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부르고뉴 와인을 매우 좋아합니다. 레드든 화이트든 섬세하고 우아하면서 짜릿하고 강렬하죠. 마을 따라 밭에 따라 높이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는 것도 매력입니다. 그래서 한 번 빠져들면 그 매력에서 헤어나오기 참 어렵습니다. 아니, 헤어날 생각이 아예 안 들죠. ㅎㅎ
2017년 4월 12일 와인 마시기 좋은 봄밤. 청담동 55도에서 열린 와인 시음회의 주제는 <부르고뉴 레드 와인>이었습니다. 물론 샴페인과 멋진 화이트 와인, 마무리용 디저트 와인이 포함된 시음회였죠.
시음회 시작 전에 테이블 세팅 모습입니다.
샴페인 잔, 화이트 잔, 레드 잔 1, 레드 잔 2. 나중에 레드 잔 3이 추가되었습니다.
1. 샴페인 프랭크 봉빌 뀌베 레 벨 부아 블랑 드 블랑 그랑 크뤼(Champagne Franck Bonville Cuvee les Belles Voyes Blanc de Blancs Grand Cru) NV
황금색으로 밝게 빛나며, 0.1~2mm 크기의 거품이 천천히, 미세하게,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샤도네로만 만든 블랑 드 블랑치고는 색이 진합니다. 오랫동안 병 숙성을 하면 색이 진해지곤 합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오크통에서 약 12개월 동안 발효하고 숙성한 후 병에 넣어서 다시 5년 이상 병 숙성을 한다고 합니다. 적어도 6년 이상 숙성되는 거죠.
오랫동안 숙성해서인지 신선한 레몬 향보다 농익은 노란 사과나 배의 향이 나옵니다. 농익다 못해 살짝 곯은 듯한 단 내음입니다. 모과 향도 느껴집니다. 또 구수한 빵 내음과 진한 누룩 향이 강합니다. 과일 향과 숙성 향이 향의 두 기둥을 이루고 여기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향이 퍼져 나옵니다.
묵직하고 잘 짜인 구조감이 돋보이는 샴페인으로 탄탄하고 치밀합니다. 진하고 강한 산미가 인상적이고 농익은 과일 풍미로 인해 달지 않은데도 달다고 착각할 정도네요. 여기에 향긋한 모과와 구수한 이스트, 또는 누룩 풍미가 더해집니다. 입안에 강렬한 자극을 주며 여운도 상당히 기네요. 노란 과일 풍미에 이스트 풍미가 섞여서 길게 이어집니다. 매우 훌륭합니다.
균형이 매우 잘 잡혔고, 풍성한 산미와 질감, 과일과 이스트 풍미가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함께 한 음식은 빵과 올리브 오일이었습니다.
2. 북부 론 꽁드리유의 이.기갈 꽁드리유 라 도리안느(E.Guigal Condrieu La Doriane) 2014
비오니에 100%로 만든 와인입니다. 이.기갈에선 세 종류의 꽁드리유 와인을 생산합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기갈 꽁드리유와 상대적으로 더 고급인 루미니상스(Luminescence), 그리고 라 도리안느입니다. 라 도리안느는 매년 2만 병가량 생산되며, 새 오크통만 사용해서 12개월간 숙성합니다. 풍성한 견과류 향의 비밀이 여기에 있는 듯 합니다.
중간 농도로 깨끗하게 빛나는 밀짚 색입니다. 처음엔 고소하고 기름진 견과류 향이 흘러나오고, 페트롤 향도 약간 섞여 있습니다. 이어서 약배전으로 볶은 커피콩과 향긋한 나무 향이 나오고, 커피와 고급 밀크초콜릿 향도 약간 섞여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흰 꽃과 복숭아 같은 과일 향이 나오기 시작하며 앞에 나온 향들과 어울려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죠.
부드럽고 기름지며 잘 짜인 구조감을 가진 와인으로 깨끗하고 깔끔합니다. 매우 드라이하며 산도는 중간 정도입니다. 기름진 맛과 볶은 견과류의 달고 고소한 풍미가 가득합니다.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시간이 갈수록 산미가 살아나면서 복숭아나 살구 같은 과일 풍미가 나타납니다. 억세진 않지만 속은 강인한 외유내강 스타일의 와인으로 세련되지만 자극적이진 않습니다. 고소한 견과류와 커피콩, 흰 꽃의 풍미가 은은하고 길게 이어집니다.
산미가 강하진 않으나, 여기에 맞춰 알코올과 여러 가지 풍미가 조화롭게 어울립니다. 우아하고 섬세한 와인으로 장시간에 걸쳐 천천히 마시면 계속 놀라운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함께 한 음식은 까망베르 치즈를 넣은 우엉 수프.
꽁드리유와 수프를 먹은 후에 나온 음식은 숭어살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소스와 허브를 올린 숭어 카르파쵸였습니다. 맛있지만 다음에 나올 부르고뉴 레드와 어울릴 것 같진 않아서 잽싸게 냠냠…
3. 쥬브레 샹베르땅 클로드 듀가(Gevrey-Chambertin Claude Dugat) 2013
1855년에 설립된 도멘 클로드 듀가는 일반 부르고뉴 레드 와인부터 그랑 크뤼까지 모든 등급의 와인을 생산합니다. 특이하게도 샹베르탕 와인을 중점적으로 만드네요. 그리오뜨 샹베르땅(Griotte-Chambertin), 샤뻴르 샹베르땅(Chapelle Chambertin), 샤름 샹베르땅(Charmes-Chambertin)의 세 그랑 크뤼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그랑 크뤼 와인을 만들고, 쥬브레 샹베르땅 마을의 1등급 밭인 라보 쌩 자끄(Lavaux-Saint-Jacques)의 포도로도 1er 크뤼 와인을 만들죠. 그리고 1등급 포도밭의 포도로 쥬브레 샹베르땅 1er 크뤼 와인을, 일반 포도밭의 포도로 쥬브레 샹베르땅 와인을 만듭니다. 쥬브레 샹베르땅 와인은 콘크리트 발효조에서 만든 후 새 오크통 50%, 중고 오크통 50%으로 나눠서 16~18개월간 숙성된 후 병입됩니다.
중간 농도의 맑은 루비색으로 붉은 체리, 살짝 매콤한 향신료, 시원한 오크 향이 퍼져 나옵니다. 풋풋한 풀 냄새 같은 식물성 향도 맡을 수 있습니다.
매우 우아하고 섬세한 질감을 지닌 세련된 와인입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탄닌이 좋고, 산딸기와 크랜베리를 씹는 듯 짜릿한 신맛과 붉은 과일의 단 풍미가 일품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향신료와 향긋한 나무 풍미가 뒤섞여 강렬한 맛을 전해줍니다. 멋지군요! 새콤한 맛과 향긋하고 단 풍미가 계속 입안에 남으면서 길게 이어집니다. 멋지고 우아하며 긴 여운입니다.
질 좋고 풍성한 산미와 실크 같은 탄닌, 적당한 힘을 지닌 알코올의 삼박자가 좋고, 붉은 과일과 향신료의 강렬한 풍미가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함께 먹은 음식은 미트 소스를 얹은 라구 파스타입니다. 소라 같이 생긴 모습이 귀엽네요. 맛도 좋습니다.
4. 쥬브레 샹베르땅 클로드 듀가(Gevrey-Chambertin Claude Dugat) 2005
빈티지만 다른 두 와인이 나온 것은 빈티지와 숙성에 따른 차이를 느껴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 와인은 빈티지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차이를 또렷이 느껴보려면 빈티지만 다른 같은 와인을 동시에 시음하는 버티컬 테이스팅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와인은 같은 생산자의 같은 와인입니다만,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시간. 2013년은 양조와 숙성을 끝낸 다음 병입된 시기를 2015년으로 보면 병 숙성 시간은 채 2년이 안 됩니다. 2005년은 2007년에 병입된 걸로 보면 병 속에서 거의 10년의 세월을 보냈죠. 두 번째는 빈티지에 따른 차이입니다. 2013년은 프랑스의 와인 가이드인 하슈태 드 뱅(Hachette des Vins)에선 14/20점, 미국의 와인 잡지인 와인 스펙테이터에선 92점을 준 평범한 해입니다. 이에 비해 2005년은 하슈태 드 뱅에선 19/20점, 와인 스펙테이터에선 98점을 준 그레이트 빈티지죠. 꼬뜨 드 뉘 지역에선 최근 15년 사이에 가장 평가가 좋았던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013년은 지금 마시거나 좀 더 보관해둬도 좋지만, 2005년은 아직 보관해둬야 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빈티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병입 후에 언제 마시는지, 보관 상태는 어떤지, 그리고 와인을 다루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우열이 갈릴 수 있죠. 그렇지만 빈티지가 다르고 점수 차가 크면 와인 맛은 확실히 다릅니다.
쥬브레 샹베르땅 클로드 듀가 2013과 2005도 그랬습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했으면 같은 생산자의 같은 와인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둘 다 훌륭했지만, 음식과 함께라면 2013년을, 시간을 두고 와인만 마신다면 2005년을 선택하겠습니다.
아직 진한 루비색이지만, 주변부는 석류색 기운이 약간 돕니다. 붉은 과일과 향신료 향이 두드러졌던 2013과 달리 부엽토 향이 먼저 나타납니다. 붉은 과일의 과즙 향도 살짝 나오고, 말린 꽃 향과 나무 향도 나타납니다. 깨끗하고 정제된 느낌이며 시간이 지나면 신선한 쇠고기 향이 퍼지고, 커피콩 향도 살짝 풍깁니다.
더 오래된 와인인데도 불구하고 2013보다 묵직합니다. 탄닌도 더 강해서 부드럽지 않고 입안이 까끌까끌할 정도입니다. 다소 혼탁한 느낌이 드는 산미이지만 양은 풍부합니다. 억센 탄닌이 느껴지는 가운데 검은 과일과 버섯, 부엽토, 동물성 풍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살짝 씁쓸한 맛 속에 나무와 스모키 풍미가 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풍미가 숨어있습니다.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와인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셔야 진가를 다 드러낼 것 같습니다. 부엽토와 나무, 가죽, 훈연의 풍미를 남기는 여운은 길고 무겁게 이어집니다.
탄닌이 강하고, 산미는 좀 정돈되지 못한 느낌입니다. 아직 마시기엔 일러서 그럴까요? 좀 더 두고 마셨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혔습니다.
2013과 동시에 시음했기에 함께 한 음식은 역시 라구 파스타입니다.
5. 그랑 에세죠 죠르주 노에라 그랑 크뤼(Grand Echezeaux Georges Noellat Grand Cru) 2004
아름답고 연한 석류석 색을 띤 와인입니다. 처음엔 풋풋하고 기분 좋은 허브와 향긋한 향신료 향이 나다가 이내 라즈베리와 크랜베리 같은 붉은 과일 향이 퍼져 나옵니다. 버섯 향과 동물성 노린내가 나고, 사향 내음도 살짝 있습니다. 고품질 와인에서 종종 맡을 수 있는 신선한 소고기 향도 나고, 시간이 지나면 검붉은 서양 자두 향도 나타납니다.
얇지만 매우 탄탄한 구조감을 지닌 와인으로 식물성 기운이 어린 기분 좋은 산미와 강하지만 거슬리지 않는 알코올, 유리처럼 매끄러운 탄닌이 일품입니다. 덜 익은 딸기, 산딸기, 크랜베리 같은 붉은 과일 풍미가 입안 가득 느껴져서 새콤하면서 살짝 단 느낌이 있습니다. 향신료와 향나무, 허브의 기분 좋은 풍미가 있고, 한약재 느낌도 살짝 납니다. 허브와 향신료, 붉은 과일의 풍미가 우아하고 강하면서 아주 길게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멋지네요!
우아하고 풍부한 산미, 매끄럽고 탄탄한 탄닌, 강렬하지만 조화로운 알코올의 세 요소가 균형을 이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화하는 다양한 향과 풍미가 끝내주네요.
이 맛있는 와인을 어떻게 만들었나 궁금해서 기술 노트를 살펴봤습니다. 보통 고급 와인은 포도송이에서 줄기는 버리고 포도알만 사용하는데, 이 와인은 줄기를 30% 이내로 넣어서 함께 발효하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일부 고급 부르고뉴 와인에서 이렇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와인이 이런 방식으로 양조하는군요. 그리고 4~8일 정도 저온 침용. 이 과정을 거치면 와인에 신선한 과일 향과 맛이 많이 스며들게 됩니다. 토착 효모를 사용한 것도 독특한 개성을 이루는 데 일조했다고 봅니다. 펀칭 다운(punching down)을 최소화한 것도 와인의 깨끗하고 맑은 특성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겠고요.
이 멋진 와인과 함께 한 요리는 당연히 쇠고기 스테이크죠. 레어로 잘 익힌 55도의 명품 스테이크와 함께했습니다. 최고의 마리아쥬!!
6. 본 로마네 도멘 뒤 꽁테 리제 벨레(Vosne-Romanee Domaine du Comte Liger-Belair) 2014
도멘 꽁테 리제 벨레는 2000년에 설립된 신생 도멘으로 설립자는 농업학자이자 와인학자인 루이-미셸 리제 벨레(Louis-Michel Liger-Belair)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1815년에 부르고뉴에 정착해서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줄곧 부르고뉴 와인과 관련된 일에 종사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도멘은 본 로마네의 여러 곳에 포도밭을 갖고 있으며, 그중에는 그랑 크뤼인 에쎄죠(Echezeaux), 모노 폴(Mono Pole)이며 그랑 크뤼인 라 로마네(La Romanee), 유명한 1등급 밭인 레 슈쇼(Les Suchots), 그랑 크뤼는 아니지만 모노 폴인 끌로 뒤 샤토(Clos du Chateau) 등이 있습니다. 이날 마신 본-로마네는 연간 2,900병의 소량만 생산합니다.
맑고 깨끗한 루비색으로 커피, 붉은 과일, 초콜릿, 향신료가 함께 뒤엉킨 재미난 향이 나옵니다.
탄닌은 매우 부드러운데, 영한 와인에서 가끔 느껴지는 탄산끼(?)가 살짝 있습니다. 재밌네요. 본 로마네 와인을 많이 마셔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마셔본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톡톡 튀는 산미를 지녔고, 부드럽고 진한 탄닌과 함께 강하고 화끈한 알코올이 느껴집니다. 볶은 견과류의 고소한 풍미와 약간의 초콜릿 풍미, 검붉은 과일의 맛과 함께 씁쓸하고 어두운 스모키 풍미가 뒤섞여 있습니다. 아직 어린지 복합적인 느낌은 덜 합니다. 여운은 볶은 견과류 풍미가 씁쓸한 스모키 풍미와 함께 길게 이어집니다.
재미있는 산미와 진하고 부드러운 탄닌, 강한 알코올이 서로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시간이 더 필요한 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부르고뉴 레드 와인을 모두 시음했습니다. 최고의 와인은 역시 그랑 에세죠 죠르주 노에라 그랑 크뤼 2004! 그랑 에세죠의 명성에 어울리는 멋진 맛과 향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와인은 쥬브레 샹베르땅 클로드 듀가 2013. 귀여운 와인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와인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천천히 마셔야 최고의 모습을 느낄 것 같습니다.
레드 와인들의 모습입니다. 제일 앞에 있는 와인은 그랑 에세죠 죠르주 노에라 그랑 크뤼 2004. 색이 확실히 다르죠?
7. 도멘 유에 부브레 레 몽 므엘르(Domaine Huet Vouvray Le Mont Moelleux) 2003
도멘 유에는 1928년에 빅토르 유에가 아들과 함께 설립한 도멘입니다.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으로 재배한 포도로 뛰어난 와인을 생산합니다. 세 개의 포도밭을 갖고 있는데 <르 오 리유(Le Haut-Lieu)>, <르 끌로 뒤 부르(Le Clos du Bourg)>, 그리고 <르 몽(Le Mont)>입니다.
색은 아주 진한 금빛입니다. 잔에선 말린 노란 과일향과 파인애플 향, 짚 향, 밤꿀 향 등이 퍼져 나옵니다.
진하고 부드러우며 미끌미끌하면서 아주 살짝 끈적합니다. 단맛에 가려졌지만, 혀 밑에 고이는 침을 통해 산미가 매우 풍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린 노란 과일 풍미와 연한 파인애플 풍미, 약한 페트롤 풍미,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꿀, 마른 과즙 풍미가 느껴집니다. 다 마신 후에는 달달한 기운이 가득한 여운이 이어집니다. 노란 과일과 꿀의 풍미입니다.
아주 진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깨끗한 단맛과 이를 보완해주는 산미가 훌륭합니다. 멋지게 식사를 마무리해준 디저트 와인이었습니다.
함께 한 음식은 딸기와 블루베리 위에 올린 아이스크림입니다. 와인과 딱 어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