋은 와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알마비바 같은 고급 와인은 빼고요. 그래서 아주 싼 와인이 아니라면 칠레 와인에는 손이 잘 안 갔습니다. 차라리 몇만 원 더 붙여서 호주나 이탈리아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제 와인 선택이었는데, 시음회 때 한 친구의 추천을 받아서 얼떨결에 칠레 와인 한 병을 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소주를 누를 수 있는 와인이라나? 

집에다 고이 모셔두고 이제나저제나 딸 날만을 생각했는데, 어느 주말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서 시칠리아산 네로 다볼라 와인 작은 것(375ml짜리)을 하나 따서 오후의 석양빛을 쪼이며 마셨지요. 작은 병을 마시고 난 후에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새로 한 병을 마시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와인이 미구엘 토레스 만소 데 벨라스코(Miguel Torres Manso de Velasco)입니다.

칠레 센트럴 밸리(Central Valley)에 있는 쿠리코 밸리(Curico Valley)에서 재배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100%로 만든 만소 데 벨라스코는 칠레 와인에 대한 제 선입견을 깨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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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인 시음기

코르크를 따서 와인 잔에 따르니 향이 잔잔히 퍼져나 왔습니다. 그리고 한 모금 입에 넣으니 "Oh! My God!!"이라는 외침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칠레의 중가 와인 중에 이런 보물이 있었을 줄이야! 하는 느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까베르네 쇼비뇽 특유의 향을 소란스럽지 않으면서 지칠 줄 모르게 뿜어냈지만, 입에 닿은 느낌은 까베르네 쇼비뇽 같지 않았습니다. 메를로 혹은 까르메네르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정말 비단 같은 느낌이 입안에 감돌았고 탄닌은 둥글게 둥글게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우고, 다시 또 한 잔... 칠레 와인에서 곧잘 느껴지는 후루티하고 경쾌하지만 때로는 조잡하고 가벼운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스페인의 와인 명가인 토레스(Torres)의 간판을 달고 나와서인가? 뭔가 유럽풍의 그윽하고 중후한 느낌이 연달아 입안에 들어오는 느낌에 정신을 못 차렸지요. 코끝으로 풍기는 과일 향과 입안에 느껴지는 부드럽지만 무거운 질감. 그리고 입안을 가볍게 자극해오는 탄닌의 질감은 저를 순식간에 매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칠레에 더 좋은 와인도 많지요. 돈 멜초(Don Melchor)라든가, 알마비바(Almaviva)라든가, 세냐(Sena)라든가. 하지만 5만 원대의 가격에 이 정도 품질의 와인을 찾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래에 마셔본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와인, 한마디로 숨어있던 보물입니다. 소주를 누를 수 있느냐고요? 충분히 그 독한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고기와 양고기 등 육류 요리, 오래 숙성한 치즈와 잘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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