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옛날 이야기

옛날이나 지금이나 - 3

까브드맹 2009. 11. 25. 09:27

이미지 출처 : http://www.seoulgallery.co.kr/main.php?cmd=thumb_board/view&idx=59&page=1&board_name=picture_story_board&keyword=&find=


2주전 쯤에 2009년 수능이 끝났죠? 이제 3개월 후면 수험생들은 각자 합격한 대학에 가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새로운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로 부푼 꿈을 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면 해마다 일어나는 연중행사와 이에 따른 사고가 매스컴을 장식하게 되지요. 네, 신입생 환영회에서 지나치게 술을 많이 먹여 신입생들이 급성 알콜중독으로 인해 죽게되는 사고사가 매년 꼭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소에 술을 자주 안 마셔 자기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선배들이 주는대로 다 받아마시다가 그대로 뻗어버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환영의 뜻을 표하는데 술 대접 만한 것이 없겠지만,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는 것만큼 곤욕스런 것도 없을 겁니다. 이처럼 환영의 뜻으로 술을 무리하게 먹이는 일은 글자 그대로 유구한 전통(?)을 지닌 습속인데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전에도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신입생 환영회 때 사고를 일으키는 술이 주로 소주이듯이 조선 시대에도 환영식의 음주사망사고에서 주역을 차지하던 술 역시 소주였습니다.


태종 8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7월 20일(기미) 2번째기사

갑자기 죽은 경상도 경차관 김단에게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다
 
경상도 경차관(慶尙道敬差官) 김단(金端)이 옥주(沃州)에 이르러 갑자기 죽으니, 임금이 듣고 불쌍이 여겨 내수(內竪)를 보내어 그 집에 조문(弔問)하고,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였다. 김단의 아우 주서(注書) 김위민(金爲民)에게 명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옥주(沃州)에 가서 장사하게 하였다. 김단이 청주(淸州)를 지나는데, 청주의 수령이 소주(燒酒)를 권하여서, 김단이 과음(過飮)하였던 까닭이었다.
 
태종 33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윤5월 4일(기미) 1번째기사

박강생·윤돈을 파직하다. 김문에게 소주를 많이 권하여 죽게한 때문이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박강생(朴剛生), 봉례랑(奉禮郞) 윤돈(尹惇)을 파직(罷職)하였다. 이 앞서 윤돈이 과천 현감(果川縣監)에서 교대되어 서울로 돌아올 때, 박강생과 금천 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 등이 윤돈을 안양사(安養寺)에서 전별(餞別)하였더니, 김문이 소주(燒酒)에 상(傷)하여 갑자기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일이 발각되어 헌부(憲府)에서 죄를 청하니, 임금이,
 
“술을 권하는 것은 본시 사람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고, 인관(隣官)4401) 을 전별함도 또한 상사(常事)인 것이다.”
 
하고, 명하여 다른 일은 제외하고 파직하게 하였다.

성종 10권, 2년(1471 신묘 / 명 성화(成化) 7년) 6월 5일(병오) 3번째기사

사헌부 지평 김수손이 이수남에게 술을 권한 홍윤성을 국문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김수손(金首孫)이 와서 아뢰기를,
 
“이수남(李壽男)이 홍윤성(洪允成)이 집에 이르자, 홍윤성(洪允成)이 소주(燒酒)를 강권(强勸)하여 상사(傷死)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수남(李壽男)이 만리(萬里)에서 돌아왔기에 인산(仁山)1334) 이 술을 권한 것인데, 무엇이 불가함이 있겠느냐?”
 
하였다.

게다가 당시의 소주는 오늘날처럼 저도로 희석한 화학주가 아니라, 알콜 함량 40도 이상을 넘나들던 고도의 증류주이다보니 더 확실하게 사람을 원샷원킬(으응?)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비단 환영의 자리에서 사고가 나는 것 뿐만 아니라 지나친 애주생활을 통해서도 음주사고는 자주 일어났는데요, 조선 태조의 맏아들인 이방우는 평소 술을 너무 좋아했는데, 결국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사망하게 되었지요.

태조 4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12월 13일(갑신) 1번째기사

진안군 이방우의 졸기
 
진안군(鎭安君) 이방우(李芳雨)는 임금의 맏아들인데,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燒酒)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은 이복근(李福根)이다.


이처럼 술로 인한 사고가 빈번하자 마침내 성종은 소주 마시기를 자제하라고 어명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성종 250권,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2월 22일(무진) 1번째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상하를 막론하고 술마시기를 숭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이르다

의정부(議政府)에 전지(傳旨)하기를,

“주례(酒禮)를 베푼 것은 신명(神明)에게 제사를 받들며 늙은이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니, 그 사용이 많다. 그러나 더러는 굳게 제재(制裁)하지 못하고 탐닉하는 것을 힘쓴다면 재화(災禍)가 됨이 어찌 적겠는가? 이 때문에 선왕(先王)이 예(禮)로써 거듭 〈밝히고〉 법(法)으로써 단속하였는데, 후세(後世)에서는 비록 술을 금하는 영(令)이 엄격하였지만, 마시기를 숭상하는 화는 구언하지 못하였으니, 이전의 역사에 충분히 경계하였다.

이제 듣건대, 풍습이 소주(燒酒)를 숭상하여 위로 관부(官府)에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시기를 좋아하여 점점 풍습을 이루는 데 이르렀으니, 소비[糜費]가 심할 뿐만 아니라, 간혹 지나치게 마실 것 같으면 역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이치가 있다. 지금부터 뒤로는 늙거나 병이 들어 약(藥)으로 복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경계하여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없어질 애주가들이 아니죠. 중종대에도 과음으로 인한 사고가 계속 생겨납니다.

중종 21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4월 23일(경술) 2번째기사

죽은 제주 목사 성수재의 시신을 호상해오는 것을 아내 이씨가 청하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성수재(成秀才)가 관직에 있으면서 졸하였다. 아내 이씨(李氏)가 상언(上言)하기를,
 
“망부(亡夫)의 시신(屍身)이 해외(海外)의 절도(絶島)에 있는데, 집안 사세가 영정(零丁)하여 호상(護喪)해 올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4촌 오라비인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이세규(李世規)를 보내어 호상해 오게 하여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성수재는 무반(武班) 가운데 어진 자였다. 지금 해외에서 죽었으니, 그 호상인 이세규에게 말을 주어 내려보내게 하라. 또 경기·충청·전라도 등의 관찰사에게 효유하여 각각 호송하게 함이 가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성수재는 일찍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여러번 변방 소임을 역임하여 자못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명망이 있었고, 조정에서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다. 소주(燒酒)를 좋아하여 병을 얻어서 죽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술은 옛날부터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고도 하고 '백독지장(百毒之長)'이라고도 했습니다. 동의보감에 

"술은 성질이 대열(大熱)하고 맛이 쓰고 달고 매우며, 혈액 순환을 좋게 하고 위장 기능을 도우며 피부를 윤택하게 하고 근심을 없애며 노여움을 발산시키고 마음껏 지껄이게 한다."

"오래 마시면 신경을 상하게 하고 수명에 해롭다."

"과음하면 몸이 말을 듣지 아니 하고 신경이 마비되니 이는 유독(有毒)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는데요, 잘만 마시면 약이 되지만 지나치게 마시면 큰 독이 되지요. 몸에 약이 될 수 있는 술을 적당히 잘 마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애주가들에게는 지키기 힘든 일이 아닐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