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세계 와인의 도약
세계 와인 시장의 판도를 보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 와인이 고급 와인 시장의 주도권을 아직 쥐고 있는 가운데 미국 컬트 와인을 중심으로 칠레와 호주의 고급 와인이 치고 올라오는 상황이지만, 중저가 시장은 이미 신세계 와인이 대세입니다. 소비자 입맛에 따른 맛과 향, 각 품종의 개성을 잘 드러낸 스타일, 이해하기 쉬운 레이블, 다양한 품종을 사용한 새로운 혼합 방법 등등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신선하고 창의적인 노력을 보여주는 신세계 와인은 아직은 구세계보다 부족한 전통과 경험 부분에서도 세월이 흐르면서 한 발 한 발 추적해가고 있죠.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와인 박람회와 품평회에서 신세계 와인이 구세계 와인을 제치고 상위권에 올라가는 일은 더는 새로운 사건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미국 와인에 조금 치우친 인상을 받지만, 미국의 유명 와인 잡지인 와인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에서 매년 100대 와인을 선정할 때 10위권 안에 미국 와인을 비롯한 다양한 신세계 와인이 들어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저만 하더라도 시음하면서 점수를 매긴 와인의 목록을 살펴보다가 뜻밖에 칠레 와인들의 점수가 높고, 프랑스 와인과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구세계 와인들의 점수가 낮은 것을 보고 놀라곤 하죠. "내 입맛에는 신세계 와인보다 구세계 와인이다"라고 생각해도 정작 점수는 반대로 나타나는 것은 신세계 와인의 품질이 매우 좋아졌다는 하나의 증거겠죠. 이런 경향은 특히 중저가 와인에서 강해서 5만 원 이하 와인이라면 어설픈 구세계 와인을 고르느니 신세계 와인을 고르는 것이 더욱더 확실하고 안전한 선택이 되고 있습니다.
2. 하라스 캐릭터 샤도네이(Haras Character Chardonnay)
칠레 마이포 밸리(Maipo Valley)의 샤도네이(Chardonnay) 포도 100%로 만드는 하라스 캐릭터 샤도네이 역시 이런 사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듯합니다. 말굽 모양의 양조장 건물로 유명한 비냐 하라스 데 피르케(Vina Haras de Pirque)는 일찍이 중저가 와인인 에쿠스(Equus)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와이너리입니다. 칠레 와인 좀 마셨다는 분 중에서 하라스는 몰라도 에쿠스는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에쿠스는 가격보다 뛰어난 품질로 인기를 끌었죠. 국내 와인 시장엔 까베르네 소비뇽을 비롯한 3종류의 와인이 수입되었으며 모두 국내 와인 애호가와 소비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캐릭터 씨리즈는 에쿠스보다 위 등급으로 국내에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시라(Syrah), 샤도네이 3종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번에 시음한 것은 캐릭터 샤도네이로 영국의 와인 평론가인 오즈 클라크가 "입에 닿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오면서 자꾸 마시고 싶은 와인"이라고 적었던 신세계 샤도네이 와인의 미덕을 그대로 갖춘 와인입니다. 시음하는 동안 자꾸 손이 가고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더군요. 물론 이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풍미가 있는 샤도네이 와인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을 고려해보면 이만한 품질의 샤도네이를 찾기란 당분간 쉽지 않을 것 같군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향과 맛이 나서 와인을 처음 마시는 사람도 만족할 만한 풍미를 보여주며 음료수처럼 그냥 마셔도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3. 와인의 맛과 향
색은 진한 담황색, 또는 가을날 석양에 반짝이는 잘 익은 벼가 떠오르는 황금빛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신선한 버터가 생각나는 향이 풍성하게 흘러나옵니다. 감귤 기름 향도 상당하며 향긋하고 고소한 견과류 향도 느낄 수 있죠. 나중엔 향긋한 오크 향도 맡을 수 있습니다.
부드럽고 신선하면서 청량한 탄산 기운이 미세하게 나와서 상쾌한 맛이 납니다. 진한 느낌과 청량한 느낌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질감이죠. 또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이 매혹적인 느낌을 줍니다. 달지 않고 드라이하며, 두드러지진 않지만 은근한 신맛이 납니다. 노란 열대 과일 향도 있지만, 그것보단 녹인 버터를 살짝 끼얹은 듯한 풍미가 더 강합니다. 매우 부드럽고 기름진 느낌이지만, 싸구려 식용유가 아니라 상당히 우아하게 정제된 고급 기름 같습니다. 감귤 기름과 버터를 함께 녹인 듯한 풍미와 함께 감칠맛이 느껴지는 와인으로 풍미가 단순하고 드라이하지만, 감귤과 버터라는 매력적인 요소를 최대한 끌어내어 달고 부드러우면서 고소한 풍미를 갖췄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와인의 힘은 순해지지만, 그래도 처음 느꼈던 맛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여운은 제법 길고 풍미가 깊지만, 입에서 쟁쟁 울릴 정도는 아닙니다. 색과 향, 질감, 맛, 여운이 상당히 잘 어우러진 수작(秀作)입니다. 물론 각 요소가 기절할 만큼 감탄스럽진 않지만,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죠. 사람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만큼 뛰어난 맛과 향을 지녔습니다. 가격은 5만 원 정도로 신세계 화이트 와인 중에서 이 정도 품질과 이 정도 가격이라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해산물 크림 소스를 얹은 파스타와 해산물 요리, 농어와 연어 스테이크, 타르타르 소스를 얹은 생선 까스 등과 잘 어울리는 맛과 향입니다.
개인적인 평가는 B로 맛과 향이 훌륭한 매력적인 와인입니다. 2011년 1월 15일 시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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