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음회&강좌

그리스 와인 시음회 2015. 12. 23 그릭조이

까브드맹 2015. 12. 26. 12:30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Greek_wine

고대 지중해 세계의 와인 무역은 두 해양민족이 지배했습니다. 하나는 중동과 북부 아프리카,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남부 루트를 석권한 페니키아인이었고, 또 하나는 소아시아 반도, 흑해 일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일대의 섬, 이탈리아 반도, 남부 프랑스를 잇는 북부 루트를 장악한 그리스인이었죠.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만든 로마시대에도 에게 해 주변의 와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좋았습니다. 4세기부터 머스켓 포도로 만든 스위트 와인은 북유럽까지 알려질 정도였죠. 

이 지역의 와인 산업을 선도(?)하던 그리스 와인에 암운이 깃든 것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잔틴 제국의 강역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 문명권 지역은 확실하게 이슬람 문명권에 속하게 된 것이죠.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서 와인을 못 만들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금주를 강조하고 와인에 세금을 부과하는 이슬람 문명권에 속하다 보니 와인 산업은 침체와 퇴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죠.

오스만 제국이 약해지면서 1821년에 독립 전쟁을 일으킨 그리스는 1827년 나바리노 해전에서 영국이 오스만 제국 해군을 박살내면서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등의 외세 간섭과 종교 분쟁, 터키와의 전쟁 패배,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점령, 종전 후 정치 혼란과 군사 독재 등을 겪는 등 연속된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다보니 와인 산업은 더디게 발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85년 프랑스에서 양조 교육을 받은 포도재배학자와 양조자들이 귀국하면서 그리스 와인의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그리스 여러 지역에 와이너리를 설립했고, EU와 개인투자자들의 자금 유입이 이러한 움직임에 불을 지폈죠. 부따리_Boutari와 코우르타키스_Kourtakis 같은 와인 회사들이 기후가 서늘한 곳에 와이너리를 설립하고 현대적인 와인을 생산하면서 그리스 와인은 그 옛날의 명성을 천천히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는 프랑스 AOC 제도를 벤치마킹해서 나름의 품질 관리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고급 와인(Quality Wine)을 만드는 생산지는 프랑스의 AOC에 해당하는 Oenoi Onomasias Proelefseos Elenhomeni / 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OPE) 8개 지역과 VDQS와 흡사한 Oenoi Onomasias Proelefseos Anoteras Poiotitas / Appellation d’Origine de Qualité Supérieure (OPAP) 25개 지역이 있습니다. 주요한 지역을 꼽으라면 마케도니아의 나우싸_Naoussa, 펠로폰네소스의 네메아_Nemea, 그리고 산토리니_Santorini가 있죠.

2015년 12월 23일 합정역 7번 출구 부근의 전문 그리스 식당인 그릭조이에서 다섯 가지 그리스 음식에 맞춘 그리스 와인 시음회가 열렸습니다. 먼저 이날 제공된 음식의 리스트를 보자면

- 식전빵

- 케프체데스 (그리스식 미트볼)

- 볼마데스 (양배추요리, 샐러드)

- 수블라키 (그리스식 꼬치구이) & 샐러드

- 무사카 (그리스식 라쟈냐)

- 새우 사가나키 & 파스타

- 양고기 스테이크

로 그리스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맞춰 8종 와인이 제공되었죠. 이 와인들의 향과 맛을 개인적으로 평가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부따리 모스코필레로_Boutari Moschofilero 2013

중간 농도의 금빛을 띠는 아름다운 색상을 지녔습니다. 초반엔 흰 채소와 시트러스, 청사과 향이 희미하고 가볍게 느껴집니다. 다소 단조로운 향 속에 맛은 물처럼 뉴추럴했지만 뒷맛은 살짝 기름진 느낌입니다. 오이 같은 상쾌함 속에 약간의 미네랄 풍미가 느껴지는 것이 이태리 와인인 소아베와 비슷한 느낌이더군요. 후반부에 이르러 미미한 흰 꽃 풍미 속에 잔잔한 산미가 천천히 올라오고, 시간이 갈수록 향과 풍미와 산미가 더욱 강해지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흰살 생선구이나 생선회를 떠놓고 장시간에 걸쳐 천천히 맛보고 싶은 와인입니다. 

생산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만티아_Mantina, 품종은 모스코필레로입니다.

2. 끼르-야니 아카키스_Kir-Yianni Akakies 2014

다홍색 또는 진한 레드 핑크랄 수 있는 어여쁜 색입니다. 초반엔 무 같은 흰 채소나 풀에서 맡을 수 있는 가볍고 상쾌한 향과 덜 익은 딸기의 싱그러운 향이 납니다. 살짝 레드 커런트 향도 스쳐 지나 가고요. 부드럽고 풍성한 산미를 지닌 라이트 플러스, 또는 미디엄 마이너스 바디의 와인입니다. 레드 체리와 라즈베리의 풍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질감과 함께 밸런스도 꽤 좋고요. 그래서 한 병 구매.

생산지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아민데온_Amyndeon. 품종은 시노마브로_Xinomavro입니다. 이름의 끼르는 영어로 Sir, 야니는 영어로 찰스, 독어로 칼, 프랑스어로 샤를, 한국어로 철수(?) 같은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3. 끼르-야니 페트라_Kir-Yianni Petra 2013

중간 농도의 레몬색을 띤 와인으로 상큼한 스트러스 향 속에 풋풋하고 시원한 채소향과 풀 내음이 납니다. 또 약간의 휘발성 기름 냄새도 느껴집니다. 깨끗하고 간결하지만 살짝 씁쓸한 기운을 맛볼 수 있는데, 소녀처럼 잔잔하고 순한 산미가 기억에 남습니다. 전반적으로 뉴추럴한 풍미를 지녔고, 약한 시트러스나 흰 채소 같은 식물성 풍미를 지닌 와인입니다. 

페트라는 바위를 뜻하는 그리스어라고 합니다. 생산지는 마케도니아.

4. 부따리 크레티코스_Boutari Kretikos 2013

연한 루비색을 띤 레드 와인으로 딸기와 산딸기 향과 함께 살짝 오크향이 풍깁니다. 라이트 바디로 탄닌의 느낌은 입에 살짝 걸친 정도? 보졸레처럼 라이트 하지만 사탕 풍미는 없고, 붉은 체리의 느낌이 강합니다. 허브 느낌도 살짝 있고요. 풍성한 산미는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합니다. 이런 와인은 생선 요리와 먹어도 무난하게 잘 어울리죠. 저는 개인적으로 참치회와 먹어보고 싶습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크레타 섬이 생산지입니다. 사용된 포도는 크레타 특산인 코트시팔리_Kotsifali와 만딜라리아_Mandilaria.

5. 끼르-야니 파랑가_Kir-Yianni Paranga 2011

퍼플과 루비의 중간 색조를 띠었습니다. 블랙베리 같은 검은 과일향과 함께 쌔끈한 나무향과 신선한 허브 향을 느낄 수 있네요. 부드럽고 진한 풀바디 와인으로 탄탄한 탄닌으로 인해 구조감도 좋습니다. 산미 역시 질 좋고 양도 풍성하고요. 서양 자두 같은 검붉은 과일 풍미와 블랙베리 같은 검은 과일 풍미를 맛볼 수 있고, 삼나무 풍미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선한 쇠고기 향이 느껴진다는 점. 여운의 느낌 또한 징~하고 울린 것이 좋습니다.

생산지는 마케도니아. 지역 품종인 시노마브로에 글로벌 품종인 시라와 메를로를 블렌딩해서 만듭니다.

6. 끼르-야니 크티마 끼르-야니_Kir-Yianni Ktima Kir-Yianni 2011

진한 퍼플빛 가운데 살짝 루비색이 돕니다. 오크와 서양 자두, 블랙커런트의 향이 풍기고, 질 좋은 기름 내음도 맡을 수 있습니다. 풍부하고 견조한 구조감과 강한 탄닌으로 인해 단단한 나무 건물 같은 인상을 줍니다. 풍성한 산미를 지녔고, 뻣뻣한 탄닌감은 마치 나무를 갈아넣은 듯한 질감을 지녔습니다. 오크와 삼나무 풍미가 있고, 블랙커런트 같은 검은 과일 풍미와 함께 신선한 풀줄기의 기운을 맛볼 수 있습니다. 스모키한 연기 향이 살짝 나면서 그을린 나무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여운이 길게 이어집니다.

생산지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나우싸이며, 사용된 품종은 시노마브로와 메를로입니다.

7. 끼르-야니 람니스타(Kir-Yianni Ramnista) 2011

중간 농도의 루비색에서 가넷빛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야생 딸기와 붉은 체리 향이 나고, 나무 계열의 스파이시한 향이 납니다. 오크와 삼나무 향도 나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라즈베리와 크랜베리, 그리고 말린 붉은 베리류 과일의 향이 납니다. 깔끔하고 깨끗하며 질 좋은 산미를 풍성하게 맛볼 수 있네요. 질감은 창백하고 매끄럽다가, 목으로 넘기면서 탄닌이 입안을 쫘악하고 조여주는 느낌을 줍니다. 이때 느껴지는 까끌한 느낌은 마치 나무 조각을 아주 미세하게 갈아넣은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유리처럼 탄탄한 질감을 지닌 가운데, 향긋한 과일향이 풍겨서 붉은 색의 유리 장미를 떠올리게 만드네요. 나무 계열 풍미가 중심을 이루며, 여기에 말린 붉은 과일 풍미가 더해지는 맛을 지닌 와인으로 여운은 기분 좋게 징징 울리면서 길게 이어집니다. 

생산지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나우싸. 사용된 포도는 시노마브로 100%입니다.

8. 부따리 레가시(Boutari Legacy 1879) 2007

미디엄 루비의 아름다운 색상에 향기로운 나무와 붉은 과일 향을 지녔습니다. 레드 체리와 산딸기, 레드커런트 향이 나고 살짝 검은 체리 향도 풍깁니다. 또한 고소한 기름 향도 느껴지고요. ‘Silky’라고 표현되는 부드러운 첫 느낌에 이어서 혀와 입에 길게 자취를 남기는 은은한 탄닌 느낌이 일품입니다. 미디엄 바디에 아름답고 깨끗한 산미가 풍성한 와인으로 “우아하고 섬세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습니다. 라즈베리와 크랜베리, 그리고 블랙 체리까지 다양한 베리류 과일의 풍미를 맛볼 수 있고, 여기에 삼나무의 시원함과 생나무에서 풍기는 살짝 매콤하면서 향긋한 스파이스 풍미가 더해지죠. 길게 이어지는 과일 계열의 여운도 좋고요. 아직 젊은, 우아한 귀부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와인입니다.

생산지는 마케도니아의 나우싸. 사용된 포도는 시노마브로 100%인데, 람니스타와 사뭇 다른 것은 와인 생산자의 철학에 따라 포도 수확과 양조 방법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총 8종의 그리스 와인을 그리스 음식과 함께 시음해봤습니다. 1879와 람니스타가 절대적인 맛에서는 제일 좋았지만, 가격이나 여러가지 고려 사항을 따져봤을 때 개인적으로는 크티마에게 손이 더 갔습니다. 그리고 로제 와인인 아카키스도 좋았구요.

우리나라 와인 시장 상황을 볼 때 그리스 와인의 마켓 쉐어는 매우 작고, 그러다보니 이렇게 다양한 그리스 와인을 한데 모아 놓고 시음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마트나 와인 샵에서 그리스 와인을 구입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구요. 이런 상황에서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유병찬 동일와인코퍼레이션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시음회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신 <우리들의 와인이야기> 네이버 밴드장님과 복숭아향피노누아님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