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스페인] 3년 전의 기억을 그대로 - Marques de Caceres Gran Reserva 1995

까브드맹 2010. 7. 20. 10:34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그란 레세르바 1995

1. 와인과 사람에 대한 단상

오랜만에 만났어도 여전히 예전의 좋은 모습을 간직한 채 변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다시 본지 일 년도 안 되었는데도 아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죠. 시간이 지날수록 속물이 되어 지저분하게 시드는 꽃처럼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며 삶의 향기가 풍기는 사람도 있죠.

와인도 사람 같아서 몇 년만 지나면 맛과 향이 급속도로 꺾여서 별 볼 일 없는 와인이 있지만, 숙성될수록 맛과 향이 더욱 좋아지는 것도 있습니다. 쇠퇴기에 이르면 맛도 향도 사라져 시큼털털하며 뿌옇게 되는 와인이 있지만, 향과 맛이 천천히 잦아들고 부드러워지며 한창때완 또 다른 편안함을 주는 와인도 있습니다.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이 다양하듯 와인도 숙성하면서 절정기를 맞고 쇠퇴하는 모습 또한 각양각색입니다. 와인은 흔히 사람에 비유되는데 사람이 사람에게 관심을 두듯 와인의 다양한 모습에 매력을 느끼면 어떤 술보다 더 깊게 매혹되어 헤어나지 못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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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그란 레세르바(Marques de Caceres Gran Reserva) 1995

이 와인은 스페인의 어퍼 에브로에 있는 리오하(Rioja) 지역에서 1995년에 수확한 뗌프라니요(Tempranillo) 85%에 가르나차 띤타(Garnacha Tinta) 8%와 그라시아노(Graciano) 7%로 양조한 다음 오크통 속에서 2년, 병에서 3년간 숙성한 후 시장에 나온 와인입니다. 평범한 일반 와인 같으면 대부분 사람의 입안에 들어갔을 때 긴 준비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와인이죠.

이 와인들이 세상의 빛을 본 지 또 10년이 흘렀습니다. 오랜 인고의 시간이 남다른 맛과 향을 부여한 것일까요?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그란 레세르바의 맛은 사뭇 매혹적입니다. 연필을 깎았을 때 맡을 수 있는 나무 부스러기 향과 함께 진한 붉은 과일 향, 그리고 잼 향. 입안에서 느끼는 감촉은 매우 부드러워서 비단, 혹은 비로드 같습니다. 맛은 진하며, 질리지 않을 듯한 은은한 단 풍미와 살짝 쌉쌀한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잘 익은 과일에서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산도를 경험할 수 있고, 잔의 바닥에 남겨진 와인에선 졸인 잼과 육계피 향이 흘러나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달콤한 향, 자연스러운 목 넘김과 약해지지 않는 강하고 긴 여운은 이 와인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소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 숯불에 구운 소고기 구이, 하몽을 올린 바게트, 비프스튜, 미트 소스 파스타와 피자 등과 함께 마시면 아주 좋습니다.

 

 

저는 이 와인의 같은 빈티지를 모두 세 번 마셔봤습니다. 2008년 1월 5일에 처음 마시고 바로 매장에 연락해서 한 병을 예약한 후 2월에 마셔보았죠. 이번에 다시 한번 경험했는데, 3년 전에 마셨을 때 느꼈던 느낌과 감동을 또 한 번 맛볼 수 있었습니다. 3년 전과 비교해 보면 힘은 조금 약해진 듯하지만 향과 맛의 깊이는 더욱 원숙해졌군요. 이 와인의 절정기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5년 정도는 이 상태를 유지할 것 같으며 보관상태가 좋다면 10여 년 정도 건강한 모습으로 있을 듯합니다.

사람도 그렇고 와인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서 자라고 절정을 보여주다 이윽고 쇠퇴하며 스러지지요. 그 과정에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또 어느 정도 자라게 될지, 얼마나 찬란한 빛을 발할지, 이윽고 얼마나 아름답게 스러져갈지... 사람마다 와인마다 다르겠죠. 저는 이런 멋진 와인을 마실 때마다 과연 내 삶도 이 와인처럼 멋지게 성장할 수 있을지, 또 얼마나 아름답게 사라져 갈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최소한 와인에 뒤처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죠? 시중에서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그란 레세르바 1995년은 구하실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빈티지라도 꼭 구매해서 마셔보세요. "맛있는 스페인 와인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