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포도 품종

[크로아티아] 진판델/프리미티보 -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포도 (재업)

까브드맹 2023. 12. 6. 20:42

진판델 포도의 모습

원래 동유럽에서 태어났지만, 이제는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포도로 자리 잡은 진판델(Zinfandel)은 가장 미국적인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품종입니다. 짙은 색깔, 묵직한 느낌, 풍부하고 부드러운 탄닌, 강렬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진판델 와인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스타일이죠. 때론 너무 달콤한 향을 풍기고, 다른 레드 와인보다 달아서 드라이한 맛을 찾는 분은 꺼리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매력적인 포도임은 틀림없습니다.

1. 진판델의 특성

진판델의 특성 중 하나는 포도 한 송이에 달린 포도알의 익는 속도가 각기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포도가 완전히 익을 때면 몇몇 포도알은 건포도처럼 쪼글쪼글 말라 있죠. 포도 한 송이당 10~15% 정도의 포도알이 건포도처럼 되는 것은 아주 흔합니다. 프랑스 루아르 밸리(Loire Valley)에서 많이 재배하는 슈냉 블랑(Chenin Blanc)도 비슷한 특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루아르에서는 수확 시기를 달리해서 일일이 손으로 포도알을 따지만, 미국에선 포도가 다 익기를 기다렸다가 한 번에 수확합니다.

이러다 보니 수확한 진판델에는 당분이 매우 많고, 이를 발효해서 만든 와인도 자연스럽게 알코올 도수가 높아집니다. 알코올 발효가 끝난 후에도 잔당이 많이 남아서 진판델 와인은 대개 맛이 달죠. 이처럼 발효 후에 잔당이 남아서 생긴 와인의 단맛은 설탕을 넣어서 만든 단맛과 차이가 큽니다. 무척 자연스럽고 풍미가 뛰어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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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판델의 역사

고고학자들은 인류가 기원전 7천 년경 조지아(Georgia) 지역에서 양조용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종 포도를 재배했고, 와인 양조법도 개발했던 것을 밝혀냈습니다. 포도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은 조지아에서 인근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크로아티아(Croatia)에도 전파되었죠. 크로아티아에서 몇 종의 토착 품종이 생겼는데, 이 포도들은 진판델과 관계있는 품종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토착 품종들은 19세기 크로아티아 와인 산업의 기반이 되었고, 주변 국가에도 퍼져나갔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필록세라(Phylloxera vastatrix)가 전 유럽의 포도밭을 휩쓸면서 거의 사라졌죠. 2001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의 작은 마을인 오미스(Omis)에서 츨레냑 카스텔란스키(Crljenak Kaštelanski)라고 부르는 아홉 그루의 포도나무가 발견될 때까지 이 포도들은 사람들에게 잊혀 있었습니다.

츨레냑 카스텔란스키 포도의 모습

크로아티아 포도의 자손인 진판델은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간 것일까요? 학자들은 진판델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황실 종묘원을 통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측합니다.

1797년 오스트리아는 예전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역이었던 달마티아 지방을 얻었고, 이때 츨레냑 카스텔란스키의 꺾꽂이묘를 황실 종묘원으로 가져왔습니다. 롱 아일랜드(Long Island)의 원예가인 조지 깁스(George Gibbs)는 1820년부터 1829년 사이에 쉔브룬 궁전(Schonbrunn Palace)과 유럽의 다른 곳으로부터 포도 꺾꽂이묘를 수송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1829년에 받은 포도 꺾꽂이묘 중에는 미국 원예학의 시조인 윌리엄 로버트 프린스(William Robert Prince)가 1830년의 논문에서 "헝가리의 블랙 진파르델(Black Zinfardel of Hungary)"이라고 언급했던 포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파르델은 헝가리어인 지니판드리(tzinifandli)가 변형된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테르멘레기온(Thermenregion)에서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청포도인 치어판들러(Zierfandler)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깁스는 1830년 보스턴(Boston)을 방문했고, 그로부터 꺾꽂이묘를 받은 사무엘 퍼킨스(Samuel Perkins)는 곧 '젠펜달(Zenfendal)' 꺾꽂이묘를 팔기 시작합니다. 1835년 보스턴의 묘목장 주인인 찰스 엠 호베이(Charles M. Hovey)가 식용 포도로 진판델을 추천하면서 진판델은 온실에서 키워 6월 전에 일찌감치 수확해서 판매하는 포도로 널리 재배되었죠.

1847년 존 피스크 알렌(John Fisk Allen)이 쓴 <포도나무의 문화와 처치에 관한 실용적인 논문>에서 진판델 와인에 대한 첫 언급이 나옵니다. 그러나 1850년대에 보스턴에서 온실 재배가 쇠퇴하면서 농부들은 진판델 대신 추운 야외에서도 잘 자라는 미국종 포도인 콩코드(Concord)와 다른 포도를 심기 시작합니다. 같은 시기에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시가 시작되자 프린스와 또 다른 묘목 업자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그때 진판델도 함께 가져갔죠. 이렇게 되어 진판델은 캘리포니아에서 널리 재배하게 되었습니다.

 

 

3. 진판델과 프리미티보(Primitivo)

이탈리아 남부, 특히 뿔리아(Puglia)에서 많이 재배하는 프리미티보는 1870년대의 이탈리아 정부 문서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프리미티보라는 이름은 프리마티부스(primativus), 혹은 프리마티치오(primaticcio)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프리미티보가 다른 포도보다 일찍 익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죠.

1967년 U.C 데이비스 대학의 오스틴 고힌(Austin Goheen) 교수는 이탈리아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프리미티보 와인을 마셔본 교수는 프리미티보와 진판델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걸 발견하고, 1968년에 프리미티보를 캘리포니아로 가져왔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포도 분류학자들은 프리미티보와 진판델의 기원을 연구했고, 두 포도의 족보가 차츰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에 미국의 포도 분류학자들은 이탈리아의 프리미티보와 미국의 진판델은 동일한 포도라고 발표했습니다. 1999년에는 유럽연합(EU)도 진판델과 프리미티보가 같은 포도라고 공식 발표했고, 미국도 이를 인정하여 라벨에 두 품종 중 어떤 것으로 표기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덕분에 이탈리아는 미국으로 수출하는 프리미티보 와인의 라벨에 진판델이라고 표시할 수 있게 되었죠.

이탈리아에서 프리미티보라는 품종명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진판델이란 명칭이 나타난 것보다 40년 정도 후의 일이기 때문에 한때 진판델이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도 있었지만, 크로아티아에서 츨레냑 카스텔란스키가 발견되면서 이 가설은 힘을 잃었습니다. 현재 학자들은 프리미티보를 18세기에 크로아티아에서 아드리아해(Adriatic Sea) 넘어 뿔리아로 건너간 츨레냑 카스텔란스키의 클론 품종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미국의 <알코올과 담배 세금 및 무역국(Alcohol and Tobacco Tax and Trade Bureau, TTB)>은 미국산 진판델 와인의 라벨에는 프리미티보라는 품종명을 표시할 수 없다고 판정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아직까진 두 품종의 DNA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별도의 품종으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죠. 2002년에 <알코올, 담배, 총기 및 폭발물국(The 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ATF)>은 두 품종을 동의어로 인정할 것을 제안했지만, 2008년 7월에 철회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미국산 와인의 라벨에는 진판델과 프리미티보를 같은 품종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4. 진판델 포도의 재배지

1) 미국

미국산 진판델 와인은 포도가 자라는 지역과 기후, 포도밭과 포도나무 나이, 와인 생산자가 사용한 양조 기술에 따라 품질과 특성이 많이 달라집니다. 미국의 와인 생산자들은 진판델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죠. 과일 향이 풍부한 진판델 레드 와인과 달콤한 로제 와인인 화이트 진판델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스타일입니다. 늦게 수확해서 단맛이 강한 레이트 하비스트 와인과 보졸레처럼 가벼운 레드 진판델, 포트 와인 같은 진판델 강화 와인도 생산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선 전통적으로 하나의 포도밭에서 진판델과 쁘띠 시라(Petite Sirah), 까리냥(Carignan), 그르나슈(Grenache), 무흐베드르(Mourvedre), 미션(Mission), 뮈스까(Muscat) 등을 함께 재배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진판델만 따로 재배하는 포도원이 대부분이지만,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을 만들 때 진판델에 다른 포도를 계속 섞고 있죠.

캘리포니아 전체 포도밭의 약 11%가 진판델밭이며, 수확량은 샤르도네(Chardonnay)와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에 이어 3위를 차지합니다. 매년 와인 양조에 사용하는 진판델은 35만 톤가량입니다.캘리포니아 외에 애리조나(Arizona)와 콜로라도(Colorado), 일리노이(Illinois) 등등 미국의 다른 16개 주에서도 진판델을 많이 기릅니다.

2) 이탈리아

뿔리아의 와인 생산지 지도

부츠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에서 장화 굽에 해당하는 위치인 뿔리아(Puglia)에서 프리미티보를 주로 재배합니다. 프리미티보 수확량은 이탈리아에서 재배하는 포도 중 12위 정도이며, 주요 와인 생산지는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Primitivo di Manduria) DOC, 지오이아 델 꼴레 프리미티보(Gioia del Colle Primitivo) DOC, 팔레르노 델 마씨코 프리미티보(Falerno del Massico Primitivo) DOC 세 곳입니다.

5. 진판델 와인의 향

진판델 와인의 풍미는 포도의 완숙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서늘한 곳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에선 라즈베리처럼 붉은 베리류의 과일 풍미가 우세하고, 따뜻한 곳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면 블랙베리와 아니스(Anise), 후추 풍미가 강한 편입니다. 이처럼 포도의 당도에 따라 와인의 핵심 풍미가 달라지며, 브릭스 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 브릭스 : 아직 과일 풍미가 나타나기 전이지만 일부 와인은 담배와 사과 껍질 풍미가 나옵니다. 화이트 진판델은 이 정도 당도일 때 만듭니다.

• 23 브릭스 : 딸기

• 24 브릭스 : 체리

• 25 브릭스 : 블랙베리

 

 

6. 진판델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달콤한 과일 풍미가 진한 진판델은 다양한 음식과 어울립니다. 꼬꼬뱅, 바비큐, 소시지, 그릴에 구운 칠면조와 닭 같은 서양식 육류 요리부터 데리야키 소스를 뿌린 일식 고기 요리와 잠발라야, 부리토, 타코 등등 여러 음식과 잘 맞죠. 향신료를 얹은 참치와 연어 요리에도 좋고, 단맛이 있어서 초콜릿케이크와 브라우니, 티라미수 같은 디저트와 먹어도 좋습니다.

화이트 진판델도 고급 치즈와 푸아그라, 애피타이저, 파스타, 라자냐, 햄 등등 여러 가지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