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뗌프라니요(Tempranillo)
뗌프라니요는 스페인의 국민 품종(?)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입니다. 동쪽의 리오하(Rioja)부터 남쪽의 발데페냐스(Valdepenas), 중앙의 라 만차(La Mancha)와 북쪽의 나바라(Navarra)까지 스페인 곳곳에서 재배하며 온갖 형태와 크기의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품종이죠. 고급 와인이든 저급 와인이든 스페인의 많은 와인을 뗌프라니요로 만듭니다.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는 고급 와인으로, 리오하에서는 잘 숙성된 레드 와인으로, 발데페냐스와 라만차, 소몬타노 등에서는 오크 숙성하지 않은 미숙성 와인으로 모습을 달리한 뗌프라니요 와인을 생산하죠.
재미있는 것은 뗌프라니요는 고급이면 고급대로 저급이면 저급대로 개성 있는 와인이 된다는 겁니다. 잘 익은 뗌프라니요로 고급 와인을 만들면 서양 자두와 블랙베리 향에 고급스러운 담배 향이 나오며, 잘 숙성된 탄닌이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매끈한 맛을 보여줍니다. 뗌프라니요로 대량 생산 와인을 만들면 달콤한 딸기 향과 잼 향과 섞인 푸릇푸릇한 허브 향을 맡을 수 있으며 푸근하고 편안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에 스페인이 와인 산업에 관한 법을 제정하지 않고 낙후된 상태였을 때는 와인의 품질 관리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뗌프라니요 와인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꽤 낮은 평가를 받았죠. 스페인 와인에 관한 선입견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품질과 비교해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 하는 일이 있곤 합니다. 또한,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보다 포도 재배지가 넓고 인건비는 저렴합니다. 이것이 와인 가격에 반영되어 와인 값이 싼 편이죠.
저렴한 가격은 스페인 와인을 싸구려로 생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국내 와인 수입사의 요구대로 만드는 와인 중에는 프랑스에서 만들 때 5,500~8,000원에 팔리다가 스페인에서 만들면서 4,900~6,000원에 팔리는 것도 있죠. 하지만 뒤늦게나마 스페인 정부가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법을 본받아 법규를 정하고, 생산자들도 와인의 품질 향상에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스페인 와인은 눈부시게 성장했고, 일부 고급 와인은 놀라운 가격으로 시장에서 팔립니다.
2. 에스쿠도 데 오로(Escudo de Oro) 2006
라 만차의 DO 등급 와인인 에스쿠도 데 오로는 저렴한 스페인산 뗌프라니요 와인입니다. 칠레의 유명한 와인인 에스쿠도 로호(Escudo Rojo)하고 이름이 비슷하죠? 에스쿠도 로호의 인기에 편승해서 이름을 지은 것인지, 아니면 같이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여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블부터 맛까지 완전히 달라서 이름을 오인해 잘못 구매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가격 차이가 크고 에스쿠도 데 오로의 가격이 품질에 맞게 저렴해서 손해를 볼 일은 없습니다. 에스쿠도 데 오로는 '황금의 방패'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에스쿠도 로호는 '붉은 방패'고요.
첫 향은 저렴한 뗌프라니요 와인에서 나오곤 하는 값싼 딸기 주스 향입니다. 곧 딸기 젤리 향과 함께 싸구려 가죽에서 풍기는 냄새와 말린 자두에서 나오는 향을 맡을 수 있죠. 아무래도 저가 포도주이다 보니 향이 고급스럽지는 못합니다. 맛을 보면 탄산 기운을 약간 느낄 수 있습니다. 알코올 발효가 끝난 후에 숙성하는 동안 잔당 발효로 생긴 탄산 가스가 와인을 병에 넣은 후에 빠져나오지 못한 듯합니다. 저가 와인 중에선 숙성 기간이 짧아서인지 탄산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을 종종 만날 수 있죠. 이 탄산 기운 때문에 입안에 쎄-한 느낌이 있습니다. 살짝 단맛이 나면서 쓴맛이나 떫은맛이 거의 없는 꽤 가벼운 와인입니다. 와인을 처음 마시는 분들이 경험하기에 무난하며 미디엄 바디나 풀 바디의 묵직한 와인을 싫어하는 분이라면 싼값에 한 번 마셔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가벼운 타파스나 까나페, 피자, 해물탕 같은 탕 요리 등과 함께 마시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