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일반

[수다] 와인과 공기가 엮어가는 시간의 마술

까브드맹 2018. 4. 7. 21:00

디캔팅 중인 레드 와인

와인 초보자에게 와인을 추천할 때 "이 와인은 따고 나서 30분 정도 지난 후에 마시세요."라고 얘기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술을 따 놓고 그렇게 오래 못 기다린다는 분도 있고, 술 하나 마시는데 뭐 그리 어렵고 복잡하냐고 하는 분도 있죠. 하지만 코르크를 딴 후에 일정 시간 기다리는 것은 와인이 가진 풍미를 더욱 맛있게 즐기는 데 필요한 과정입니다. 모든 와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병 안의 와인은 개봉 후에 공기와 접촉하면서 맛과 향이 더욱 좋아지는 일이 많습니다. 

와인 코르크를 딴 후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죠. 하지만 기다림의 결과를 알게 되면 와인의 신비함에 놀라면서 왜 기다리라고 했는지 이해가 갈 겁니다. 시큼털털한 맛을 보여주는 와인이 풍성한 향과 우아한 맛을 보여주고, 억세고 씁쓸한 와인이 감미로운 향과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와인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와인과 공기가 만드는 마법에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게 정말 같은 와인이었단 말인가?"라고 느낄 때도 있죠.

이렇게 개봉 후 와인 맛이 더욱 좋아지는 것을 흔히 "와인이 열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아직 덜 열렸네.", "이제 다 열렸네.", "열리려면 좀 더 기다려야 되네."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하죠. 와인에 따라 열리는 시간은 틀리며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와인에 따라 심하면 하루가 지나야 열리는 것도 있고 따자마자 열려서 바로 좋은 풍미를 보여주는 것도 있죠. 저렴한 와인이나 미국과 칠레, 호주 등의 신세계 와인, 이탈리아 토스카나 와인은 대개 따자마자 바로 마셔도 풍미가 좋습니다. 반대로 프랑스 와인은 개봉 후에 일정 시간이 지나야 맛과 향이 좋아지는 일이 많죠. 고급 프랑스 와인 중에 레드 와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보르도 그랑 크뤼(Grand Crus) 와인은 코르크를 딴 후에 1~3시간 정도 지난 다음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고급 화이트 와인 중에서도 그런 것이 많습니다. 제가 마셔봤던 화이트 와인 중에서 부르고뉴의 꼭똥 샤를마뉴(Corton Charmagne) 와인은 따고 나서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최고의 맛과 향을 보여주더군요.

 

와인이 열리는 속도가 늦는 편인 고급 와인은 디캔터(Decanter)란 용기에 담아서 마시는 일이 많습니다. 디캔터에 와인을 따라서 공기와 접촉하는 면적을 늘려주면 와인의 향과 맛이 빠르게 열리게 되죠. 

하지만 평범한 와인을 디캔터에 담아서 마시면 맛과 향이 너무 빨리 열려버려서 오래 가지 않아 김빠진 맥주처럼 힘 없는 와인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대중적인 와인은 코르크를 딴 다음 한 잔 정도만 잔에 따라 천천히 마시다 보면, 조금 늘어난 와인 표면을 통해 천천히 열리는 와인의 맛과 향을 오랜 시간 즐길 수 있죠.

요즘은 신세계 와인 중에서도 개봉 직후보다 일정 시간이 지나야 풍미가 좋아지는 와인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원래 신세계 와인은 따서 바로 마셔도 좋은 맛과 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신세계에서도 구세계에 못지않은 고급 와인을 만들면서 천천히 열리는 와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