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일반

[시음]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을 해봅시다.

까브드맹 2010. 8. 9. 21:37

르루아 버티컬 테이스팅

1. 버티컬 테이스팅이란?

"버티컬(Vertical) : 수직의, 각 단계를 세로로 잇는, 종단적인"

‘버티컬’은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이어진 모습을 뜻하는 형용사입니다. 와인의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은 "같은 생산자의 와인을 빈티지별로 동시에 시음해보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시음회에선 지역별 시음회를 하거나 품종별 시음회를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메독(Medoc) 지역에 있는 여러 샤토의 와인을 시음하거나, 세계 각지에서 생산하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와인을 시음하거나 하죠. 또 한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 포트폴리오를 시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산타 헬레나(Santa Helena)의 와인을 시음한다면 제일 저렴한 버라이어탈급에서 샤르도네, 위 등급인 시글로 데 오로급에서 메를로, 그다음의 그란 레세르바 급에서 까베르네 소비뇽, 더 위 등급의 노타스 데 구에르다... 이런 식으로 시음하는 겁니다. 위의 세 가지가 동호회나 와인 앤 다인(Wine &amp Dine) 행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시음 형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와인을 집중적으로 파악하려면 버티컬 테이스팅이 가장 효과적이며, 빈티지에 따른 품질 차이가 상대적으로 큰 프랑스 와인을 알아볼 때 특히 유용한 시음 방식입니다.

반응형

 

2. 프랑스의 기후

프랑스의 기후는 와인이 나오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변덕스럽습니다. 지중해와 접한 남쪽 지역의 지중해성 기후대와 대서양과 접한 서쪽의 해양성 기후대, 그리고 내륙의 대륙성 기후대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륙성 기후대가 크게 확장하면 저위도 지역까지 한파가 불어 닥치며 남쪽의 보르도까지 냉해를 입기도 합니다. 실제로 1956년에 보르도에 아주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쳐 뽀므롤(Pomerol)과 쌩-테밀리옹(St-Emilion) 지역의 수많은 포도나무가 얼어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해마다 다른 날씨는 포도 작황에 많은 차이를 가져오고, 포도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 와인도 해마다 품질 격차가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보르도의 오-메독(Haut-Medoc)에 있는 뽀이약(Pauillac) 마을에서 나오는 샤토 라투르(Château Latour)는 1990년대에 해마다 와인 품질이 달랐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1995~1999년의 샤토 라투르에 해마다 다른 점수를 매겼는데, 그 점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99년 93점

• 1998년 90점

• 1997년 86점

• 1996년 99점

• 1995년 96점+

일 년 차이일 뿐인데 점수 차이가 최고 13점이나 날 정도로 빈티지마다 와인 품질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죠. 당연히 품질에 따라 와인 가격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그래서 와인 샵이나 마트에서 유명한 고급 와인을 매우 싼 가격에 구매했다면, 작황이 안 좋았던 해의 포도로 만든 것이 아닌지 알아봐야 합니다.

빈티지에 따른 품질 차이는 단순히 가격의 높고 낮음을 떠나 와인을 언제 마시는 것이 가장 좋은지 결정하기 때문에 고가의 와인일수록 꼭 알아둬야 할 정보입니다. 위에 나온 샤토 라투르의 1997 빈티지에 관해 파커는 '생산 후 10년간 즐길 수 있다'라고 평가했고, 1996 빈티지는 '2015~2050년이 시음 적기'라고 했습니다. 약간의 오차를 고려한다고 해도 샤토 라투르 1997년은 하루빨리 마시는 것이 최고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길이며, 샤토 라투르 1996년은 지금도 좋지만, 보관 환경이 좋은 곳에서 좀 더 둔 후에 마셔야 최고의 맛을 느낄 수 있죠. 이렇게 다른 술과 달리 해마다 조금씩 다른 품질을 가진 와인을 빈티지별로 마셔보는 것은 와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라고 할 수 있으며, 와인의 본질을 좀 더 깊게 느끼는 방법입니다.

 

 

3. 도멘 르루아 버티컬 테이스팅

제가 경험했던 버티컬 테이스팅을 얘기해보겠습니다. 시음 와인은 부르고뉴의 르루아 부르고뉴 루즈(Leroy Bourgogne Rouge)로 도멘 르루아(Domaine Leroy)의 부르고뉴 지역단위(Regional) 등급 레드 와인입니다. 빈티지는 1999년, 2003년, 2007년의 세 가지로 1999년과 2007년을 동시에 시음한 후 2003년을 시음했습니다.

르루아의 부르고뉴 지역 등급 레드 와인은 공통으로 자두와 라즈베리 등의 붉은 과일 향과 약간 꼬리한 흙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달지 않고 매우 드라이하며 깔끔한 산미를 보여줬습니다. 질감은 매우 매끄럽고 떫은맛은 거의 없으며 아주 탱탱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죠. 바디감과 여운도 상당했습니다. 동급의 다른 부르고뉴 와인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뛰어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세 와인은 빈티지별로 뚜렷한 개성과 차이점을 가졌습니다.

왼쪽부터 차례로 르루아 부르고뉴 루즈 1999년, 2003년, 2007년산
(왼쪽부터 차례로 1999년, 2003년, 2007년입니다만 같은 와인이니 라벨이 다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11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혹시 꺾이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1999년은 여전히 신선하고 풍부한 맛과 향을 보여줬으며, 절정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99년과 동시에 시음했던 2007년은 향과 맛이 아직 원숙하지 못하고 정돈되지 않아 입안에서 조금 거칠게 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이 시간에 따른 숙성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2007 빈티지의 특성에 따른 것인지는 2007년을 1999년산처럼 11년이 지난 후에 마셔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같은 도멘에서 만든 같은 종류의 와인인데도 두 와인은 확실히 다른 맛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3년은 처음 잔에 따랐을 때 미세한 탄산 기운을 느꼈습니다. 아마 병에 넣었을 때까지 탄산가스가 완전히 배출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매우 탄탄하고 강한 맛을 보여줬고, 15~20분 후가 되자 세 와인 중 최고의 향과 맛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편하게 마시기엔 1999년산이 가장 좋았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신다면 2003년의 파워가 두드러진 매력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이처럼 버티컬 테이스팅으로 마셔본 르루아의 세 와인을 약간 과장을 보태서 여자로 비유해보자면,

• 1990년 : 원숙미를 갖춘 큰 언니. 나이로 치면 28~29살 정도로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듯한 느낌.

• 2003년 : 한창 절정의 미모와 건강을 뽐내는 둘째 언니. 25~27살 정도로 화려하고 눈부신 매력을 발산하는 듯한 느낌.

• 2007년 : 아직은 어린 막내 같은 느낌. 어른으로 봐 달라는 듯하지만 여전히 어린 티가 나며 내면과 외면이 아직 다 성장하지 않고 어딘가 서투른 느낌.

이랄까요? 참고로 프랑스의 와인 가이드인 하슈테 뱅(Hachette Vins)에 나온 위 세 빈티지의 점수는 1999년이 13/20, 2003년이 17/20, 2007년이 12/20입니다. 점수를 통해 유추해보면 2007년은 10년 정도 지났을 때 1999년산과 맛과 향이 비슷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2003년은 한참 동안 절정기를 유지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같은 와인이어도 빈티지에 따라 제각각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이런 차이점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버티컬 테이스팅의 매력입니다. 혹시 가격에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와인이 있다면 꼭 한번 버티컬 테이스팅을 해보세요. 사랑하는 와인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