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프랑스] 내게 흙마당이 보이는 테라스를 보여줘 - Bonfils La Belle Terrasse Shiraz 2005

까브드맹 2009. 11. 3. 15:30

본필 라 벨르 테라스 쉬라즈 2005

1. 남부 프랑스

베란다  [veranda] 서양 건축에서 대개 가옥 밖으로 나와 있는 벽이 없고 난간으로 둘러쳐진 지붕 덮인 부분.

테라스 [terrace] 실내에서 직접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방의 앞면으로 가로나 정원에 뻗쳐 나온 곳. 일광욕하거나 휴식처, 놀이터 따위로 쓴다.

베란다와 테라스는 엄연히 다른 구조물이지만 보통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다만 베란다라고 하면 아파트가 연상되고, 테라스라고 한다면 별장이나 콘도에 딸린 구조물이 생각나죠. '라 벨르 테라스(아름다운 테라스)'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와인에서 느낀 것은 깔끔한 베란다지 아름다운 테라스는 아니지 않은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지역은 프랑스에서 온갖 포도 품종의 시험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OC 규정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수많은 양조자가 이곳에 모여 여러 가지 형태의 와인을 만들고 있지요. 규정 외의 와인을 만들기 때문에 AOC 4등급의 분류 체계에서 세 번째 등급인 뱅 드 뻬이(Vin de Pay)가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이에 아랑곳없이 와인 양조자들이 자신의 이상에 맞는 와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등급은 낮아도 최고 등급인 AOC 와인의 뺨을 치는 뛰어난 와인이 나타날 수도 있고, 음식과 함께해야 그럭저럭 빛을 발하는 테이블 와인이 나타날 수도 있는 곳입니다. 남부 프랑스(Sud de France)의 쉬라즈(Shiraz) 포도 100%로 만든 뱅 드 뻬이 독(Vin de Pays d'Oc) 와인인 본필 라 벨르 테라스 쉬라즈 2006은 제게 엄청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와인이기는 하지만, 시음해본 결과 이름하고는 좀 안 맞지 않나 하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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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인 시음기

색은 보라색으로 약간 탁합니다. 첫 향은 블랙커런트와 체리가 섞인 향이 나는데, 쉬라즈 품종의 특징답게 뜨거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물론 진짜 뜨거운 것은 아니고, 기운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맛을 보면 매우 매끄럽고 차가운 느낌이 나며, 바탕에 탄닌의 떫은맛이 조용히 깔렸습니다.

미세한 산도 위에 덮인 약간의 당도. 아름다운 테라스가 보이는 정원인가... 그런데 토속적인 흙바닥이 아니라 조금 가격이 나가는 매끈한 블록이 깔린 정원이랄까? 아니 아니, 주차장이 보이는 아파트 베란다 같다는 느낌이...

시간이 지나니 산도가 도드라집니다. 초콜릿 향과 약간의 코코아 향이 코끝을 스치네요. 쉬라즈라고는 하나 아직 스파이시한 향은 나지 않고 입안에서 강렬한 자극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매끈한 탄닌의 기운이 있을 뿐. 탄닌의 떫은맛이 마른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젖은 바퀴 자국처럼 바닥에 길게 깔려 나옵니다. 30분 정도 지나니 단맛이 깨끗하게 계속 이어지는 맛으로 변합니다.

 

 

40분 정도 지나니 슬슬 쓴맛이 돌긴 하는데 맛의 변화가 프랑스 와인치고는 매우 단순한 편입니다. 시간을 두고 계속 변하는 복합적인 맛이 나오는 구대륙 스타일보다는 빨리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신대륙 스타일을 따른 것일까요? 아니면 2만 원 초반의 와인으로서는 더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와인 자체의 한계 때문일까요? 1시간이 지나니 밋밋한 맛과 향을 보여주며 단맛과 함께 쓴맛은 사라지고 더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처음 이 와인을 오픈하면서 바랬던 것은 이름에 걸맞게 프랑스 시골 마을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저택의 테라스와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거칠고 투박해도 들여다볼수록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구수하고 편안한 느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모습은 깔끔하고 깨끗한 정제된 모습이더군요. 이름에 구애받지 않고 마신다면 틀림없이 이 가격에 적당한 맛과 향을 보여주기는 합니다만, 뭐랄까... 좀 아쉽습니다. 바로 따서 마셔서 좋은 게 아니고, 오픈 후 좀 더 기다려야 슬슬 제 모습을 보여주고 기다린 시간만큼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프랑스 와인의 스타일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해서요. La Belle Terrasse 보다는 The Clean Veranda가 더 어울릴 듯한 와인.

소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 혹은 구이와 잘 맞습니다. 2009년 11월 3일 시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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