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 시음기

[미국] 다시 맛본 그 때의 와인 - Delicato Merlot 2005

까브드맹 2009. 9. 9. 00:36

델리카토 메를로 2005

1. 델리카토 메를로 와인의 추억

예전에 '한 번 맛을 보고 그 와인에 대해 평가하지 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요즘 이 말을 아주 실감나게 겪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시음했을 때는 "어, 이 와인 별로야. 맛없어. 꽝이야!" 했던 와인들을 최근에 다시 시음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어랏, 이 가격에 이 맛이면 꽤 괜찮네?"라고 내 마음속의 평가가 뒤바뀌는 일이 자꾸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델리카토 메를로도 그러한 와인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와인을 처음 마신 것은 2년 전 설날 연휴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도 그랬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 레드 와인에 대해 별로 안 좋은 평가를 하는 편견(?)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델리카토 화이트 진판델을 아주 맛있게 마시고 나서, "한번 진지하게 미국 와인을 시음해볼까?" 하는 생각에 올드 바인 진판델, 까베르네 소비뇽, 쉬라즈, 메를로, 이렇게 총 4가지의 델리카토 와인을 사다가 설 연휴 동안 하루에 한 종류씩 시음했지요. 평가 결과는 "쉬라즈만 쬐끔 마실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꽝이네!"  였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미국 와인에 대한 편견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런데 지난 주말에 와인 장터 행사장에서 델리카토 메를로를 사다가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빈티지도 2년 전과 같은 2005. 그리고 평가는 확! 바뀌고 말았답니다. 2년 사이에 와인이 병 안에서 숙성을 더해서 그런 것일까요? 델리카토 메를로는 얼레벌레한 와인에서 괜찮은 와인으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반응형

 

2. 와인 시음기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재배한 메를로 100%로 만드는 델리카토 메를로 와인은 짙은 적색으로 와인과 잔이 닿은 바깥 부분에서는 살짝 루비 빛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체리, 자두 같은 붉은 과일 향이 부드럽게 코끝에 와 닿고, 약간의 먼지 향이 느껴지더군요. 먼지 냄새가 나는 것은 와인잔에 먼지가 묻어있기 때문이었을까요? 글쎄요...마시기 전에 잔을 한 번 닦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비교적 저가에 품종이 메를로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향을 강하게 내 쏘는 스타일의 와인은 아닙니다. 입안에 한 모금 흘려 넣으니 적당한 산도가 혀에 살짝이 느껴지고,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 살짝 단맛이 나더군요. 거슬리지 않는 와인의 산도가 침을 저절로 샘솟게 하고, 이어지는 단맛이 편안하게 와인을 마실 수 있게 해줘서 전체적으로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리는 스타일의 맛을 내고 있습니다.

 

 

처음 오픈시에 탄산끼가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저가 와인들의 경우 오크 숙성 기간이 짧아서 와인 안의 탄산이 100% 빠져나가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요? 저가 와인을 마실 때 이러한 탄산끼를 느끼는 경우를 꽤 많이 겪어 보았기 때문에 무척 궁금합니다. 30분 정도 시간이 더 지나니 와인에서 캐러멜 향이 조금 나고 맛도 꽤 부드러워졌습니다. 아울러 거슬렸던 탄산 기운도 말끔히 사라졌네요. 다만 1시간 30분 정도 지나니 와인에서 더는 팔딱팔딱 생동하는 기운은 찾아볼 수 없고, 조용하게 가라앉은 느낌만 들 뿐이었습니다. 맛도 향도 비교적 단순하지만 그런 만큼 이해하기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타입의 와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 없이 그냥 마시기엔 감흥이 부족하고, 음식과 함께할 때 제 역할을 다할 듯합니다. "와인의 떫은맛이 싫어요!" 하는 와인 초보자들에게 무난히 추천할 만합니다.

돼지고기와 먹을 때는 삼겹살, 목살 등의 구이 요리가 좋고, 순대나 수육, 편육 등에도 좋습니다. 쇠고기는 등심이나 안심 같은 고급 부위보다는 오히려 저렴한 잡부위의 고기에 잘 맞습니다. 파스타 같은 밀가루 음식과도 잘 어울립니다. 중국 요리 중에서는 탕수육보단 당도가 덜한 고기 튀김 요리하고 괜찮습니다.