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역사

[역사] 스페인을 대표하는 리오하 와인의 역사

까브드맹 2023. 4. 6. 08:00

리오하 지역의 옛날 지도

리오하(Rioja)는 스페인의 와인 관련 법령인 DOP에서 상위 지역인 DOCa(Denominación de Origen Calificada, 자격을 갖춘 원산지 지정)로 분류된 와인 생산지입니다. 고대에 페니키아인이 최초로 포도를 재배했고, 19세기 중반 이후 크게 성장해서 오늘날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생산지 중 하나가 된 리오하 와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반응형

 

1. 초기 역사와 로마 시대

리오하에서 최초로 포도를 재배한 민족은 페니키아인입니다. 그들은 에브로 강(Ebro river)을 거슬러 올라가 알파로(Alfaro) 부근에 정착했죠. 그들은 고향인 레반트(Levant)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어 마셨습니다. 기원전 2세기 초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하면서 로마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고 리오하 지역도 로마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갈라호라(Calahorra)와 로그로뇨(Logroño) 시 부근에 로마군의 필수 보급품인 와인을 만들기 위한 포도밭이 만들어졌고 와인 양조장도 세워졌습니다. 이곳에선 75,000ℓ의 와인을 담글 수 있는 수조 같은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었죠. 와인 역사가 로저 디온(Roger Dion)은 로마인이 프랑스 보르도를 차지했을 때 심었던 포도 품종 중 일부가 리오하의 포도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 포도는 바실리카(Balisca)라는 고대 품종으로 오늘날 보르도에서 많이 재배하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메를로(Merlot), 쁘띠 베르도(Petit Verdot)의 조상 격인 포도라고 합니다.

 

 

2.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기

10~13세기에 리오하에서 포도밭은 지역 풍경에서 자연스러운 일부분이었습니다. 빠르면 13세기 후반에 리오하 와인이 다른 지역으로 수출된 증거가 있으며, 이는 리오하 와인의 상업적인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걸 뜻합니다.

 

15세기부터 리오하 알타(Rioja Alta)는 전문적인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지가 되었습니다. 인기 높은 산티아고 순례길(el Camino de Santiago)을 따라 중세 내내 수천 명의 기독교 순례자가 리오하 중심부를 지나갔고, 많은 방문객이 리오하에서 와인을 마셨죠. 그 결과 리오하 와인의 명성이 널리 퍼졌지만 와인 수출은 많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어인(Moors)의 이슬람 왕국을 몰아내고 기독교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수복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 이후 리오하의 와인 상인들은 와인 판매를 위한 외부 시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북쪽의 몇몇 보데가(Bodega)는 빌바오(Bilbao)와 산탄데르(Santander)의 무역 항구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와인 상인들과 거래했습니다. 이웃한 바스크 지방과 함께 한 와인 무역의 발전은 보데가의 와인 생산을 늘리는 자극제로 작용했습니다.

 

리오하 와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리오하 지방 당국은 와인 품질과 명성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갖추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1560년부터 리오하 지역에서 재배하지 않은 포도는 사용을 금지했고, 리오하 와인을 수출할 땐 와인의 진위를 보장하기 위해 염소 가죽을 식물 즙으로 세 번 처리해서 내용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보타 백(bota bag)에 담고 밀봉해서 내보내도록 했습니다.

 

 

3. 성장의 시기 : 18세기와 19세기

1780년대에 돈 마누엘 퀸타노(Don Manuel Quintano)가 프랑스 보르도에서 와인 양조 기술을 배워왔습니다. 돈 마누엘 퀸타노가 배워 온 숙성용 오크통의 사용은 리오하 와인의 수명을 극적으로 늘렸습니다. 리오하 와인의 수출 잠재력이 커지면서 리오하 와인의 해외 시장은 쿠바와 멕시코처럼 먼 지역까지 확장되었죠.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리오하 지역 당국은 모든 리오하 와인은 오크 사용으로 늘어난 비용과 관계없이 수출용과 국내 소비용의 가격이 같아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오크통을 쓸수록 경제적인 손해를 보게 했기에 오크통 사용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인기가 떨어졌습니다.

 

제1차 카를리스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빅토리아 공작(The Duke de la Victoria) 발도메로 에스파르테로(Baldomero Espartero)는 로그로뇨(Logroño) 인근에 보데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단독 섭정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급진적인 정책 때문에 1843년 실각했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빅토리아 공작과 보좌관인 루치아노 무리에타(Luciano Murrieta) 대령은 제법 규모 있는 영국 와인 시장에서 다른 국가의 와인과 경쟁하기 위해 리오하 와인 산업을 현대화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의했습니다. 그 결과 수십 년 전에 퀸타노가 그랬던 것처럼 무리에타가 선진적인 와인 산업을 배우기 위해 보르도로 파견되었습니다. 무리에타가 배워온 방법 중 하나는 포도를 으깰 때 전통적으로 야외에 설치된 석제 수조에 포도를 넣고 노동자들이 발로 짓밟는 방식 대신 큰 오크통에 넣고 파쇄와 발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숙성을 위한 오크통의 사용도 다시 도입했습니다.

 

1850년대에 갈리시아(Galicia) 지방의 포도밭에 백분병(powdery mildew)이 퍼졌고, 약간의 영향만 받은 리오하의 보데가에게 시장 확대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로그로뇨에서 빌바오(Bilbao)와 마드리드(Madrid), 이룬(Irun)으로 연결되는 철도의 완성은 유럽에서 필록세라(phylloxera)가 퍼지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합니다. 필록세라가 처음 퍼지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프랑스에선 리오하 와인에 대한 즉각적인 수요가 발생했습니다.

 

 

프랑스 와인 산업이 황폐해지면서 보르도에서 건너온 수십 명의 네고시앙(négociant)과 와인 생산자들이 와인을 계속 생산할 수 있는 와이너리를 세우려고 리오하 일대를 여행했고, 이들을 통해 와인 양조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기술, 경험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리오하 와인은 보르도 와인과 닮은 구석이 많죠. 그러나 와인 양조용 포도는 프랑스 품종이 아닌 스페인 고유 품종을 사용합니다. 아마 리오하의 떼루아가 프랑스 포도보다 스페인 품종에 더 알맞았던가, 아니면 리오하로 가져갈 안전한 포도 묘목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빨리 와인을 만들려고 스페인 품종을 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리오하 와인 산업은 전례 없는 성장과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860년에 리오하의 잠재력을 파악한 보르도의 와인 생산자들은 엘 시에고에 마르케스 데 리스칼(Marqués de Riscal)을, 1872년에는 로그로뇨 시 동쪽에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Marqués de Murrieta) 포도원을 세웠습니다. 대서양 연안과 철도로 연결된 리오하는 와인교역에 이상적인 위치였고. 멀리 리오하 바하에서도 짐수레로 블렌딩용 와인을 운반해 올 정도였죠 그 결과 1890년 무렵에 중요한 보데가들이 문을 열었습니다. 보데가들은 빠짐없이 기차역을 중심으로 밀집했고, 일부 보데가는 와인 수송을 위한 전용 승강장까지 보유했습니다.

 

리오하 와인 산업의 번영은 필록세라가 1890년대에 리오하에 퍼질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리오하에도 필록세라가 덮쳐왔지만, 이미 프랑스에 유럽산 포도나무의 뿌리 부분에 미국산 포도를 접붙여서 필록세라의 번식을 막는 방법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었기에 리오하의 포도밭에 새로 접목된 포도 묘목을 다시 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한편 지역 당국은 지역 안의 와인 공급을 우선시하여 모든 와인의 수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연간 75만ℓ 미만의 와인을 생산하는 보데가는 와인 수출이 금지되었죠.

 

 

4. 현대 : 20세기 이후

20세기의 전환기에 리오하 와인은 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스페인 와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리오하의 와인 산업에도 고난의 시기를 만들었죠. 전국적인 기근이 닥치자 스페인 정부는 식량 증산을 위해 포도밭을 갈아엎고 밀을 심으라는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밀밭으로 바뀐 땅 중 많은 곳에 포도나무를 다시 심을 수 있었죠.

 

1970 빈티지는 리오하 와인 산업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세기의 빈티지"로 널리 찬사를 받았고 와인 비평가들은 리오하를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 지역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이 성공으로 와인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급증했고, 리오하의 포도밭과 보데가에 외국의 투자가 유입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안 좋은 빈티지가 계속 이어지고 와인 가격도 너무 비싼 상태를 유지하면서 리오하 와인의 매출은 큰 폭으로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 같은 다른 스페인 와인 생산지가 국제적인 관심을 더 많이 받으면서 판매도 늘어나게 됩니다. 이에 대응하려고 리오하의 와인 생산자들은 전통적인 리오하 와인보다 더 영(young)하고 강하면서 색이 깊은 국제적인 스타일의 와인을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와인을 시장에 더 빨리 출시하고 더 일찍 즐길 수 있도록 지나친 오크 사용도 피하게 되었죠. 이런 조치로 판매가 개선되었고, 1991년에 리오하는 당시 최상급 와인 생산지를 뜻했던 D.O.Ca 등급을 스페인 최초로 받게 됩니다.

 

2017년에 리오하 와인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규정은 전통적인 와인과 함께 싱글 빈야즈 와인과 특정한 지역 와인(Zone Wines), 지방 자치체 와인(Municipality Wines), 고품질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Quality Sparkling White)과 스파클링 와인에 관한 내용을 포함합니다.

 

<참고자료>

1. 휴 존슨, 젠시스 로빈슨 저, 세종서적 편집부, 인트랜스 번역원 역, 와인 아틀라스_The World Atlas of Wine, 서울 : 세종서적(주), 2009

2. 영문 위키피디아 리오하 와인의 역사 항목

 

History of Rioja wine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spect of history La Rioja - the boundaries of the autonomous community are not identical to those of the wine region, which includes part of Álava The history of Rioja wine reflects a long and varied winemaking tradi

en.wikipedia.org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