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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밑이 깊을수록 좋은 와인이다? 펀트의 거짓과 진실

까브드맹 2023. 5. 23. 07:00

와인병 바닥의 펀트 모습
<셋 중 오른쪽의 독일 와인이 제일 비싸지만 펀트는 제일 얕습니다.>

와인병을 뒤집어 보면 바닥이 움푹 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움푹 팬 부분을 펀트(Punt)라고 합니다. ‘펀트가 깊을수록 좋은 와인이다’라는 말이 퍼져 있는데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모젤(Mosel)과 라인가우(Rheingau) 지방에선 최고급 리슬링 와인이 나옵니다. 이 리슬링 와인들은 부르고뉴의 최고급 샤르도네 와인과 버금갈 정도로 비쌉니다(물론 맛과 향도 아주 뛰어납니다.). 에곤 뮬러(Egon Muller)라는 유명한 생산자의 와인 중엔 1백만 원을 훌쩍 넘어가는 것도 많죠. 그렇지만 이런 리슬링 와인들의 펀트는 얕습니다. 사이다병 정도의 깊이죠. 최고급 샴페인 중 하나인 루이 로드레(Louis Roederer)의 크리스탈(Cristal)도 펀트의 깊이가 얕습니다.

 

그렇다면 펀트는 왜 있는 것이고 용도는 뭘까요?

<블로우 파이프를 이용한 와인병 제작>

① 펀트는 과거에 녹은 유리를 다루는 쇠막대기인 폰틸(pontil)과 파이프를 이용해서 와인병을 만들었던 시기의 역사적인 흔적입니다. 와인병의 바닥이 평평하면 쉽게 흔들릴 수 있으므로 안정되게 서 있도록 폰틸에 붙은 바닥 부분을 눌러서 오목하게 들어가도록 했죠. 그 자국이 펀트입니다. 

 

② 펀트가 깊으면 병 안쪽의 펀트 주변에 패인 공간이 생기고, 와인의 침전물이 여기에 모이게 되어 디캔팅할 때 유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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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은 탄산가스의 압력이 세서 병이 두껍고 바닥이 튀어나와야(펀트가 커야) 압력을 버틸 수 있습니다.

 

④ 전통 방식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 때, 효모의 잔해를 모으는 리들링(riddling, 병 돌리기) 과정에서 쉽게 병을 돌릴 수 있게 도와줍니다.

 

⑤ 일반 와인병의 경우 펀트는 병이 쉽게 공명하는 것을 방지하여 운송 중에 파손될 가능성을 줄여준다고 합니다.

 

 

⑥ 펀트가 깊으면 와인병 안쪽의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펀트가 차지하는 공간만큼 병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와인병보다 키가 더 크고 ‘어깨’가 벌어진 와인병은 펀트가 깊죠. 이런 와인병은 소비자에게 특별한 와인인 것처럼 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줍니다. 그러나 와인의 양은 똑같습니다.

 

⑦ 펀트는 병 안을 더 쉽게 씻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소독을 위해 병에 넣은 뜨거운 물이 펀트에 닿으면 골고루 바닥에 퍼지면서 소용돌이치게 되어 잔여물이 쉽게 제거됩니다.

 

⑧ 펀트가 있으면 펀트에 엄지를 넣고 다른 손으로 와인병의 아랫부분을 잡은 채 와인을 따르기 좋습니다. 이런 모습은 와인을 서비스할 때 좀 더 멋지고 정중하게 보이도록 해주죠.

 

 

⑨ 펀트가 얕은 병은 유리의 소모량이 적어서 생산과 이동에 비용이 더 적게 들어갑니다. 리슬링 와인의 펀트가 얕은 것은 독일의 와인병 생산자들이 더 정교한 유리 제조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유럽의 선술집에 수직으로 고정된 강철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강철핀은 다 마신 와인병의 펀트 상단에 구멍을 내기 위한 것으로 선술집에서 빈 병에 몰래 다른 와인을 채워서 팔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위스키 바에서 고급 위스키병에 싸구려 위스키를 넣어서 팔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부착하는 것과 같은 목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