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잘 만든 와인과 개인의 취향
와인은 지역별로 품종별로 또 생산자별로 맛과 향이 굉장히 다양한 술입니다. 와인 종류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는데, 와인의 스타일도 밤하늘의 별자리만큼이나 다양할 겁니다. 이렇게 다양한 와인이 존재하다 보니 와인을 계속 마시다 보면 좋아하는 스타일과 싫어하는 스타일이 서서히 구분되기 시작하죠. 저는 신세계 와인보다 구세계 와인을 좋아하고, 레드 와인은 풀 바디한 것을 화이트 와인은 가벼운 것을 좋아합니다. 단맛보다 드라이한 맛을 좋아하며 화이트 와인은 오일리(Oily)한, 즉 유질감(油質感)이 있는 것은 싫어하죠. 식물성 향보다 과일 향이 풍부한 와인을 좋아하고 단순한 향보다 복합적인 향이 나는 와인을 좋아합니다.
품종은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피노 누아(Pinot Noir), 시라(Syrah),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을 좋아하는데 진판델(Zinfandel)과 까르메네르(Carmenere), 그르나슈(Grenache)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마트에서 와인을 살 때 가능한 한 다양한 와인을 고르려 해도 막상 장바구니를 보면 좋아하는 스타일의 와인으로 가득 차 있곤 하죠. 사람에겐 취향이 있으니 이렇게 와인에 호불호(好不好)가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취향이 무의미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가격을 떠나 정말 잘 만든 와인을 만났을 때이죠. 저는 단맛이 나는 와인을 싫어하지만, 정말 잘 만든 스위트 와인 앞에선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지나치게 오일리하고 싸구려 오크 향이 나는 칠레 샤도네이는 싫어하지만, 에스따시옹(Estacion)이나 깔리테라 샤도네이(Caliterra Chardonnay)처럼 잘 만든 샤도네이 와인 앞에선 사족을 못 쓰죠. 또 달콤한 과일 풍미가 너무 강한 진판델 와인은 별로이지만 란초 자바코 드라이 크릭 리저브 진판델(Rancho Zabaco Dry Creek Reserve Zinfandel)처럼 뛰어난 와인은 좋은 점수를 주기에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정말 좋은 와인 앞에선 취향이 무의미해지는 걸 종종 느끼게 되죠.
2. 오노로 베라(Honoro Vera)
오노로 베라는 한때 제가 제일 싫어했던 포도인 모나스트렐(Monastrell)로 만들었습니다. 모나스트렐은 프랑스에선 무흐베드르(Mourvedre), 호주에선 마타로(Mataro)라고 부르는 포도입니다. 탄닌과 색소가 많아서 그르나슈처럼 색소와 탄닌이 약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 때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고 혼합하는 일이 많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종종 단일 품종 와인으로 만드는데, 탄닌이 너무 많아서 입안을 조이는 듯 뻑뻑하며 짠맛이 느껴지는 일도 있습니다. 또한, 탄닌이 너무 거칠어서 개봉 후에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제대로 된 맛을 즐길 수 있으며, 힘이 너무 강해 입안에서 느껴지는 자극이 지나치게 세기도 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모나스트렐 와인은 그냥 마시기엔 부담스럽고 풍미가 비슷하게 강한 음식, 예를 들어 소고기 등심이나 곱창구이 같은 요리와 곁들여야 좋죠.
위와 같은 이유로 아마 마트에서 이 와인을 봤더라면 레이블만 보고도 사지 않았을 텐데, 선물로 한 병을 받게 되어 시음해봤습니다. 그 결과는? 제가 싫어하는 품종으로 만든 와인인데도 아주 흡족하게 마셨습니다. 아마 모나스트렐을 좋아했더라면 더 맛있게 마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노로 베라는 모나스트렐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 훌륭한 맛과 향을 갖춘 와인입니다. 게다가 1만 원이라는 아주 저렴한 가격을 고려한다면 그 가치가 더욱 빛나죠.
3. 와인의 맛과 향
스페인 레반트(Levant)의 후미야(Jumilla) 지역에서 재배한 유기농으로 재배한 모나스트렐 100%로 만들었고 알코올 도수는 14%로 좀 셉니다.
약간 탁하며 의외로 짙지 않은 자주색입니다. 모나스트렐은 색소가 많은 포도라서 와인 색이 짙게 나오는데 조금 의외로군요. 오크와 비린내가 조금 섞인 검은 과일 향이 진합니다. 프룬(Prune)과 블랙베리, 블랙커런트의 향을 풍기네요. 시간이 지나면 은근한 동물성 향과 크랜베리 같은 붉은 과일 향도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우면서 너무 무겁지 않고 너무 떫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수렴성이 강한 모나스트렐답게 떫은맛은 적을지라도 입안을 조이는 느낌은 제법 셉니다. 이런 느낌은 개봉 후 40분 정도 지나면 사라지므로 조이는 느낌이 싫으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즐겨주세요. 모나스트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맛이 잘 나타납니다. 드라이하며 나무 조각을 갈아서 풀어 넣은 것처럼 강한 오크 풍미가 있습니다. 쌉쌀한 맛이 입안에 계속 남아서 맴도는 느낌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드러워지면서 진득한 과일 풍미가 강해지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마시길 바랍니다. 여운은 처음엔 느낌이 강하고 오래 이어지지만, 마신 후엔 별로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길게 이어지는 여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탄닌, 산도, 알코올, 풍미 등 모든 요소가 균형을 맞춘 편이지만, 여운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곱창 같은 소나 돼지의 내장 요리,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 슈하스코 같은 고기 꼬치 요리, 하몽 같은 생햄, 의성 마늘 햄처럼 향미가 강한 햄처럼 풍미가 강한 음식과 잘 맞습니다.
2010년 12월 2일 시음했습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C-로 맛과 향이 좋은 와인입니다.
위에 언급된 와인에 관한 정보는 아래의 글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