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일반

[기초] 적포도와 청포도, 화이트 와인 양조에 관하여

까브드맹 2018. 6. 12. 08:00

세 종류의 그르나슈 포도
(세 종류의 그르나슈)

1. 포도 껍질색과 품종

포도 중에는 원래 같은 품종이었지만, 껍질의 색이 바뀌면서 다른 품종으로 갈라진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동북부에서 많이 재배하는 피노 누아(Pinot Noir), 피노 그리(Pinot Gris), 피노 블랑(Pinot Blanc)은 모두 근연종으로 유전자가 거의 같습니다. 본디 한 품종이었는데 토양과 기후에 따라 어느 순간 껍질 색이 변이를 일으켰고, 품종 개량 등으로 다른 포도로 분화한 것이죠. 그래서 이름도 피노(Pinot) 뒤에 각각 흑색, 회색, 백색을 뜻하는 Noir, Gris, Blanc이라는 단어가 붙은 겁니다.

프랑스 남부와 론 밸리(Rhone Valley)에서 많이 재배하는 그르나슈(Grenache)도 같은 경우입니다.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 그르나슈 그리(Grenache Gris),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도 원래는 품종이었으나 껍질 색이 변하면서 다른 품종으로 나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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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포도와 청포도

보통 레드 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나 메를로(Merlot) 같은 적포도로 만들고, 화이트 와인은 샤르도네(Chardonnay)나 리슬링(Riesling) 같은 청포도로 만듭니다. 그래서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포도의 껍질 색에 따라서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으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레드 와인을 만들 때 적포도를 쓰고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때 청포도를 쓰는 것은 완성된 와인에서 기대하는 특성을 만들어주는 요소, 예를 들어 화이트 와인의 산도와 레드 와인의 탄닌 같은 성분이 품종에 따라 알맞게 들어있기 때문이지 꼭 포도 색깔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청포도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면 껍질의 색소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더 효율적이죠. 그래서 인류는 오랫동안 화이트 와인 생산에 알맞은 청포도 품종을 만들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청포도가 많이 없었던 로마 시대에도 적포도의 껍질을 제거한 다음 과육만으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레드 와인을 만들 때 적포도만 쓰지 않고 청포도를 함께 넣기도 합니다. 프랑스 론 밸리의 꼬뜨 로띠(Cote Rotie) 마을에선 레드 와인에 신선한 느낌과 향을 더해주려고 청포도인 비오니에(Viognier)를 함께 넣어서 양조합니다. 호주에서도 이것을 본떠 쉬라즈(Shiraz)와 비오니에를 섞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죠.

적포도인 쉬라즈와 청포도인 비오니에를 혼합해서 만든 호주의 얄룸바 와인
(적포도인 쉬라즈와 청포도인 비오니에를 혼합해서  만든 호주의 얄룸바 와인)

또한 색소와 탄닌 때문에 청포도만 갖고 레드 와인을 만들 순 없지만, 적포도만 사용해서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적포도만 갖고 만드는 화이트 와인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적포도인 피노 누아와 피노 므니에(Pinot Meunier)로 만드는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s) 샴페인입니다. 블랑 드 누아 샴페인은 적포도만 써서 만들지만, 색은 다른 샴페인이나 화이트 와인과 똑같이 밀짚 색, 혹은 레몬색이죠.

3. 적포도로 화이트 와인 만들기

적포도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때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진 않습니다. 청포도로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방법 그대로 만들면 되죠. 와인을 만드는 첫째 과정은 당연히 포도 수확입니다. 그다음엔 수확한 포도의 껍질을 터트려서 포도즙(Must)이 흘러나오도록 합니다. 그래야 효모가 포도즙에서 발효 작용을 할 수 있죠. 이 과정을 으깨기, 또는 파쇄(Crushing)라고 합니다.

 

 

 

레드 와인이라면 다음에 발효 과정으로 들어가지만, 화이트 와인은 한 단계를 더 거칩니다. 으깬 포도에서 껍질과 씨를 분리하고 포도즙을 짜는 압착(Pressing)이라는 과정이죠. 압착을 먼저 하는 이유는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땐 껍질과 씨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적포도로 와인을 만들어도 이렇게 압착해서 껍질과 씨를 제거해버리면 껍질에서 색소가 빠져나올 틈이 없어서 화이트 와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너무 세계 압착하면 껍질의 색소가 포도즙과 함께 빠져나올 수 있죠. 그래서 '살살' 눌러서 색소는 빠지지 않고 포도즙만 흘러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샴페인은 규정상 수확 후에 즉시 압착하고 160kg의 포도에서 포도즙을 102ℓ까지만 짜낼 수 있도록 해서 껍질의 색소가 포도즙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그런데 압착할 때 일부러 힘을 가해서 껍질의 색소가 살짝 빠져나오도록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색소를 조금 빼서 만든 와인을 블러시 와인(Blush Wine)이라고 부르며 로제 와인(Rose Wine)의 일종입니다. Blush라는 단어는 '얼굴이 빨개지다.', '홍조', '(장미의) 발그레함'이란 뜻인데, 와인에 분홍빛이 돌아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마트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는 화이트 진판델(White Zinfandel) 와인이 이런 블러시 와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