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전통주] 술에 깃드는 시원한 대나무 향 - 죽력고(竹瀝膏)

까브드맹 2024. 1. 11. 07:00

죽력고

죽력고는 죽력(竹瀝)을 넣어서 만드는 전통 증류주입니다. 죽력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통약이고 고(膏)는 최고급 약소주에 붙이는 명칭입니다. 뛰어난 효능을 가진 죽력을 넣어서 만드는 죽력고는 뛰어난 약리 작용을 갖춘 약주(藥酒)이면서 맛과 향도 좋은 술입니다.

1. 죽력이란 무엇인가?

물에 약재를 넣고 달여서 만드는 탕약(湯藥)이나 작은 환으로 만들어 먹는 환약(丸藥)과 달리 죽력은 대나무를 밀폐된 항아리에 넣고 증류해서 진액을 뽑아낸 다음 액즙(液汁) 형태로 복용하는 약입니다. 죽즙(竹汁), 또는 담죽력(淡竹瀝)이라고도 하며 맛은 달고 씁니다. 간과 심장, 폐, 위에 작용한다고 합니다. <명의별록(名醫別錄)>에는 죽력에 대해

갑작스러운 풍사(風邪)의 침범으로 저리고 흉부에 열이 심한 증상을 치료하고 가슴이 번잡하고 답답한 증상과 갈증을 멎게 하며 과로로 인한 재발도 치료한다.

라고 나왔고, 중국 원나라의 유명한 의학자인 주진형(朱震亨)은

중풍(中風)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증상을 치료하고 혈(血)을 기르고 담열(痰熱)을 없앤다.
풍담(風痰)과 허담(虛痰)이 흉격(胸膈)에 머물러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을 치료한다.
담(痰)이 경락(經絡)과 사지(四肢) 및 피부 속에 머물러 있는 증상은 이 약물이 아니면 제거하지 못한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명나라의 학자인 이시진(李時珍)은 자신의 저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임신으로 인한 어지럼증과 중풍 증상(中風症狀)을 치료하며 초오(草烏)의 독을 푼다.

라고 기록해 놓았죠.

이렇게 죽력은 혈압을 다스리고 피를 맑게 하여 중풍 같은 혈관계 질병과 기관지 천식에 좋고, 뇌졸중으로 인한 언어 장애와 해열 작용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실험적 연구에 의하면 중추신경억제작용, 장관 및 혈관 평활근 이완작용, 혈압강하 작용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전봉준이 전북 순창 쌍치에서 일본군에 잡혀 흠씬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서울로 압송될 때 죽력고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

라고 적었는데, 매를 맞아 온몸에 맺힌 울혈을 죽력이 든 죽력고로 풀어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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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력고의 역사

약효뿐만 아니라 맛과 향도 매우 뛰어난 술인 죽력고는 조선 시대 후기에 유중림이 쓴 농서인 <증보산림경제>와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도 술 이름이 나와있습니다. 또 최남선은 <조선상식 문답>에서 평양 감홍로(甘紅露), 전주 이강고(梨薑膏)와 함께 죽력고를 우리나라 3대 명주로 기록했습니다.

최남선이 꼽은 3대 명주 중 평양의 감홍로는 1986년 문배주로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선정되었던 이경찬 씨(1993년 작고)의 따님인 이기숙 씨가 대를 이어서 제조합니다. 이강주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전주의 이강고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 전국 8대 전통주로 선정되었고 대형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죠.

원래는 여러 곳에서 만들던 죽력고는 일제 강점기 전후로 사라졌다가 이십여 년 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죽력고를 세상에 다시 내놓은 분은 전국의 막걸리 애호가로부터 사랑받는 송명섭 막걸리를 만드는 전라북도 태인면의 송명섭 씨이죠. 송명섭 씨와 죽력고의 인연은 외증조부까지 올라갑니다. 전북 고부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던 외증조부는 치료에 도움이 될만한 복분자주와 호마주 같은 술의 비방을 모아 치료보조제로 사용했고, 그중 하나가 죽력고였습니다. 이후 양조장으로 시집온 송명섭 씨의 어머니를 통해서 죽력고 제조법이 송명섭 씨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에 국순당과 농림부가 후원하고 주최한 <아름다운 우리 술 공모전>에서 죽력고가 전국에서 출품된 총 155점의 전통주와 겨루어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입니다. 현재 송명섭 씨의 죽력고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송명섭 씨는 전국 유일의 죽력고 기능보유자로서 2003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와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4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3. 죽력고 제조법

1) 청죽(靑竹)을 마디마다 자르고 다시 여러 조각으로 쪼갭니다.

2) 항아리에 자른 청죽을 빽빽하게 끼워 넣습니다.

3) 청죽을 넣은 항아리를 죽력을 담을 그릇 위에 뒤집어 얹고 그릇과 항아리 사이에 공간이 없도록 젖은 한지로 막은 다음 반죽한 황토를 항아리 전체에 꼼꼼히 바릅니다.

4) 콩대를 항아리 주변에 깔아 불을 붙인 다음 콩대가 다 타고 약간의 불씨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쌀겨를 항아리 위에 들이붓습니다.

5) 쌀겨가 다 탈 때까지 5~7일간 죽력을 받습니다.

6) 쌀을 깨끗이 씻어서 고두밥을 짓고, 밥이 다 되면 누룩을 부어 섞습니다.

7) 항아리에 쌀과 누룩 섞은 것을 붓고 막대로 바닥까지 잘 젓습니다.

8) 솔잎과 마른 대나뭇잎, 생강, 계피, 석창포를 죽력에 넣어 촉촉이 적십니다.

9) 아궁이에 소줏고리를 얹고 죽통을 연결한 후 마른 장작을 넣고 불을 붙입니다.

10) 청아한 향의 죽력고가 죽통을 통해서 떨어지면 6~8시간 동안 받습니다.

 

 

4. 죽력고의 맛과 향, 효능

시원하고 진한 대나무 향을 풍깁니다. 다소 쓴맛이 있지만, 알싸하고 상쾌합니다. 알코올 도수가 32% 정도로 제법 높으나 매우 부드러워서 목에 걸리지 않고 잘 넘어갑니다. 가을날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술입니다. 고기 산적과 전 요리, 구절판 같은 전통 한식과 잘 어울립니다.

약 기운이 강한 죽력고는 많이 마셔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취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에 몸속의 노폐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가뿐해진다고 합니다. 향이 좋고 맛있으며 목 넘김도 좋은데 다음 날 숙취까지 없으니 명주(名酒)의 조건을 두루 갖춘 술인 셈이죠.

매년 생산하는 죽력고는 100여 병에 불과합니다. 송명섭 씨가 직접 농사지은 쌀로 전통방식에 따라 만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예약을 해도 쉽게 구할 수 없고, 가격도 전통주 중에선 상당히 높지만, 위스키나 와인과 비교하면 비싼 건 아니니 한 병 구매했다가 뜻깊은 날 한 잔 하시길 권합니다. 백화점과 인터넷으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