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역사

[역사] AOC 제도의 역사

까브드맹 2018. 12. 3. 08:00

AOC 로고
(이미지 출처 : http://www.thefrenchcellar.sg/wp-content/uploads/2015/08/AOC_winemag.png)

1. AOC?

프랑스 와인 법규인 지역 명칭 통제법은 "아펠라씨옹 도리진 꽁트롤레(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 약자로 AOC라고 합니다. AOC는 글자 그대로 "지역(Origine)"의 "명칭(Appellation)"으로 (와인의 품질과 등급을) "통제(Controlee)" 혹은 "관리"하는 법입니다. 즉, 특정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규정에 맞춰 만든 와인의 레이블에 해당 지역의 지명을 표시해서 소비자가 레이블에 적힌 와인 산지를 보고 품질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AOC에 따라 결정되는 프랑스 와인의 최고 등급이 AOC 등급입니다. AOC 등급은 특정산지의 포도로 만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부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메독(Medoc)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들었어도 AOC의 세부 규정에 따르지 않으면 레이블에 "Appellation Medoc Controlee"라고 쓸 수 없는 겁니다.

AOC 등급을 받으려면 최소한 6가지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① 와인에 사용한 포도는 지정된 떼루아(Terroir) 규정을 지킨 지역에서 재배했는가?

② 와인에 사용한 포도는 지역별로 정해진 품종을 사용했는가?

③ 포도는 규정에 따른 방법으로 재배했는가?

④ 1헥타르당 포도 수확량은 규정에 정해진 양을 넘기지 않았는가?

⑤ 숙성을 포함한 양조기술은 허용된 것인가?

⑥ 와인의 알코올은 보당(補糖, Chaptalisation)을 하지 않고도 최소 기준 이상으로 들어있는가?

이외에도 와인 생산자는 와인 테이스팅 패널(Tasting Panel)에 자기 와인의 상세한 명세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합니다. 정부에서는 와인 생산 과정이 심사기준에 모두 맞는지 확인한 후 AOC 등급을 줍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므로 소비자는 레이블만 봐도 와인 등급을 파악할 수 있으며, 품질을 믿고 구매할 수 있는 거죠. 와인의 맛과 향에 따라 호불호(好不好)는 갈릴지언정 품질은 의심할 바가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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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랑스 와인 몰락기 : 1850s~1935

이렇게 엄격한 AOC 제도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1919년에 제조법까지 포함된 원산지 호칭법인 "아펠라씨옹 도리진 로아(Appellation d'Origine Loi)" 법이 있었습니다. 1935년에 당시 농업장관인 까퓨(Capus)와 샤토네프 뒤 빠프의 르 루아(Le Loy) 남작이 중심이 되어 앞의 법을 수정해서 만든 것이 AOC 법이죠. 이 법을 제정하기까지 약 80년간 프랑스 와인 업계는 몰락의 길을 걸어왔고, 난관을 헤쳐나가려고 탄생한 것이 바로 AOC 규정입니다.

1850년대에 미국에서 유럽종 포도를 재배하던 와인 생산자들은 포도나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들어 죽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와인 생산자들은 포도나무가 죽어가는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죠. 결국,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 영국으로 포도나무 묘목 몇 그루를 보냈습니다. 영국의 학자들은 포도밭에 묘목을 심고 연구했지만, 역시 발병 원인을 알 수 없었고 다시 유럽 본토의 학자들에게 묘목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해충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죠. 

필록세라, 진정한 미식가. 필록세라는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일수록 창궐했습니다. 당시의 풍자화입니다.

1863년에 프랑스 남부의 론(Rhone) 지역에서 필록세라에 의해 말라죽은 포도나무가 나오기 시작했고, 필록세라는 전 유럽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포도밭을 초토화했습니다. 피해가 얼마나 막심했는지 1875년에 8,450만 헥토리터였던 프랑스의 와인 생산량이 14년 후인 1889년에는 2,340만 헥토리터로 줄어들 정도였죠. 원래 생산량의 72.3%가 줄어든 것입니다. 당시 유럽 포도밭 10개 중 9개가 황폐해졌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니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죠.

학자들이 포도 뿌리에 서식하는 필록세라라는 벌레 때문에 포도나무가 시든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신통한 해결책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벌레가 뿌리 부근에서 포도 수액을 빨아먹거나 뿌리를 갉아 먹으므로 농약을 쳐도 필록세라에 잘 닿지 않기 때문이었죠. 흙이 보호막 역할을 해준 겁니다. 학자들과 와인 생산자들이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뾰족한 방법을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결국, 필록세라에 내성을 가진 미국종 포도나무의 뿌리를 유럽종 포도나무 줄기에 접붙이는 방법으로 피해를 막을 수밖에 없었죠. 공격은 못 하고 방어를 하는 정도의 수단을 택한 겁니다. 

이 암울한 시기에 유럽에 와인을 공급한 곳은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 루씨옹(Languedoc-Roussillon) 지역과 이탈리아 남부의 뿔리아(Puglia), 시칠리아(Sicilia), 스페인 일부 지역이었습니다. 필록세라는 모래흙을 싫어하는데 이 지역들의 토양엔 모래흙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들에서 생산하는 와인만으로는 공급량이 너무 부족했으므로 오로지 생산량을 늘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와인 품질이 크게 떨어지고 말았죠.

그 후 미국종 포도나무를 접목해서 유럽 각지의 포도밭이 재생되려 할 무렵,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유럽의 와인 산업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프랑스 북동부는 당장 전쟁터가 되었고, 유럽의 다른 지역도 전화(戰禍)에 휩쓸린 곳이 많았습니다. 포도밭을 가꾸어야 할 젊은 청년들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갔고, 군수품에 포함된 와인도 품질과 상관없이 또다시 생산량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유럽의 와인 산업계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전투가 있었던 지역의 포도밭은 황폐해졌고, 전쟁 후에도 와인 생산자들이 여전히 생산량에만 집중하다 보니 이번엔 공급 과잉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와중에 비양심적인 판매업자가 생산자와 결탁해서 형편없는 와인을 유명 생산지의 와인처럼 팔아서 소비자들을 속이는 일까지 일어났죠. 중국산 찐쌀을 경기도 김포 쌀로 둔갑시킨 셈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후도 안 좋아서 1900년 전후로 40년간 빈티지가 좋았던 해는 겨우 11년에 불과했습니다. 유럽 와인 업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죠.

그러나 진(Jin)이나 보드카(Vodka) 같은 증류주는 19세기 중반에 다단식 증류기가 개량되면서 싼값에 우수한 품질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싸구려 저질 가짜 와인에 질린 소비자들이 저렴하고 품질 좋은 증류주로 몰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이런 상황은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지국의 대표 상품인 와인의 평판을 되살리기 위해 뭔가 해야 했습니다.

이때 프랑스 정부가 행한 조치가 위에서 말한 AOC 법입니다. AOC는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정부가 와인의 품질을 보증하는 최초의 현대적인 와인법이었고, 관리기관인 INAO(the Institut National des Appellations d'Origine)가 전국에서 생산하는 와인을 철저히 감독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 와인은 소비자의 신뢰를 다시 회복했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와인으로 거듭 태어났죠. AOC는 그 후 이탈리아의 DOC, 스페인 DO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3. 오늘날의 AOC

AOC가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 프랑스 와인을 되살린 것은 틀림없지만, 외국인에겐 내용이 매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프랑스의 지리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우리 처지에서는 더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죠. 평범한 한국 소비자 중에서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만 보고 어떤 와인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라 루생 로제. 로제 와인의 레이블입니다.

대조적으로 미국과 칠레, 호주 같은 신세계 와인은 레이블에 비교적 알기 쉬운 내용을 적습니다. 옐로우 테일(Yellow Tail)과 나이트 아울(Night Owl) 등 재미난 이름이 많아서 기억하기도 쉽죠.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 신대륙 와인이 중저가 와인 시장에서 유럽 와인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을 많이 늘렸습니다. 물론 신대륙 와인의 품질이 나날이 발전해서 판매를 뒷받침해 줬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죠.

프랑스와 유럽 와인업계는 이러한 현상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그들의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AOC 같은 기존 규정의 핵심 내용은 바꾸지 않았지만, 신세계 와인의 특성에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재빨리 받아들였죠. 레이블을 알기 쉽고 개성 있게 디자인하며, 복잡한 내용은 백 레이블로 옮겼고, 이해하기 쉬운 와인을 만들어 소비자가 자신의 기호에 맞춰서 와인을 쉽게 고를 수 있도록 했죠. 프랑스에서는 남부 프랑스(Sud de France) 지역에서 이런 와인이 많이 나옵니다.

<참고 자료>

1. 휴 존슨, 젠시스 로빈슨 저, 세종서적 편집부, 인트랜스 번역원 역, 와인 아틀라스(The World Atlas of Wine), 서울 : 세종서적(주), 2009

2. 영문 위키피디아 필록세라 항목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